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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우한폐렴

한 상하이시민의 장례과정에서 겪은 참혹한 경험...

by 중은우시 2023. 1. 2.

글: 원빈(袁斌)

 

상하이에서 코로나환자가 폭발하면서, 사망자수도 폭증하고 있다. 화장장에서는 최대한으로 돌리는데도 시신을 다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 적지 않은 현지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고, 번호표를 받지 못해서, 암거래꾼에게 3만위안을 주고 고가의 번호표를 사야만 했다. 위챗에 널리 알려진 "차마 보기 힘든 참혹함을 보다(慘不忍睹的睹)"라는 글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 글은 12월 30일자로 쓰여졌고, 작자는 상하이시민 푸쩐(傅震)으로, 12월 28일 그가 상하이 바오싱(寶興) 장례식장에서 가족의 시신을 받아 화장하는 절차때 직접 겪은 경험과 들은 이야기들을 적고 있다.

 

푸쩐은 이렇게 말한다. 12월 28일, 새벽7시가 막 지나서, 그의 부인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푸선생은 일어나셨나요. 그에게 바로 준비하라고 말씀해주세요. 몇분후에 우리 차량이 도착합니다. 그를 태우고 시바오싱로(西寶興路)로 가서 서명해야 합니다."

 

푸쩐은 비몽사몽간에 몸을 일으켜,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이빨을 딲고, 세수를 하고, 약을 먹고, 빵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10분후에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단지 광장에 있는 한 차량으로 다가갔다. 왜냐하면, 그 차량만 시동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패딩을 입은 운전기사는 그를 옆좌석에 타라고 했다. 몇초후, 그가 안전띠를 매기도 전에, 바퀴는 이미 단지의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송군(宋氏)이었고, 장례식장에서 일한지 이미 12년이 되었다. "푸선생, 우리 사람이 밤새도록 줄을 서서 겨우 번호 하나를 받아냈습니다. 8시 정각에, 시바오싱루가 문을 열면 시신인수절차를 진행할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시바오싱루는 바로 상하이바오싱장례식장으로 시바오싱루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바오싱루는 바로 장례식장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마치 차오시베이루(漕溪北路)200번지, 완핑난루(宛平南路)600번지가 장례식장, 정신병원의 대명사이듯이.

 

약 20분후에, 골목을 돌아 시바오싱루의 문앞에 도착한다. 푸쩐이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시커멓게 사람들무리가 장례식장의 대문을 물샐틈없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개략 천명가까이 되었다. 길 양켠에는 차량이 수백대 세워져 있었다. 물어볼 필요도 없이 모두 사망자들의 일로 온 사람들이다.

 

푸쩐은 말했다. 송군은 그의 소매를 잡고, 사람들 속으로 밀고 들어갔고, 2명의 검은색 패딩을 입은 아주머니 앞으로 힘껏 밀었다. 아주머니는 송씨를 보더니 기뻐하면서 손에 든 몇 장의 쪽지를 흔들었다. "번호 5개를 땄어." 아주머니는 웃고 있었는데, 눈주위는 짙은 검은 색이었다. 그건 단지 하룻밤만 새운 결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송군은 푸쩐에게 번호표 하나를 주었다. 위에는 176이라고 쓰여 있었다. 대문의 쇠난간에는 한 곳의 틈이 있었고, 6,7명의 보안요원이 지키고 있었다. 한 보안요원은 번호를 확인하고, 번호를 적고, 신청표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후에 한명한면 대문안으로 들여보냈다. 푸쩐의 표에는 177번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로비 2층으로 갔고, 이미 근 200명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줄이 3번이나 돌았다. 8시 정각부터 업무가 시작되었다. 첫번째 관문은 먼저 시신운송건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이 관문은 2개의 창구에서 처리했다. 두번째 관문은 화장건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이 관문은 3개의 상담실에 6명의 업무인원들이 맞이했다. 대기하는 로비와 업무처리하는 곳과는 유리문으로 나뉘어 있었고, 7,8명의 보안요원이 지키고 있었다. 밖에서는 들여다볼 수만 있었다.

 

"나는 급히 장사진의 끝으로 가서 줄을 섰다. 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으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고, 각종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비상시기에 들어가면서, 시바오싱루는 매일 최대한으로 400명의 장례를 접수하고 있다. 룽화(龍華)장례식장도 마찬가지로 매일 400명을 처리한다. 이 두개의 대형 상하이 방례식장은 최대한으로 운영하여 모범을 보이고 있다. 상하이의 또 다른 13개의 장례식장도 최대한 가동되고 있어, 최대의 부하로 운용되고 있다. 나는 수학을 잘 못한다. 이 1곳에 4백명으로 계산해서 상하이의 15개 방례식장에서 하루에 '장례'를 치르는 사람의 수가 몇명이나 되는지?" 푸쩐의 말이다.

 

또 다른 공포스러운 숫자는 푸쩐이 감히 추산조차 할 수가 없다. 상하이에서 도대체 하루에 몇명이나 세상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지? 문앞에 줄서있는 근 천명은 매일 4백명의 한도로 운영되는 장례식장의 공급이 수요를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마도(魔都) 상하이가 아닌가. 상하이라는 도시가 생긴이래, 상하이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적이 있는가? 장모소도회(長毛小刀會)의 폭동? 송호항전(淞滬抗戰)? 흡혈충"만호소소귀창가(萬戶蕭疏鬼唱歌)"? 지금은 죽어도 묻힐 곳이 없다. 귀신조차도 노래를 부를 곳이 없어진 것이다. 줄을 서 있다보니 각양각색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푸쩐은 그 고등학생이 쓴 글 <정말 CCTV뉴스의 세계 속에서 살고 싶다>를 떠올렸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매일 국가위생건강위원회의 공식 통계자료가 나오기 때문이다.

 

푸쩐의 장모는 90고령이었다. 양로원에서 말년을 편하게 보내시고 있었다. 코로나사태 3년동안 무사하게 보냈다. 누가 생각했으랴. 연말에 돌연 "수방자여(收放自如)"의 유령이 나타났고, 양로원도 방역이 무너진다. 간병요원들이 어느 순간 감염되었고, 장모님도 감염되어 버렸다. 4일후 혈액의 산소포화도가 제로(0)로 된다. 4일동안, 양로원이 다른 노인을 응급실로 보내는데 앰뷸런스를 4-5시간 기다려야만 했고,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는데 2-3시간 걸렸다. 그렇게 고생하다가 어떤 노인은 양호원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어쨌든 병원 복도에 누워있는 것이 땅바닥에 누워있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 아닌가. 푸쩐의 장모는 양로원의 의료요원들의 보살핌 속에서 조용히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

 

줄을 서 있다보니,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다니, 어떤 사람은 병원에서 죽었고, 어떤 사람은 집에서 죽었다. 어떤 사람은 양로원에서 죽었다. 모두 병원에서 죽은 사람이 가장 참혹했다는데 동의한다. 시신안치방에 들어가지도 못하여, 복도에 놓여있었으며, 아무도 보살펴주지 않았다. 더더구나 깨끗하게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한 4,50세의 아주머니는 목이 쉬어서 말했다: "나의 모친은 병원에 이틀간 놓여 있었는데, 몸에는 여전히 낡은 스키복을 입고 있었다."

 

두번째로 비참한 것은 집안에서 죽은 사람이다. 장례서비스가 제대로 되지 못하고, 시신을 운구할 수도 없었으며, 그저 산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밖에 없었다. 내 앞에 줄을 서 있던 중년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집에서 돌아가신 어르신을 집안애 6일간 놓아두었다고. "나는 그저 얼음주머니를 쓰고, 에어컨을 최대한 틀어놓아야 했다. 정말 괴로워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울먹이면서 말한다 "집안에는 다른 노인도 있고, 어린 딸도 있는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저으면서 탄식을 터트렸다.

 

"모두 저 총살할 놈때문이다!" 한 사람이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벽에 붙어있는 구호를 가리켰다. 그 구호 아래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총살? 그건 너무 그놈에게 이롭다. 마땅히 천도만과(千刀萬剐)해야 한다" 그 말이 나오자, 여러 소리가 들렸다: 찬성한다는 말, 욕하는 말, 박수치는 소리....

 

세번째로 참혹함이 덜한 사람은 양로원에서 죽은 노인들이다. 최소한 방은 있고, 편안히 누워있을 침대도 있다. 의료기기도 있고, 먹을 약도 있고, 의사도 돌아봐주고, 간병인도 보살펴준다. 어쨌든 최소한의 존엄은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양로원은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어 있고, 생사이별때, 가족들이 직접 보살펴줄 수는 없다. 후손들로서는 임종을 다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더구나 푸쩐은 장모를 위해 옷을 갈아입히고, 얼굴을 다듬어줄 수가 없었다. 지금 장모는 아직 양로원에 누워 있다. "언제 시신을 장례식장으로 옮길 수 있을까?" 푸쩐은 마음이 조급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앞에 줄을 서 있는 사람은 이미 절차를 마치고 나왔다. 그들은 확실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오늘 접수된 사람은 12월 31일이 되어야 비로소 시신을 운구할 수 있고, 1월 1일 화장할 수 있다. 집안에서 죽은 사람은 하루를 앞당겨서 12월 30일 시신을 운구하고, 31일 화장한다. 동시에 장례식장에는 "삼무(三無)"규정을 채택한다. 추도회도 없고, 고별의식도 없고, 화장(化裝)서비스도 없다. 업무를 처리하는 가족은 반드시 상담실로 가서 서명하고 무인을 찍어야 한다. 동시에 가족들은 아무런 비용도 지급할 필요가 없다.

 

"하늘이여, 예의지국에서 생사이별에 아무런 예나 아무런 의가 없다니. 하늘이 벌할 일이다! 우리가 모친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볼 수가 없다니." 푸쩐이 위챗에 보관해둔 장모가 양로원에서 생활하던 영상이 마지막 기념인 셈이다.

 

눈에서 눈물이 나온다. 그러자 로비의 사람들중 누군가 오열하기 시작한다. 줄이 앞으로 나가는 것은 아주 느렸고, 한참 지나갸 겨우 1미터를 나간다. 들어보니, 한번에 5명씩 들여보내니, 4-5시간은 줄을 서 있어야 할 터였다. 왜 창구를 더 많이 열어놓지 않을까? "모두 양성이어서이다. 출근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양성이었거나(楊過), 양성인데 무증상인 사람들(楊康)이다."

 

업무인원도 그러할진데, 로비에 있는 사망자의 가족들은 또 어떠할 것인가? 그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양성일까? 한 꽃무늬 바지를 입은 뚱뚱한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은 모두 양성이다. 부친은 그저께 돌아가셨고, 나도 양성이다. 오늘 억지로 버티면서 시바오싱루로 온 것이다."

 

푸쩐은 양성이었던 적이 없다. 그는 말했다: "나는 호랑이띠입니다. 오늘 '명지산유양(明知山有羊), 편향양산행(偏向羊山行)'(산에는 양(羊, 陽과 발음이 같아서 양성을 말함)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양이 있는 산으로 간다)이다. 호랑이가 양떼들 틈에 떨어진 것이다(虎落羊群)"   

 

그때, 송군이 적시에 도착했고, 2명의 아저씨를 데려오고 등받이없는 의자를 가져와서 자신들을 대신하여 줄을 서게 했다. 푸쩐은 스스로 4-5시간이나 줄을 서 있기 힘들겠다고 생각했었다. 송군은 푸쩐을 3층으로 데려가서, 추도회장 밖에 놓인 쇼파에 앉아 있게 해주었다. 그는 푸쩐에게 아침식사로 사온 것을 건네주었는데, 팥죽 1그릇과 야채만주 3개였다.

 

쇼파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푸쩐과 나이가 비슷하고 붉은색 스키복을 입고, 붉은 모자를 쓴 사람이었다. 며칠 전이라면 푸쩐은 그를 산타클로스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는 푸쩐에게 묻는다: "당신은 몇 살이오?"

 

"73"

 

"아. 나는 72입니다. 당신보다 1살이 어립니다. 당신은 양성확진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당신은?" 그는 푸쩐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나는 아직 양성입니다.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설 때 38도였습니다. 그래서 여기로 와서 좀 쉬고 있는 겁니다."

 

푸쩐은 즉시 그와 자신간의 거리를 눈으로 계산해봤는데, 5미터 이상이었다. 운명은 하늘에 맡기자. 그리고 야채만두를 먹었다.

 

"당신은 볓번인가요?" 푸쩐이 그에게 물었다.

 

"300몇번입니다."

 

푸쩐이 계산해보니, 이 산타클로스는 7,8시까지 기다려야 차례가 올 것같았다. 

 

근 5시간을 기다려서 마침내 푸쩐의 차례가 되었다. 시신운구절차를 처리하기 위해 다시 1시간을 줄서야 했고, 상담실에 들어가 화장절차를 처리했다.

 

송군의 차를 타고 시바오싱루를 떠난 것은 이미 오후2시경이었다. 글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로비에는 아직 200여명이 고생하고 있었다. 대문에는 이미 줄을 서 있었다. 내일 발급하는 번호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생사이별의 고통은 병원, 양로원, 집에서 이루어지지만, 장례식장에도 수없이 많은 상하이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다. 참혹하여 차마 볼 수 없지만, 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