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리커창(李克强)
(1955년 7월생, 안후이 딩위안(定遠)사람. 1974년 3월 참가공작, 1976년 5월 가입중국공산당, 북경대학 법률학과와 경제학원의 경제학전공졸업. 법학학사, 경제학박사. 현임 중공19기 중앙정치국상위, 국무원총리, 당조서기)
20년전, 바로 이 계절에, 당시 중국시골의 한 척박한 토지에서 나는 대학입시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북경대학과 인연을 맺게 된다.
대학입시지원서를 쓰기전에, 나는 예전에 만나서 알고 있는 학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일찌기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북경대학에 지식의 금자탑이 있다고 깊이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편지에서 나에게 말해주었다. 이 십년만에 한번 올 수 있는 기회를 귀하게 여겨, 북경대학을 유일한 선택지로 삼으라고. 당시의 나는 많은 시간을 시골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 큰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생존욕과 지식용이 교차하는 와중에 나는 1차지원난에 안후이성의 한 사범학원의 이름을 써넣었다. 그때 사범학교는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었다. 그렇지만, 나는 북경대학에 대해서도 억제하기 힘든 그리움이 있었고, 그래서 2차지원난에 북경대학을 써넣었다. 아마도 북경대학에 우선선택권이 있었던 것같다. 북경대학은 나의 불경에 가까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나를 합격시켜 주었다.
더욱 생각지 못했던 것은 그후 본과에서 석사, 박사과정까지 나는 근 10년간 북경대학의 학생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간동안, 지식은 소위 '폭발'적인 속도로 확장되었고, 지식의 전파장소와 수단도 날로 다양화되었다. 그러나 나는 재삼 시험을 쳐서 북경대학의 학생이 된다.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내가 이곳에서 찾은 것은 지식만이 아니라. 성격을 도야하고, 학풍을 갈고닦은 것이다.
북경대학의 성격, 학풍 혹은 북경대학의 정신은 북경대학의 스승들에게서 특히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계선림(季羨林, 1911-2009)
내가 처음 북경대학에 남아서 일을 시작했을 때, 교외에서 개최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원반점(西苑飯店)에 투숙했고, 계선림 교수님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계 교수님은 회의에 참가하는 태도가 아주 진지했고, 큰회의건 작은회의건 가리지 않고 모두 참석하셨다. 그리고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회의에서는 발언자가 주제를 벗어나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는데, 그럴 때면 계교수님은 손가락을 다리 위에 놓고 계속 굴렸다.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계교수님에게 왜 그렇게 하시는지 여쭤보았다. 계교수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시간을 외국어단어 복습에 쓸 수 있다. 내 생각에 계교수님은 자신이 연구하는 글들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확실히 남는 시간도 그냥 흘려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한 영어법률서적을 번역했는데, 영국의 법률저작중에는 자주 고대용어가 나오곤 했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번역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한 단어를 정말 알기 힘들었다. 할 수 없이 계교수님께 부탁했다. 계교수님은 그 자리에서 설명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우선' 이렇게 번역하면 될 것같다. 나는 잠시 왜 '우선'이라는 말을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 저녁, 계교수님은 회의장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다음 날 돌아오신 후, 그는 다시 나에게 그 단어의 유래를 설명해주시면서 여러가지 의미를 아주 상세하게 해석해주었다. 나는 상상도 못했다. 계선생이 그 문제때문에 학교로 돌아가서 그날 저녁에 진지하게 이 단어에 대하여 다시 찾아보았다는 것을. 아마도, 계선생은 나에게 어떤 지식을 전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보다는 실질적으로 당신의 행동은 '나는 나의 스승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더욱 좋아한다"는 의미를 체현했다고 본다.
진리추구에 집착하며 평상심으로 학술논쟁과 자신과 다른 의견을 대했다; 진리를 숭상하지 허명을 추구하지 않았다. 소위 체면과 존엄은 중시하지 않았다. 이것은 북경대학의 많은 스승들이 보여준 일종의 정신이다. 이런 정신수양으로 한가지 성격을 가지게 된다. 위존자불교(爲尊者不驕), 대우자불긍(待愚者不矜)(자신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교만하지 않으며,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하여 무시하지 않는다)의 모습이다.
공상서(龔祥瑞, 1911-1996)
내가 본과에서 공부할 때, 1930년대에 영국유학한 공상서 선생이 나에게 영미법을 가르쳐주었다. 1970년대에 서방선진국이 신기술혁명의 붐이 일어나고, 사회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들어올 때, 컴퓨터도 법률과 인연을 맺는다. 공선생은 국내에 이런 동향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하나 초안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의 학생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세대로서 당연히 여기에 흥미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원고를 나에게 건네주면서 나에게 보충, 수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아마도 내가 당시에 아직 어려서일 수도 있고, 더더욱 내가 항상 교수님들의 그런 마음에 감염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런 망설임없이 공선생의 요구대로 했다. 그리고 평상심을 가지고, 교수님게 드렸다. 공선생은 수정된 원고를 보시고는 바로 OK하셨다. 그리고 나와 그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서 한 법학잡지에 발표한다. 당시의 법학잡지는 종류가 많지 않았
다. 그래도 편집부에서는 바로 이 글을 실어준다. 아마도 공선생의 이름이 들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북경대학에서 학생과 교수들은 모종의 평등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지식에 대한 존중이며, 진리에 대한 숭상이다. 지식과 진리에 대하는데 개인의 체면이나 존엄은 없다. 이것은 일종의 "사도(師道)"라 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이 가르치는데 엄격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이다. 이에 기하여 교수님들은 학생들이 단순히 지식 자체가 아니라 더더욱 지식의 무게를 느끼기를 요구한다. 추구하는 것은 진실한 학문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허황된 광환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990년대초, 나는 북경대학에서 경제학박사과정을 공부했다. 당시 북경대학에 재직하는 박사생들은 거의 같은 요구를 받았다. 특히 공공과목분야에서 시험이 자주 있었다. 설사 육체노동을 하지는 않고 공부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는 않았다. 나는 한편으로 공부하면서 계속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피로가 쌓여서 크게 병을 앓게 된다. 이에 대하여 학교의 정책은 연기할 수는 있지만 시험을 면제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시험은 모두 신경써서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다. 나는 할 수 없이 병이 어느 정도 나은 후, 다시 나보다 10살가량 적은 '동창'들과 함께 시험을 치러야 했다. 나는 이때 느낄 수 있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주는 기회와 도전은 균등하다고. 당시 나는 박사논문을 쓰고나서, 스스로 괜찮게 썼다고 생각해서, 려이닝 선생에게 답변절차를 준비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려선생은 그 자리에서 심사위원 명단을 보여주었다. 규정에 따르면, 10여명의 자격을 지닌 사람이 평가심사에 참여해야 했다. 다만 려선생이 내놓은 명단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국내경제학계의 대가들, 심지어 권위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려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분들이 중요시 하는 것은 논문자체의 무게뿐이다. 논문의 표면 혹은 다른 학술과 무관한 것들에게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야 너에게 유익할 것이고, 너의 논문이 진실한 평가를 받고, 여러가지 검증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명단 때문에 나는 다시 논문을 한번 수정했고, 답변일자는 반년을 미뤄야 했다. 그때 나는 체험할 수 있었다. 엄하게 가르치는 것은 마찬가지로 지식에 대한 존중이고 진리에 대한 숭상이라는 것을.
북경대학에 일류의 학자들이 많이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아주 행운이다. 더욱 고귀한 것은 그들이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할 뿐아니라, 학생들에게 진리의 의미를 같이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 오래된 대학은 남다른 풍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으로서, 고귀한 점은 외부적인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이 아니다. 심지어 지식이나 재부를 점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내재적인 역량이다. 일종의 영구히 지속될 전통이다. 이런 전통은 지식이 교체됨으로 인하여 중단되지 않는다. 그것은 초월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시 지식과 재부를 만들 능력이 있는 것이다.
북경대학의 전통을 깊이 체득한 분들은 자연히 북대의 그 교수님들이다. 그들은 몸과 마음으로 전수한다. 그리하여 전통이 인격화되고, 하나의 경지로, 일종의 품격으로 표현된다. 이런 품격과 경지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잉태되는 것이고, 거기에서 기도(氣度)가 파생되며, 유용내대(有容乃大, 포용력이 있어야 크다)의 기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중국고대의 지식인들이 사람들에게 자연계만 가진 것이 아닌 이치를 알려주었다. 바다가 모든 강의 왕이 된 것은 그가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기 때문이다. 허회약곡(虛懷若谷)의 기도로 인류가 창조한 일체의 문명성과를 대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설사 조금 부족한 총명재지라도 잘 대해주면, 휘황을 창조해낼 수 있지 않겠는가?
북경대학의 백년역사는 휘황하다. 그리고 때때로 파란도 있다. 다만 많은 북경대학의 스승들이 거기에 있으면서 시종 국가와 민족에 대한 책임을 나타냈고, 학자로서의 마음도 있지 않고, 자연, 사회와 안류가 모르는 부분을 깊이 탐색했다. 바로 그들이 있기 때문이 이 오래된 대학의 정신과 혈맥은 전승될 수 있었다.
북경대학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잊기 힘든 사람은 바로 그 스승님들이다. 삼가 그들을 위해, 그리고 북경대학을 위해 백주년을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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