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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북대와 청화

사도뢰등(司徒雷登): 연경대학(燕京大學) 초대 총장

by 중은우시 2023. 1. 4.

글: 청석두설(聽石頭說)

나는 지금까지 돌아가신 한 총장에 대하여 글을 쓰고 싶었다. 그가 창립한 연경대학(燕京大學)은 내가 공부할 인연을 갖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아주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연경대학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북경대학의 캠퍼스에서 한 남학생이 어느 써클의 셔츠를 입고 있는데, 등뒤에 "인진리(因眞理), 득자유(得自由), 이복무(以服務)"라는 아홉글자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대학생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인생의 의미에 대한 미망(迷惘)에 빠져 있었는데, 그 몇 글자는 나에게 서광으로 비쳤었다.

 

나중에 나는 그 아홉글자가 연경대학의 교훈(校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북경대학을 연원(燕園)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북경대학의 핵심지역인 미명호(未名湖)와 박아탑(博雅塔), 그리고 그 주위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근대건축물이 모조리 연경대학의 옛 부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대학의 초대 총장이 바로 사도뢰등인 것이다.

1. 억압을 계속받았던 외교관

 

비록 연경대학에 대하여 나는 낯설지만, 사도뢰등이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봤다.

 

그에 대한 글은 교과서에도 실린 바 있고, 신중국에서는 아주 유명한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그 글의 제목은 <잘가라, 사도뢰등(別了, 司徒雷登)>이다. 

 

이 글의 제목에는 사도뢰등이 들어 있지만, 그를 묘사하는 것은 짧은 몇 줄뿐이었다:

 

"사도뢰등은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다. 중국에 상당히 광범위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고, 중국에서 여러 교회학교를 세웠으며, 항전시기에 일본인의 감옥에 갇힌 바 있다. 평소에 중국을 사랑하고, 미국을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일부 중국인들을 미혹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샬의 눈에 들어 주중대사가 된다."

 

그에게 붙은 레테르중에서 이 말이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다. "중국을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했다" 이 문구는 그의 위군자(僞君子)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다만 대학에서 나는 우연히 연경대학의 교훈을 알게 되고 나서 많은 호기심이 일었다. 그가 일본인의 감옥에서 썼다는 <중국에서의 오십년(在華五十年)>이라는 글을 읽고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사랑을 정말 가장할 수 있단 말인가?

1946년 주중대사로 있을 때

2.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

 

생각해보라. 만일 내가 평화시대의 번영하고 부강한 신중국에서 태어났고 985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졸업에 가까워왔는데도 캠퍼스에서 열리는 채용행사에 참가하여 구직활동을 하지 않을 뿐아니라, 부모에게 "나는 포화가 날아다니는 파키스탄으로 가서 중국어를 가르치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곳에서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고통을 겪는 인민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부모는 분명 나의 이런 국경을 넘어서는 "사랑"에 감동받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내가 무슨 실연을 했거나, 열이 났던지, 일시적인 충동이던지 혹은 적대세력에게 기만당했을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들은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나를 말릴 것이다. 예를 들어, 나에게 최근 신문을 보여주면서, 너는 요즘 파키스탄의 길거리에서 테러리스트에게 피살당한 두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느냐라고 한다든지.

 

다만, 당시 나이 28살의 사도뢰등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갓결혼한 처와 함께 유사한 결정을 내렸고, 미국을 떠나 2차대전에 시달리던 중국으로 올 때, 그의 부모는 오히려 축하해 주었다.

 

왜냐하면 사도뢰등의 부모는 일찌기 자신들이 젊었을 때도 마찬가지의 선택을 했었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미국을 떠나, 1860년대에 이제 겨우 태평천국의 난이 끝나 만신창이가 되어 있던 중국 항주(杭州)로 갔었다.

 

그동안 사도뢰등의 부친 존은 항주 천수당교회(天水堂敎會)에서 일했고, 모친 메리는 항주에서 중국의 두번째 여자중학교를 창립한다. 학비는 무상이었고, 숙식과 의복을 제공했다. 다만, 전족을 하지 말아야 했고, 포판(包辦)결혼(부모가 맺어주는 상대와 하는 결혼)을 허용하지 않아, 중국여성의 교육상황을 바꾸었다.

 

이 한쌍의 경건한 부부는 항주에서 4명의 아이를 낳는다. 그들의 장남인 사도뢰등은 이렇게 미국인으로서 중국에서 출생하게 된 것이다.

사도뢰등의 가족사진(뒤에 서 있는 사람이 사도뢰등임)

 청화대학 총장 매이기(梅貽琦)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자랐다. 나는 내 집을 사랑한다. 그러나, 사도뢰등의 부모는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평생 중국에서 봉사한다. 그리고 나란히 이국타향인 서호의 주변에 묻힌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도 함께하기를 바랐다. 이 전란에 빠진 중국을 위해.  보답을 전혀 바라지 않고, 아무런 연유도 없는 이런 사랑을 도대체 어떻게 가장할 수 있단 말인가?

 

3. 겸허한 지식인

 

사실상 사도뢰등은 자서전에서 솔직하게 이렇게 얘기한다. 처음에는 중국에 오는 것에 대하여 많이 꺼렸다고.

 

그가 중국에 오는 것을 꺼린 것은 그가 11살때 유려한 항주말을 하는 아이로 미국으로 돌아가서 공부할 때, 동서방의 거대한 문화차이를 체험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차이를 적응하기 위하여 엄청난 노력을 했고, 마침내 자신의 모국과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비록 대학2학년때 중국으로 돌아오라는 강력한 호소를 받았지만, 그는 여전히 원치 않았다. "길가의 작은 교회와 묘회에서 게으르고 호기심많은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포교하고; 거의 그저 주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종교소책자를 배부하지만 현지백성들에게는 조롱을 받고; 인생의 여러 번뇌와 고통을 겪어야 하며; 학술연구를 할 기회는 없이, 현대에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사람의 생활을 해야 한다." 이렇게 상세하게 묘사한 것은 분명 그가 어렸을 때 자신의 부친을 관찰한 결과일 것이다. 선교사의 아들로서, 그는 선교라는 것이 무슨 낭만적인 생활방식이 아니라, 성경에 묘사된 그리스도처럼 '사람의 아들로 온 것은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기 위함이다' 이는 완전히 희생하고 자신을 버리는 생활이다.

 

그러나, 결국 사도뢰등은 오랜시간동안의 고민과 철야기도끝에, 여전히 갓 결혼한 처와 함께 이 오래되고 낯선 나라로 가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중국에서 45년간 봉사하면서 평생을 바치게 된다.

 

사람들이 보기에 멍청하고, 댓가도 바라지 않고, 완전히 다른 사람들과 반대의 길을 걷는 것을 어떻게 가장할 수 있단 말인가?

 

4. 위대한 총장

 

1904년 사도뢰등 부부는 중국으로 돌아온 후, 1907년 육영서원(育英書院)과 지강학당(之江學堂)에서 일한다. 1908년 남경의 금릉신학원(金陵神學院)으로 가서 희랍어교수가 된다. 1919년, 사도뢰등은 새로 설립되는 북경 연경대학의 총장으로 초빙된다.

 

이 이력을 들으면 그가 갑자기 대단한 성공을 거두며 신분이 격상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기실 당시의 연경대학이 가진 모든 재산이라고는 겨우 5칸의 강의실, 3동의 숙사, 1칸의 주방, 1칸의 욕실, 1칸의 도서실, 1칸의 교원사무실이 전부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없다는 것이다.

 

매이기가 청화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는 최소한 경비가 충분했다. 그러나, 사도뢰등의 연경대학은 한푼도 없었다.

 

그래서 사도뢰등은 자서전에서, 그 자신을 거지에 비유했다. 중국의 정계요인과 미국의 부호들 사이를 다니며 자금을 모집했다. 그리고 당나귀를 타고 북경의 곳곳을 돌아다녀 연경대학의 캠퍼스부지를 구한다.

 

그런데 10년도 안되는 시간을 들여, 사도뢰등은 거의 아무 것도 없던 연경대학을 지금의 미명호 주변의 중서합벽(中西合璧)의 아름다운 연원으로 만들어내게 된다.

 

중국근대에 가장 유명한 대학은 건물을 가졌을 뿐아니라, 대사(大師)들도 갖게 된다.

 

사도뢰등이 교회학교의 제한을 탈피하여, 주작인(周作人), 풍우란(馮友蘭), 유평백(兪平伯), 사빙심(謝氷心), 전목(錢穆), 고힐강(顧頡剛), 전현동(錢玄同), 에드가 스노등 당시 가장 유명한 교수들을 모시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운영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버드-옌칭스쿨도 만든다.

당시의 연경대학은 지금의 북경대학에 절대 못지 않았다. 연경대학의 짧은 33년간 등록학생은 1만명이 되지 않았지만, 42명의 중국과학원 원사, 11명의 중국공정원 원사를 배출한다. 2차대전때, 중국 각 대도시의 주재특파원중 90%는 연경대학 졸업생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1937년, 연경대학은 250만달러의 기부를 받는다. 그러나 사도뢰등 본인은 아주 청빈하게 생활한다. 세상을 떠났을 때 매이기와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역사책에 기록하기에 충분한 이런 업적을 가볍게 몇 마디로 치부해 버렸다:  "중국에 상당히 광범위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고, 중국에서 여러 교회학교를 세웠다"

 

1926년, 사도뢰등의 처인 아이린이 연원에서 병사한다. 그는 평생 재혼하지 않았고, 매일 새벽에 처의 묘앞으로 가서 정좌하고 기도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 자신이 만든 학교에 묻었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깊은 애정을 어떻게 가장할 수 있단 말인가?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다. 일본헌병이 연원으로 쳐들어와 18명의 연경대학 교수와 학생을 체포하는데, 거기에는 사도뢰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산동(山東)의 집단수용소에 4년간 갇혀 있는다. 출옥후 다음날부터 연경대학을 재건하는데 착후하고, 그해 10월 10일 연경대학은 다시 개학한다.

 

당시 전국에는 교회대학이 무수히 많았다. 상해의 성요한대학외에 산동의 제로대학(齊魯大學)이 연경대학과 나란히 이름을 떨친다. "남제북연(南齊北燕)"으로 칭해진다. 이들은 모두 선교사들이 민국시기에 창조한 교육의 기적이다. 악남(岳南)은 자신의 작품 <남도북귀(南渡北歸)>에서 이 민족사상사를 그린 바 있다.

 

영어의 몸이 되어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이 중국인의 학교를 두고 있었다. 이렇게 전심전력을 투입한 사랑을 어떻게 가장할 수 있단 말인가?

 

5. 처참한 노인

 

1949년 사도뢰등은 미중관계가 악화되면서 쓸쓸히 중국을 떠난다. 미국으로 돌아간지 3개월만에 중풍에 걸려 후반생은 병상에서 지내게 된다.

 

1952년 연경대학이 폐교된다. 홍콩에서는 홍콩중문대학의 숭기학원(崇基學院)에 병합되고, 중국대륙에서는 문과, 이과는 북경대학에 병합되고, 공과는 청화대학에 병합된다. 법학원과 사회학과는 북경정법학원(지금의 중국정법대학)에 병합된다. 

 

1962년, 사도뢰등이 병사할 때, 그의 장례식에 사용된 음악은 중국의 명곡 <양관삼첩(陽關三疊)>이었다.

 

위성조우읍경진(渭城朝雨浥輕塵), 

객사청청유색신(客舍靑靑柳色新)

권군갱진일배주(勸君更進一杯酒)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면 탄식이 나오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연경대학을 창건할 때 "거세무구적(擧世無仇敵, 세상에 원한을 가진 사람이나 적이 없다)"던 사람이 결국 '서출양관무고인'의 처량한 말년을 보낸 것이다.

 

사도뢰등의 임종때 두 가지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하나는 주은래(周恩來)가 그에게 선물한 명대(明代)의 채회화병(彩繪花甁)을 중국에 돌려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유골을 중국으로 가져가서 연원의 처의 곁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세기후에, 연원은 북경대학의 연원으로 바뀌었고, 처의 묘는 북경대학의 체육활동장소가 된다. 그들이 살던 임호헌(臨湖軒)은 북경대학의 회객청(會客廳)이 된다.

 

방대한 연원에 사도뢰등 한명을 받아주지 않았다.

1946년 재미연경대학동문들과 함께

나중에 그의 유골은 돌고돌아 그의 출생지인 항주로 간다.

 

연경대학을 졸업한 빙심(氷心)은 사도뢰등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했다. 학생이건, 종치는 일꾼이건, 아니면 청소하는 사람이건"

 

"이 단체의 아래부터 위까지, 앞에서부터 뒤까지, 합치면 수천수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수천수만명의 생로병사, 혼인등 대사에서 모두 그가 빠지지 않았다. 네가 아이를 낳거나, 병이 들거나, 생일을 보내거나, 친척이 죽으면, 제일 먼저 받는 것은 그가 보낸 간단한 편지이고, 제일 먼저 받는 생화도 그가 보낸 것이고, 가장 먼저 미소로 환영해주는 사람, 가장 먼저 진지한 말로 위로해주는 사람도 모두 그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중국에 주었다. 수천수만의 생로병사를 보살폈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아무도 기념해주지 않았다. 그의 사랑은 가장으로 치부되었다. 그의 일생동안의 심혈인 연경대학은 철저히 갈기갈기 찢어져서 시대의 희생양이 되었다.

 

6. 충실한 종

 

하버드의 교훈은 진리(眞理, Veritas)이다. 스탠포드의 교훈은 자유이고, 프린스턴의 교훈은 복무(服務)이다. 

 

사도뢰등이 정한 연경대학의 교훈인 "인진리, 득자유, 이복무"는 가장 완벽하게 교육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육은 진지하게 진리를 알아내기 위함이고, 진리를 알아야 사람은 자유로워지며, 이런 자유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부리는 자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자유이다. 비록 거기에 도달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바라는 것이다. 

 

교육은 생명으로 생명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매이기가 평생 실천한 "행승어언(行勝於言, 행동이 말보다 강하다)"처럼, 사도뢰등은 평생 자신이 정한 교훈을 실천했다: "인진리, 득자유, 이복무"

 

사도뢰등은 말년에 시 하나를 아주 좋아했다:

 

아요여차사거(我要如此死去)                나는 이렇게 죽고 싶다.

만만시일사명이리(漫漫時日使命已履) 길었던 시간동안 사명은 이미 다 했다.

세모백령가창(歲暮百靈歌唱)                한해가 저물면서 새가 노래한다.

심중이득수보(心中已得酬報)                마음 속으로 나는 이미 댓가를 얻었다.

 

이 노인은 처량한 말년에도 중국에 대하여 아무런 원망이 없었고, 단지 그리워할 뿐이었다. 항상 중국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도뢰등의 항주묘원의 묘지명에는 단지 "연경대학초대총장(燕京大學首任校長)"이라는 글자만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 대한 최고의 찬양이다.

2008년 11월 17일, 사도뢰등의 유골은 항주 반산안현원(半山安賢園)에 안장된다.

이처럼 그는 세상의 댓가를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달려야할 길은 모두 달렸고, 아름다운 일도 그는 해냈다. 지상에 유골이 어느 곳에 놓여있든지간에 천국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