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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북대와 청화

진대손(陳垈孫): "무문서동(無問西東), 방득시종(方得始終)"

by 중은우시 2022. 7. 20.

글: 민국문예(民國文藝)

 

1943년, 서남연대(西南聯大) 경제학과.

 

교실은 학생들로 물샐 틈도 없었다. 경제학과 학생들 뿐아니라 다른 과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 인기있는 과목은 재미있고 통속적인 과목이 아니었다. 추상적인 용어들이 난무하는 전문과목이었다. 경제학개론. 이 강의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교수가 비범하기 때문이었다.

 

수업을 시작하기 5분전, 한 키가 큰 남자가 걸어들어왔다. 그는 잘 다림질된 흑색의 양복과 하얀색의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그 모습은 임풍옥수(臨風玉樹)같았다. 그는 강단에 서서,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담담하고 고귀한 기질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시끄럽던 강의실은 조용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칠판에 영문단어 하나를 적었다. "wants" 그후, 이 단어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의 경제활동의 기원, 동력을 설명하고 다시 효용, 수요공급, 가치를 강의했다. 그의 강의는 장 정리되어 있고, 조리가 분명했다. 글자도 깔끔하게 쓰고 말도 분명하게 해서 그의 강의를 듣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움이었다. 학생들에 따르면, 그의 강의를 듣고나면, 노트에 적힌 내용을 조금만 정리하면 바로 책으로 내도 될 정도였다.

 

어떤 때는 그가 강의를 중단하고, 문답을 진행했다. 

"교수님...." 누군가 손을 들었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자세하게 설명했다.

얼마 후, 또 다른 학생이 비슷한 문제를 물었다.

그는 말했다: "왜 이렇게 멍청하지?"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웃음을 보였다.

 

그는 중국전통학자의 풍도와 영국신사의 세밀함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유머감도 있었다. 그는 금방 학생들의 우상이 된다.

그의 이름이 바로 진대손이다.

 

그는 복건 복주 사람이다. 유명한 '라강진씨(螺江陳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진씨집안은 대대로 선비였고, 가장 휘황했을 때는 일가에서 6명이 거인(擧人)이 된다. "형제삼진사(兄弟三進士), 동방쌍탈괴(同榜雙奪魁)". 청나라말기 마지막 황제의 스승인 진보침(陳寶琛)은 진대손의 백조부이다. 진대손의 외조부가문도 아주 대단했다. 외조부와 외삼촌은 모두 외국주재 공사를 지낸다. 부친계이건 모친계이건 진대손의 가족은 명문집안이라 할 수 있다.

 

진대손은 집안의 장손이었고,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6살때, 진씨사숙(陳氏私塾)에 입학하여, 조부의 가르침하에 많은 중국의 전적을 배운다. 그러나 외조부는 그에게 영어교사를 붙여주고, 그가 영어의 기초를 잘 닦을 수 있게 해주었다. 15살때, 그는 현지에서 이름있는 학령영화중학(鶴齡英華中學)에 입학한다. 그는 2년반의 기간동안 4년에 배울 과정을 모두 배운 후, 합격하기 쉽지 않았던 청화학당(淸華學堂)에 합격한다.

 

2년후, 그는 성공적으로 국비유학생 자격을 취득하여, 미국으로 떠난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당시 그의 반에서 가장 젊은 박사학위획득자였다. 동시에 그는 미국대학생의 최고상인 황금열쇠상을 받는다. 졸업후, 그는 유럽각국을 잠시 유람하고, 귀국하여 청화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해에 진대손의 나이는 겨우 26살이었다.

 

명문집안 출신으로, 어려서 재는을 나타내고, 명문학교에 유학하였으며, 키도 커고 잘 생겼다. 그리고 농구, 골프, 수영, 테니스, 사냥, 댄스를 잘했으며 특히 브리지게임을 잘했다. 이런 특징은 로맨스소설의 남자주인공에 딱 들어맞는다. 당시의 진대손은 로맨스소설의 '백마왕자'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여러해 이후, 그의 한 학생은 테니스장에서의 그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학교 테니스장에서...진선생은 테니스장에서 아주 멋졌다. 그는 자주 네트에 다가가서 상대방을 제압하고 포인트를 따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서남연대의 여학생들은 모두 남자친구를 찾을 때 진대손같은 남자를 원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지만,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낸다.

97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난 그는 혼자서 1세기의 기나긴 시간을 걸어온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진대손이 평생 독신으로 지낸 이유는 한 여자때문이라고 한다.

19살때, 그는 그의 친구와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 다투었고, 마침 둘 다 출국유학을 준비할 때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약속을 한다. 먼저 박사를 따낸 사람이 그녀를 처로 맞이하기로.

이런 계약은 지금 사람의 눈에 유치하기 그지없는 것이지만, 그는 아주 진지했다.

그때는 젊었을 때고 마음 속에는 호연지기가 있었다. 적수공구너이지만, 천하를 호령할 결심과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그때 그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이 세계에서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얻을 것이고, 그의 앞을 기다리는 것은 탄탄대로일 것이며,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여인을 처로 맞이할 터였다.

 

본과졸업후, 진대손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하버드대학에 입학신청을 한다. 하버드에서 그와 같은 반에는 나중에 '독점경쟁'학설을 내놓은 에드워드 챔벌레인도 있고, 나중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와 같은 반의 20여명은 모두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박사학위를 하루빨리 따내겠다고 마음먹었고, 이를 위해 매진했다.

그의 하버드에 대한 기억은 오래되고 아름다운 캠퍼스도 아니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저 도서관의 좁은 공간이었다. 밤이 깊어, 주위가 조용해지면, 그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사사삭 들릴 뿐이었다.

여행도 가지 않았고, 쉬는 날도 없었다. 두번 여름에 여름캠프를 간 것을 제외하면 그는 거의 보스턴을 떠나본 적이 없다.

이렇게 4년이 흘렀다.

하버드에서 7,8년 공부하면서도 박사학위를 따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했지만, 그는 4년만에 처음 중국을 떠날 때 생각했떤 목표대로 박사학위를 따고, 중국 최고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는 모든 진씨자손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정통적인 길을 걸었고, 여러 해동안의 한창고독(寒窓苦讀)으로 빛나는 앞길을 연 것이다.

 

이제 그는 당당하게 그 여자의 앞에 가서 말해줄 것이다. 약속을 지켰다고.

중국의 연극에서는 계속하여 유사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웃집의 아가씨는 영원히 거기에서 집떠난 청년이 금의환향하기를 기다려, 두 사람은 행복하게 여생을 보낸다.

아쉽게도 이건 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동방화촉야(洞房花燭夜), 금방제명시(金榜題名時)"가 아니었다. "인면부지하처거(人面不知何處去), 도화의구소춘풍(桃花依舊笑春風)"이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진대손은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그와 약속한 것은 그가 사랑한 여자가 아니라, 그의 정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황제의 스승이었던 진씨집안의 자손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유가의 풍골을 지니고 있었고, 군자일락천금의 지켰다.

그는 정정당당하게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애정전은 전쟁과 다를 바 없다. 전쟁터에서는 궤계기사(詭計欺詐)가 횡행한다. 변하지 않는 맹약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가 하버드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그의 정적은 선하수위강(先下手爲强), 즉 먼저 손을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그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그가 도의를 지키고 있을 때, 그의 정적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이다.

결국 정적이 미녀를 안는다. 그는 조용히 떠나야 했다. 그후 그는 일생동안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고, 일생동안 독신으로 지낸다.

 

진대손의 학생들이 보기에, 그 여자는 무슨 선녀같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학식있는 가정주부'에 지나지 않았다. 시문을 남긴 것도 없고, 무슨 경국경성의 미녀도 아니었으며, 이름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복이 있어서 이렇게 우수한 그로 하여금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게 만들었을까?

그녀에게 무슨 좋은 점이 있어서, 그가 그녀를 평생 잊지 못한 것일까?

아마도 세상사람들이 추측하는 것처럼 "얻지 못한 것이 가장 귀하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마도 그가 독신으로 지낸 것은 그녀때문이 아니라, 애정의 실패와 친구의 배반이라는 이중타격때문일 수도 있다.

학령중학이건, 청화학당이건, 하버드이건 그는 항상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다. 집안사람들의 총애를 받고, 친구들의 숭배를 받으며, 탄탄대로를 걸은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실패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는 애정의 실패는 그만이었지만, 그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친구의 배신이었다. 그는 첫사랑에서 마치 바보처럼 우롱당한 것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 일은 그에게 얼음물과 같았다. 교만했던 그의 머리에 뒤집어 씌워졌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일생에서 애정에 대한 열정을 사그러지게 만들었다.

그의 실패는 아주 바보같았다. 그러나 숙연하게 만드는 점이 있다. 그는 '일락천금의 석양무사'였다. 그의 이야기는 "약속이 순식간에 뒤집히고, 애정이 정치처럼 순식간에 변화하는 세상에서, 상고신화라 할 만하다."

 

이 세계에서 누군가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하를 얻은다. 예를 들어, "내가 천하인을 배신하더라도, 천하인이 나를 배신하게 놔두지는 않겠다"는 조조이거나, "무뢰한으로 소인에 가까운" 유방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서에 항상 한쪽 귀퉁이는 바보같은 사람들을 위해 남겨진다. 그들은 실패했지만, 영웅으로 불린다. 예를 들어, 화용도에서 신의를 위해 조조를 보내준 관우라든지, 오강에서 자결함으로써 강동부로에 부끄럽지 않고 싶었던 항우라든지, 또 진대손이라든지.

 

진대손의 이야기에 대하여는 또 하나의 버전이 있다. 허연충(許淵沖)에 따르면, 진대손이 평생 독신으로 지낸 것은 왕체징(王蒂澂)이라는 여자때문이라고 한다. 미국유학때, 그와 한 동창생이 동시에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데, 왕체징은 그의 동창생을 선택했다. 그는 물러났고, 평생 독신으로 지낸 것이라고 한다.

이 버전이 널리 알려져 있고, 이야기에서 왕체징이 선택한 그 남자가 바로 주배원(周培源)이라고 한다. 그는 근대 중국 역학(力學)의 기초를 놓은 사람중 한명이고, '양탄일성'의 원훈들 중에서 열에 여덟아홉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왕체징과 결혼할 때, 주배원은 27살이었고, 청화대학 물리학과 교수였다. 진대손과 마찬가지로, 그도 청화학당에서 미국으로 보낸 국비유학생이며,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리고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최고영예상을 받는다. 그의 집안은 비록 "나강진씨"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대로 선비집안이며, 그의 부친은 청나라떄 과거를 통과한 수재였다. 청화대학의 역사상 사진이 하나 남아 있는데, 사진 속의 주배원은 두드러지며 곁에 있는 진대손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주배원, 양사성, 진대손, 임휘인, 김악림, 오유훈, 아이는 양재빙, 양종계.

같은 명문대학 출신에 같이 영준하고 같이 재능도 뛰어나다. 백중지간인 두 사람의 사이에서 왕체징이 주배원을 선택한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왕체징과 주배원의 결혼도 아주 아름다웠다. 수십년후, 조옹(曹禺)은 주배원의 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시 너희 엄마는 정말 미인이었다. 너의 아빠도 아주 멋졌다. 그때 그들이 집을 나서면, 우리같은 청년학생들이 뒤따라가면서 구경하곤 했다." 그들의 딸은 그들이 "평생 한번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버전 중에서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이이 알 수가 없다.

 

앞의 버전의 이야기에 대하여 작자인 당사증(唐師曾)은 확인이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당시 그는 아직 북경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여러번 진대손을 만난 바 있다. 그러나, "내가 여러번 각종 천진하면서 멍청한 문제를 물어본 적이 있지만, 감히 당시 학생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을 감히 물어보지는 못했다. 사방을 둘러보면, 나는 사형들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더욱 믿고 싶다. 왜냐하면 그래야 나의 내심이 아녀정장의 영웅모델과도 부합하고, 더더구나 진대손 선생이 우리 앞에서 보여준 천균태산의 뛰어난 위엄을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의 버전의 이야기는 진대손의 외조카딸 당사복(唐斯福)과 주씨집안의 딸들에 의해 모두 부인된다. 당사복은 특별히 <실실적고사(失實的故事)>라는 글을 써서 분명하게 밝힌 바 있다. 진대손과 주배원이 정적이었다는 것은 나중의 어느 '천재'가 기발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삼각연애이야기'일 뿐이라고. 당사복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모친은 대자보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 물어보았다: '오빠. 이게 사실이예요?' '헛소리!' 진대손의 대답은 확고했다. 같은 시간 주배원의 딸도 집으로 가서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이게 사실인가요?' 얻은 대답은 똑같았다: "다른 사람의 헛소리를 듣지 말아라."

 

자세히 살펴보면 뒤의 버전의 이야기의 작자인 허연충은 1943년에 국립 서남연합대학 외국어과를 졸업했고, 1944년 청화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이치대로라면, 그는 1978년에 북경대학에 입학한 당사증보다는 진대손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대손과 주배원은 전혀 '정적'같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가까운 친구였고, 우정은 근 50년간 계속되었다.

진대손은 주씨집안의 단골손님이었고, 주배원의 머리카락이 먼저 하얗게 되었는데, 그는 농담으로 주배원을 "주백모(周白毛)"라고 불렀다. 그는 자주 외조카딸 당사복을 데리고 주씨집안에 가서 놀았다. 당사복은 이렇게 말한다: "주배원이 우리를 보면 항상 손을 흔들면서 소리높여 말했다: '환영환영 열렬환영!' 주부인은 집안에서 좋은 것을 꺼내와서 우리가 먹으라고 내놓았다."

주배원의 딸들은 진대손을 "진파(陳爸, 파는 아버지라는 뜻)"라고 불렀다. "우리가 보기에 진파는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큰 키에 쭉편 허리, 단단한 걸음걸이, 자상하고 깊은 눈빛, 희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부친은 항상 진파를 gentleman이며, 학문도 뛰어나고, 사람됨도 관후하며 정직하다고 말하곤 했다. 엄마는 진파가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이 배꼽을 잡고 웃는데, 그는 담담하게 있어서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같다고 말했다." 어른이 된 후에 주배원의 딸들도 진대손에게 아주 잘했다. "누가 출국을 하건,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면 사온 것중 가장 먼저 진파에게 보냈다."

주배원(주여령을 안고 있다), 진대손, 왕체징, 김악림(주여안을 데리고 있다), 주자청, 이제동(주여매를 데리고 있다)

진대손과 주배원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그들이 정적이라는 이야기는 너무나 황당무계하다. 그의 외조카딸 당사복도 이렇게 말한다: "그는 독자이고, 부친의 계통에 후대를 이어야 했다. 그가 배운 가학의 훈도나 사람으로서의 전통교육을 보면, 그는 절대로 친구의 처를 사랑하여, 자신의 책임을 잊고, 모친이 그가 독신으로 지내는 것때문에 평생 걱정하며 살았다는 것도 무시하며, 인륜도덕에 위배되는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서남연대의 독신교수들 중에서, 김악림(金岳霖)은 임휘인(林徽因)을 사랑했고, 또한 임휘인집의 단골손님이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고, 결국 임씨집안의 아이들이 "김파(金爸)"의 말년을 보살펴준다.

진대손과 주배원의 우정은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당사복과 주씨집안 딸들의 부인도 '집안 어른을 위해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어쨌든 그 시대에 이런 '스캔들'은 한 사람의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진대손이 왕체징을 사랑했었는지 아닌지는 소문과 부인 속에서 진상을 알아내기 어렵게 되었다. 단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전설 속의 세 사람도 모두 세상을 떠났고, 사람들은 그저 그 시대의 순수한 애정을 그리워할 뿐이다.

진대손이 정말 왕체징을 사랑했으면 또 어떤가. 그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외도'도 아니고, '무슨 제3자가 끼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남자가 자신의 사랑을 굳게 지킨 것일 뿐이다.

그는 그녀의 가정을 교란시키지도 않았고, 그녀를 곤란에 빠지게 만들지도 않았다. 그녀가 곤란한 일에 처하면 그가 항상 도와주었다. "우리 집에는 아이들도 많고, 모친은 몸이 약했다. 집안에 돈이 드는 일이 많아서, 돈이 부족했다. 자주 진파가 돈을 내서 도와주곤 했다."

그의 사랑은 당사복이 얘기하는 것처럼 '윤리도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미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 자주 버려지고 배반되던 시개에 진대손식의 애정이 더욱 고귀하다. 아마도 현재 다시는 일생동안 아무런 희망이 없는 감정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진대손이 독신으로 산 것에 대하여 외조카딸인 당사복은 전혀 다른 이유를 댄 적이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진대손은 공부를 하고, 학문에 전력을 다했다. 성격이 내향적이고, 긍지가 있고, 결벽증이 있다. 게다가 혼인은 두 사람이 서로 원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부친의 사망으로 삼년상을 지내면서 혼인을 할 수 있는 좋은 시기를 놓친 등의 이유로, 그는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순결한 일생을 보내게 된 것이다."

 

진대손이 독신으로 지낸 이유가 이렇게 간단한 것이든 아니든간에 당사복의 진대손의 일생에 대한 평가는 "순결"로 정리했다. 그는 70년간 강의를 했고, 청백한 일생을 모조리 교육사업에 바친 것이다.

항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바로 청화대학을 따라 남천(南遷)한다. 창사에 도착했을 때 몸에는 흰색의 여름장삼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일관되게 깨끗한 사람이었다. 그의 집안에도 의복, 책 심지어 그릇, 잔까지도 모두 고정된 곳에 놓여 있었다. 침대보는 하얀색으로 깨끗하게 세탁되어 있었고, 심지어 물끓이는 차주전자도 수놓은 덮개로 쌓여있었다. 그러나 청화대학이 남천할 때, 교수들은 아주 누추한 대승여관에 함께 지내야 했다. 어떤 사람은 이로 인하여 마찰이 생겼다. 그는 주자청(朱自淸)과 한 방을 쓰게 되었느넫, 아무런 원망도 없었고, 유머스러운 대련을 하나 남긴다:

 

소주위가(小住爲佳), 득소주차소주(得小住且小住)

여하시호(如何是好), 원여하편여하(願如何便如何)

 

좁게 사는게 좋다. 좁게 살 수 있으면, 좁게 산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

 

이치대로 하면, 명문집안 출신에, 뛰어난 환경 속에서 자랐으며, 청화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400은원의 높은 월급을 받았다. 당연히 힘들게 사는 것에 익숙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남연대에 있는 8년간, 그는 희원(戱院)의 포상(包廂, 극을 보는 관객들의 칸막이를 친 자리)에서 살기도 했으며,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고통도 겪는다. 그리고 원고가 전쟁의 와중에 모조리 불에 타버리는 타격도 잆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그는 견뎠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는 자신의 고결함을 지켰다.

1949년, 청화대학의 교장 매이기(梅貽琦)는 그에게 함께 대만으로 가자고 권유받는다. "이건 대만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이다. 장개석 선생이 반드시 당신을 데려와서 대만에 다시 청화대학을 만들자고 말씀하셨다."

그는 거절한다. 왜냐하면 국민당의 부패에 그는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당의 통치를 원치 않았고, 그래서 남기를 선택한다.

나중에 그는 '자산계급학술권위'로 물렸다. 그러나 그의 일관된 품성으로 '우붕(牛棚)'에 갇히지도 않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공선대, 군선대도 모두 그의 기도에 눌려,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못하고, '진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와 같이 미국유학한 경력이 있으면서 문혁10년간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동안 진대손은 학생 한명을 도와준 적이 있다. 그는 그가 30년전에 가르쳤던 학생이다. 그 학생은 1957년에 '우파'로 몰린다. 공직에서 쫓겨났을 뿐아니라, 한때 정신병에 걸려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었다. 퇴원후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 일가족이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거의 구걸로 살아야 했다. 그의 친구들도 연루될까봐 우려하여 그를 피하고 멀리했다. 오직 진대손만이 그의 30년전의 스승만이 이미 70여세가 넘은 백발이 창창한 노인만이 그를 '비호'해 주었다. 비투의 위험이 있음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학생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진대손은 자신의 월급에서 매달 5원을 따로 떼어 그 학생을 도와준다. 그는 하루이틀, 한달두달 도와준 것이 아니다. 8년이나 계속했고, 그 학생이 명예회복할 때까지 계속 그렇게 했다.

그 당시 5원은 적지 않은 돈이다. 가족을 충분히 먹여살릴 수 있는 돈이다. 8년동안 이 매달 5원의 돈으로 죽음의 곁에서 배회하던 일가족은 가장 곤란한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그 시대에 북경대학 물리학과의 섭기손(葉企孫)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다. 죄명은 '반도' '특무'였다. 섭기손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출옥한 후 중병에 걸린 섭기손은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었다. 진대손은 연루될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보러 가고, 음식과 영양제를 건네준다. 섭기손이 사망할 때까지 그렇게 했다.

 

1976년이후, 북경대학의 공농병학생은 기초가 부족하여 차별을 받고 있었다. 그때 그는 다시 들고 일어선다. "이렇게 그들을 대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들도 시대의 피해자이다. 내가 그들에게 강의하겠다." 그는 자신의 강의시간을 늘여, 그들에게 보충수업을 진행했고, 그는 살이 빠져서 뼈만 남을 정도가 된다.

 

그는 평생 남을 도와주면서 지낸다. 마치 그가 여전히 진씨집안의 공자인 것처럼. 돈때문에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명문대학을 졸업해쏙, 일찌기 유럽각국을 다녔다. 그는 가장 오리지날인 오페라를 듣기 위하여 파리에서 로마까지 갔었다. 그러나 그 시대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의 그는 그저 청빈한 노인일 뿐이고, 그의 생활은 자주 곤경에 빠진다. 1995년에도 그의 월급은 겨우 860위안에 불과했다.

그는 이런 사람이다. 부유한 생활을 했었지만, 시종 돈은 신외지물이라 여긴다. 그는 빈곤을 겪었지만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도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힌 고결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때 이익을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대에 그는 연루되는 것을 겁내지 않았고, 기꺼이 그의 학생을 도와줄 수 있었고, 그의 친구를 돌봐줄 수 있었다.

그의 일처리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바뀌지 않았다. 시종 자신의 원칙과 양심을 지킨다. 그후 그는 공농병대학생도 차별하지 않았고, 그들을 위해 나서고 그들에게 보충수업까지 해준다.

 

그는 의(義)를 중시했다. 한 마디 약속때문에 6년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는 정(情)을 중시했다. 사랑하는 한 여자를 위하여 평생을 지켜줄 수 있었다. 

 

1995년, 그의 95세 생일날, 북경대학은 그를 위해 성대한 축하행사를 열어주었다. 그의 제자들이 세계각지에서 찾아온다. 어떤 사람은 백발이 창창했다.

그의 치사는 아주 간결했다: "과거 몇십년간, 나는 오직 한 가지 일만 했다. 바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이다."

그뿐이었다.

그는 진정한 귀족이다.

귀족은 호화주택을 여러 개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고, 명품차를 여러 대 가져야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남연대의 낡아빠진 교사에서 그와 같이 양복에 구두를 신고 와이셔츠는 영원히 하얀색이며, 프랑스식의 와이셔츠단추가 잘 끼워져 있어야 한다. 비가 올 때도 그와 같이 비가 새는 교사에서 강의를 하면서 우아한 웃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1998년, 그는 세상을 떠난다.

그의 생명의 마지막 날, 그는 혼미한 와중에 깨어나서 시계를 보려고 한다. 그의 조카들이 그에게 시계를 보여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매일 6시 30분에 기상하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이곳이 청화대학"이라는 말이었다.

'귀족'이라는 말이 남용되는 시대에 그는 진정한 최후의 귀족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