글: 정호청천(鼎湖聽泉)
담사동(譚嗣同), 강유위(康有爲)와 무술변법의 '삼위일체'의 주장으로서, 그들은 성공과 실패를 함께 할 운명이 되었다. 과연 '백일유신'이 실패한 후, 담사동은 죽임을 당하고, 강유위는 망명했으며, 홀로 남아서 죽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게된 운나쁜 광서제는 변법실패의 책임을 혼자서 지게 돈다. 사갈처럼 악독한 친이모(서태후)에게 영대(瀛臺)에 유폐되어 힘들게 10년을 살았다. 원래는 서태후가 죽으면서 그는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데, 결국 미스테리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천고의 수수께끼가 된다. 가경제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두 외인들은 알 수 없는 사인불명이었다. 활실에 태어나면 자유란 없는 것이다.
원래 청나라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었던 그는 대청을 회생시킬 중임을 두 어깨에 지고 있었다. 최소한 아황제(兒皇帝)로서 권력이 안정되지 못했던 광서제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혁신을 통해 강국을 만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스스로 팀을 꾸려서 변법을 끝까지 진행한다. 심지어 급진적인 정도는 군벌들과 연합하여(예를 들어 원세개) "이화원을 포위하여 서태후를 겁박하는"것까지 생각하고, 청나라조정의 '진산신니(鎭山神尼)'인 서태후를 조용히 제거할 계획까지 세운다. 비록 용기는 가상했지만, 결국 이는 모래위의 성이다. 권력을 회수당하니 그는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야했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부지하기 어렵게 된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제약은 받았지만, 광서제는 그래도 일부 법도상 필요한 정치활동에는 참가했다. 예를 들어, 팔국연합군을 상대하는 주전파와 주화파의 토론에 광서제는 어전회의에 참석했을 뿐아니라,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백성의 목숨을 중히 해야한다고 선명한 기치를 내들며 서태후의 선전포고에 반대했다. 결과는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의화단을 믿고 성급히 선전포고를 한 청나라조정은 일패도지하여, 황급히 서쪽으로 도망치게 된다. 광서제까지도 도망황제가 된다. 청나라조정이 상권욕국(喪權辱國)으로 욕먹는 신축조약을 체결하고나서야 비로소 북경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귀경후, 아마도 철저하게 패배한 서태후는 깨달은 것이 있었던 듯하다. 대청과 열강의 차이는 그저 큰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무술변법때의 조치를 일부 실행하고, 동시에 광서제에 대한 정치적제약도 약간 느슨해진다. 심지어 광서제로 하여금 조정에 나가 정무를 처리하도록 하기도 했다. 인생에서 두번째 봄이 왔다고 여기던 그는 그러나 돌연 38세의 나이로 급사해 버린다.
그렇다면, 광서제는 어떻게 죽었을까?
광서제 재첨(載湉)을 얘기하려면 동서태후(자안과 자희)에 의하여 황제에 올라 수렴청정을 당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아황제는 마음과 손속이 악독하고 권력욕에 눈이 어두운 서태후의 엄격한 통제 하에서 살아야 했고, 그가 비명에 죽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4살때, 양궁태후가 청나라조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재첨은 당시에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운좋게 황제의 보좌에 오를 수 있었다. 가경제보다 더 운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운좋게 황제의 보좌에 올랐지만 그도 가경제처럼 미스테리하게 죽고 만다.
비교적 인자했던 동태후 자안이 돌연 사망하면서, 서태후 자희는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약간의 정치적 포부가 있던 '아황제' 광서제의 운명은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18살이 되어서, 광서제는 친정을 하게 된다. 그때 그는 발견한다. 자신의 친이모이며 양어머니인 서태후가 그에게는 최대의 정치적 '걸림돌'이라는 것을. 한명은 권력을 휘어잡고 싶어했고, 한 명은 권력을 빼앗고 싶어했다. 결국 부닥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대권을 장악한 서태후는 광서제를 정치적으로 꼼짝달싹 못하게 묶어놓는다.
백일유신으로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서태후는 이 생각이 많은 '늑대같은' 아황제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종일관 광서제보다 나이가 배는 많았던 서태후는 반드시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 광서제를 자신보다 먼저 죽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청나라의 정계는 완전히 뒤집어지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었다. 자신은 죽어서도 시신이 끌어내져서 채찍질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흉험했던 경자는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격해 들어올 때, 분명히 패배하고 더이상 살길이 없다고 여긴 서태후는 자신이 죽기 전에 먼저 광서제를 죽게 해야 한다고 결정한다. 그래서 이 가련한 광서제는 어떻게 하더라도 희생당할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건 저주이고, 그의 머리 위에 놓인 다모클레스의 검이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제왕가에서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도 가장 악독한 생명의 저주일 것이다.
광서34년(1908년) 십월, 광서제는 중병을 얻어 병석에 눕는다. 그리고 74세의 서태후도 병이 들어 기력이 없었다. 그런데 이연영(李蓮英)이 이런 보고를 한다. 광서제가 일기에 만일 서태후가 자신보다 먼저 죽으면 먼저 원세개와 이연영을 죽여버리겠다고 적었다고. 그 말을 들은 서태후는 마침내 그녀가 죽기 하루 전에, 손을 써서 광서제를 죽여버린다. 이런 역사인식과 서술에 기초하여 광서제가 서태후에게 독살되었다는 것이 정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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