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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문혁(文革)"의 진상을 가장 먼저 통찰한 사람들....

by 중은우시 2022. 9. 7.

글: 부국용(傅國涌)

56년전인 1966년, 중남해에서 일어난 태풍이 밀려올 때, 일시에 파도가 하늘에 닿고, 음습한 바람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많은 노모심산(老謀深算)의 중공고관들이나 전공이 혁혁한 대장, 원훈(元勳)들, 그리고 한 지방을 다스리는 봉강대리(封疆大吏)들까지도 이때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잃고, 그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운명의 처분을 기다렸다. 유소기(劉少奇) 마저도 단지 "다행히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라는 한 마디를 남길 뿐이었다.

문혁발생초기, 많은 권력무대에서 부침을 거듭한 고관들은 거의 모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택동이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랐다. 그래서 앞장서서 이 전민족의 운명과 관련된 동란에 대하여 의견을 제기하지도 않았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도 않았다. 지금 우리는 역사의 큰 파도 앞에서, 진실을 얘기하고, 직접 '황제의 새옷'을 지적한 몇몇 존경할만하고 사랑스러운 소인물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피살당하기도 했으며, 청춘과 생명을 댓가로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문혁'의 역사는 그들이 존재함으로 인하여 약간의 인간미가 있다. 역사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여야 한다: 왕용분(王容芬), 유문휘(劉文輝), 우라극(遇羅克), 육홍은(陸洪恩)....그들은 고위직에 있다가 모택동에 의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대인물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들이 당시 '문혁'에 대하여 분명하게 인식하고 통찰하고 있었다는 것은 중국민족에게 가장 고귀한 정신적 자원이다. 그들의 몸에서 보여지는 도덕적 용기는 인류문명이 지속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동력이기도 하다.

 

19세의 꽃다운 소녀가 모택동에게 문혁을 부정하는 서신을 보낸다.

 

1966년 9월 24일, 북경외국어학원 동구어과 독일어전공의 4학년학생 왕용분은 모택동에게 간단한 서신을 보낸다. 거기에는 정곡을 찌르는 말이 들어 있다: "문화대혁명은 군중운동이 아니라, 한 사람이 총부리로 군중을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날부터 공청단조직에서 퇴출하겠다고 정중하게 성명을 낸다. 그녀는 일찌기 천안문의 "8.18" 접견, 바로 이 홍색해양의 집회에도 참가했었다. 그때 임표의 연설에서 이 독일어를 배우는 학생은 히틀러의 연설을 생각하게 되고, 그녀는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천안문광장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강렬하게 "이 나라는 끝났다! 이 세계는 너무 더럽다.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는 결국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해버린다. 그녀는 중공중앙, 공청단중앙, 단교, '위대한 지도자'에게 서신을 쓴다. 그리고 우표를 붙여 보낸다. 그후 4명의 DDT를 사서 마신다. 당시 그녀는 확실히 죽을 결심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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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이미 공안의원(公安醫院, 경찰병원)에 누워 있었고, 이어서 감옥으로 보내어진다. 근 10년간 갇혀 있다가, 그녀는 1976년 1월 무기징역의 형을 받고, 3년후에는 무죄로 석방된다. 그 서신때문에, 그녀는 감옥에서 13년의 청춘을 보내야 했다. 들어갈 때는 19살의 꽃다운 소녀였지만, 그녀가 나올 때는 이미 33살이 되어 있었다. 감옥은 그녀의 몸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긴다. 그녀는 실제나이보다 훨씬 나이들어보였다. 그녀는 나중에 막스 베버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되고, 중국사회과학원 사회연구소에 들어간다. 그녀는 운이 좋았다. 황제의 새옷을 까발렸다가 총살당한 우라극에 비하면 그녀는 어쨌든 살아남았고, '문혁'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으며, 조신운동(造神運動)의 운멸(隕滅)을 지켜보았으니까.

 

[참고(서신전문)

존경하는 모택동주석께:

당신이 공산당원의 명목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뭘하는 겁니까?

당신이 당의 명의로 생각해 보십시오, 눈앞에 발생하는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이 중국인민의 명의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중국을 어디로 끌고가는 겁니까?

문화대혁명은 군중운동이 아니라,한 사람이 총부리로 군중을 동원한 것입니다.

저는 정중하게 성명합니다: 오늘부터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을 탈퇴합니다.

이상

북경외국어학원동구어과

독일어전공4학년1반학생

왕용분

1966년 9월 24일]

 

청년우파 유문휘는 문혁에 반대하여 처형당하다.

 

19살의 왕용분이 "문혁"은 단지 "한 사람이 총부리로 군중을 동원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때, 30살의 상해청년우파 유문휘는 만자에 이르는 <박문화대혁명16조(駁文化大革命十六條)>를 쓴다. 그는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문화대혁명은 민의를 강간하고, 민중을 미친듯이 박해하여, 전체인민에 대한 대박해이다." "당권자들은 하나같이 천안문성루에 올라 미친 홍위병운동을 일으켜, 궁병독무를 선양하고, 세계혁명을 소리높여 외치며, 신문방송을 장악하여, 전국여론을 조종하여, 대내적으로 폭력독재를 시행하고, 지식인을 진압하며, 사람들이 모두 고분고분 말을 따르고 감히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어, 사회는 햇볕이 없는 암흑세상이 되고, 신주대지는 모든 업종이 망가졌으며, 곳곳에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이 널려 있고, 가난하고 황량하며, 백정문맹의 세상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일을 하지 않고, 농민은 농사를 짓지 않으며, 학생은 공부를 하지 않고, 교사는 우붕(牛棚)으로 끌려가 노역을 하고, 형형색색의 깡패들이 혁명구호를 소리높여 외친다. 무투로 백성을 해치고, 잔혹하게 박해하며, 가산을 몰수하고, 사람을 체포하여 참혹하고 비인간적이다...." 그는 호소했다. "민주주의자는 폭력에 항거하는 투쟁의 기치하에 단결해야 한다." 그는 동생과 함께 14부를 써서, 익명서신의 방식으로 각각 북경대학, 청화대학, 복단대학등 14개의 저명한 대학에 우편으로 부친다.

 

1957년, 20세의 유문휘는 공장내의 상사에게 정풍운동에 대한 이견을 냈다가 우파로 몰린다. 그리하여 스스로 힘든 섬에서 일을 하겠다고 요구한다. 한때, 밀항까지도 생각했고, "현행반혁명"으로 규정된다. 1966년 봄 공직을 박탈당하고, 상해의 고향으로 압송되어 감시감독을 받는다. 그러나 독립사고와 민족운명에 대한 관심의 끈은 놓지 않았다. 만일 소녀 왕용분이 한눈에 '문혁'을 꿰뚫어본 것은 소박한 직관에 기초한 것이라고 한다면, 혹은 생활의 상식이라고 한다면, 유문휘는 장기간의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 견실한 사상적 기초위에서 얻어낸 결론이다. 그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책을 읽었고, <노신전집>을 통해 그리고 호적(胡適)의 사상도 낯설지 않았다. 그는 일찌기 대자보를 작성해서 동생에게 밤을 틈타 상해교통대학의 캠퍼스안에 붙이게 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는 회의(懷疑)를 제창하고 무단(武斷)을 반대한다. 일체의 교조주의에 반대하고, 하나의 자유독립된 사람과 조직으로서 일체의 사상, 일체의 주의에 대하여 반드시 회의를 거친 후에 믿을 수 있고, 반드시 자세히 고찰한 후에 믿을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맹종이다. 우리는 독립사고를 견지하기를 제충하고, 사상독재에 반대하고 정신노예에 반대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호적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깨어있고, 이성적인 목소리는 거국적으로 미친 듯한 조신시대에 특히 얻기 힘든 것이었다. '문혁'은 법치전통이 없는 국가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문혁'은 또한 독립사고가 결핍된 민족에게서나 발생할 수 있다. 유문휘는 당연히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이었다. 그는 동생에게 말한다. 자신은 기꺼이 당대의 담사동(譚嗣同), 중국의 프로메테우스가 되겠다고. 그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만일 총구를 몸으로 막지 않으면, "모택동 일인독재로 하고 싶은대로 하며, 중국은 조만간 봉건사회로 퇴보할 것이다" "고금중외에 반독재, 반전제에는 반드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고,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려서, 고난에 빠져 있는 연약한 민중이 들고 일어나 반항하도록 환기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나 유문휘부터 시작하겠다!"

 

1966년 11월 26일, 달은 어둡고 바람은 강했던 밤에, 유문휘 형제는 속속 체포된다. 1967년 3월 9일, 유문휘는 상해시중급인민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1981년에 이르러 비로소 무죄가 선고된다.

 

모택동은 직접 우라극을 총살하는 명령을 비준한다.

 

설사 암흑의 잔혹한 '문혁' 감옥에도 해외에서 돌아온 상해교향악단의 지휘자 육홍은은 구차하게 생명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죽기 전날 밤에 25분간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한다: "나는 살고 싶다. 다만 이렇게 행시주육(行屍走肉)처럼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자유가 없으면 차라리 죽겠다.' 문혁은 포학, 호겁이고 재난이다. 나는 포학, 호겁, 재난 속에서 구차하게 삶을 탐하고 싶지는 않다." "문혁은 진성(眞誠), 우의, 애정, 행복, 영정(寧靜), 평안, 희망을 앗아갔다. '문혁'은 거의 전대륙의 지식분자를 처리하려 한다. 거의 중화문화의 생멸줄을 끊어버리려 한다." "만일 사회주의가 이렇게 잔인무비한 방식이라면 나는 차라리 '반혁명'을 하고, 차라리 '반사회주의분자'가 되겠다. 독재독단하며 사람들을 미신하게 만드는 모택동의 '순민(順民)'은 되지 않겠다." 4일후, 그는 총살당한다. 당시 같은 감옥에 있던 젊은 정치범 유문충(劉文忠)은 여러 해후 회고록 <풍우인생로>에서 이 음악가가 생명에 남긴 마지막 이 말을 기록했다.

 

우라극은 <혈통론>으로 특권사회의 급소를 건드려 총살당한다. 그는 일찌감치 문혁초기에 문혁에 의심을 품는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은 비정상적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대에 보기 드문 깨어있는 의지가 굳은 사상가중 한명이었다. 우라극과 비교하면, 유문휘는 너무나 적게 관심을 받았다. 그의 동생 유문충이 2004년 마카오에서 출판된 <풍우인생로>는 인쇄량이 너무 적어서 아는 사람이 적다. 내 인상에 단지 <개방>잡지에서 일찌기 누군가 글을 써서 유문휘를 소개했을 정도이다. '문혁'40주년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상의 선열을 생각했는지, 감히 문혁초기에 죽음의 위험을 무릎쓰고 진실을 말한 사람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40년전에 굴렀던 파도는 지금도 여전히 역사속에서 숨쉬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지고 있는 것은 자유의 푸른하늘이 아니고, 죽은 사람의 망령은 아직 안위를 받지 못하고 있다. 문혁은 '40년'후에도 여전히 금기시되고, 기념활동도 할 수가 없다. 더더구나 공개적으로 반성하거나 토론하지도 않는다. 거기에 숨은 논리는 마치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같다. 강력한 권력으로 전체 민족에게 '문혁'을 잊어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문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잊기를 거부한다. 더더구나 선택적으로 잊기를 거부하고, '문혁'을 주목하려면 먼저 유문휘, 우라극같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왕용분같은 생존자를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 10년간 이루어진 사태의 비밀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는 더더욱 잊을 수가 없다. 우라극이 총살된 후, 고관자제들은 신이 나서 춤을 추었다는 것을.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한다. "주석은 역시 계급의 이익을 보호해준다." 전해지는 바로는, 우라극을 총살시킨 최종결정은 바로 공안부장 사부치(謝富治)가 모택동에게 보고하고, 모택동이 직접 총살을 비준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