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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옹정제(雍正帝)는 왜 아홉째 동생 윤당(允禟)을 죽였을까?

by 중은우시 2022. 10. 19.

글: 역사상적괴점(歷史上的拐點)

 

옹정4년(1726년) 팔월 이십칠일, '팔야당(八爺黨)'의 핵심구성원중 하나였던 윤당(胤禟, 나중에 피휘로 允禟으로 개명)은 3개월간 각종 혹형을 받은 후, 보정(保定)의 한 감옥에서 처참하게 죽는다.

 

이 날은 마침 윤당의 마흔여섯살 생일이었는데, 이제는 그의 기일이 되어 버렸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경성에 전해졌다. 옹정은 그 소식을 들은 후, 그저 담담하게 "자복명주(自伏冥誅)"라고 한 마디 했다. 이 말의 뜻은 바로 윤당은 죽어 마땅했고,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의 아홉째 동생인 윤당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옹정제가 그를 그렇게 괴롭혔고, 죽고나서도 전혀 애석해하지 않다니.

 

이 모든 것은 옹정제가 즉위한 후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강희61년(1722년), 강희제가 창춘원(暢春園)에서 사망했다. 임종때, 황위를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에게 넘겨준다. 그후 윤진은 강희제의 영구 앞에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옹정제이다.

 

비록 황위를 승계받는데 성공했지만, 옹정제는 당시 힘들게 지내야 했다. 그가 황위를 잇게 되면서, "팔야당"의 윤사(胤禩)등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들은 자연히 이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옹정제와 "팔야당"간의 투쟁은 옹정제의 즉위로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다툼이 더욱 심해진다.

 

팔야당이 계속하여 황위를 노린다는 것을 옹정제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자신의 황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리고 팔야당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옹정제도 여러가지 조치와 조정을 한다.

 

먼저,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대거 발탁 등용한다. 예를 들어, 즉위초기 자신의 확실한 심복인 황십삼자(皇十三子) 윤상(胤祥)을 친왕으로 승진시키고, 여러 권력을 부여한다.

 

윤상 외에 옹정제는 롱커도(隆科多), 마치(馬齊)등도 발탁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의 역량을 점점 강화시킨다.

 

자기 사람을 대거 발탁하는 동시에, 옹정제의 팔야당에 대한 정책은 즉시 타격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분화 와해시키는 책략이었다. 그렇게 하여 하나하나 팔야당을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한 것은 주로 당시 팔야당의 세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만일 이제 막 등극한 옹정제가 너무 서두르다가는 쉽게 반격을 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강희제가 죽은 후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는데, 만일 옹정제가 대거 숙청을 진행한다면, 천하에 욕을 먹을 수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의 황십사자 윤제(胤禵)가 아직 서북에 중병(重兵)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옹정제가 경거망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팔야당의 수뇌인 윤사에 대하여 옹정제는 타격을 가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를 "화석염친왕(和碩廉親王)"으로 승진시키고, 그를 "총리사무왕대신(總理事務王大臣)"에 임명한다. 이렇게 한 것은 윤제를 안심시키면서, 동시에 팔야당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옹정제 자신이 살수를 쓰지 않을 것이라는 겉모습을 보여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옹정제가 비록 일시적으로 윤사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윤사를 따르는 자들에 대하여는 전혀 봐주지 않았다. 황구자(皇九子) 윤당이 바로 가장 먼저 당한 사람이다.

 

사료에 따르면, 옹정원년, 옹정제는 "왕공을 전선에 파견한다"는 것을 이유로 윤당으로 하여금 서녕(西寧)으로 가도록 명령했다. 비록 윤당이 여러가지로 저항했지만, 결국은 따를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서녕으로 간다. 이때부터 감시당하고 구금당하는 처참한 생활이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왜 윤당은 옹정제가 "팔야당"을 수습할 때 가장 먼저 처리한 인물이 되었을까? 이는 윤당이 "팔야당"에서 맡은 역할, 그리고 그의 옹정제에 대한 태도와 아주 큰 관계가 있다.

 

윤당이 "팔야당"에서 맡은 첫번째 역할은 "자금줄"이었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윤당은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고, 어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그는 영어, 러시아어등 여러 외국어에 능통했다. 그외에 그는 사업적 두뇌가 있어 재산을 불리고 사업을 하는데 뛰어났다.

 

그래서, 그는 강희제의 여러 황자들 중에서 가장 돈이 많았다.

 

돈만 있어서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윤당은 아주 통이 컸다. 특히 "구자탈적(九子奪嫡)"의 기간동안, 윤당은 윤사를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큰 돈을 쓴다.

 

당시, 윤사는 황태자의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세력과 역량을 키워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정의 중요한 관리들과 교분을 맺어야 했고, 거기에는 돈이 들었다.

 

만일 윤사 자신의 봉록만으로는 확실히 부족했다. 그러나, 윤당이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당시 윤당은 윤사를 위해서 돈을 쓰는 방면에서 필요한만큼 대주는 식이었다. 윤사가 말만하면 바로 처리하곤 했다.

 

예를 들어, 당시 윤사는 자주 일부 술사(術士)를 집으로 불러 자신을 위해 점을 치게 했는데, 매번 비용이 적으면 백냥, 많으면 수백냥이었다. 이런 돈은 모두 윤당이 냈다.

 

그뿐 아니라, 윤사의 사부 하작(何焯)의 처가 병사한 후, 윤사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보이기 위해, 윤당은 하작의 집에 2천냥의 은자를 보내준다.

 

윤사가 관리들과 교분을 맺는데 필요한 돈에 충당할 수 있도록, 윤당은 당시 윤사의 집으로 은자를 계속 보내주었다.

 

윤사를 위하여 돈을 아끼지 않은 외에, 윤당은 황십사자 윤제에 대해서도 아주 잘 대해주었다. 예를 들어, 강희57년, 윤제가 무원대장군(撫遠大將軍)에 임명되어 출정할 때, 윤당은 그에게 2만냥을 건네준다.

 

그후 윤제가 서북에 있는 동안, 윤사는 계속하여 사람을 시켜 돈을 보내준다. 전후로 보낸 돈만 수만냥은 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팔야당이 각종 활동을 거행하거나 참여할 때, 윤당이 배후에서 묵묵히 돈을 댔다. 이것이 바로 팔야당이 적지 않은 지지자들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팔야당을 지지하고, 자금을 끊임없이 대주는 '자금줄'를 옹정이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금줄'역할을 하는 외에, 윤당은 "팔야당"에서 확실한 지지자역할도 했다. 그의 윤사에 대한 지지는 마치 황십삼자 윤상의 윤진에 대한 지지와 같았다.

 

윤당과 윤사의 감정은 오래전부터 아주 두터웠다. 두 사람은 비로 나이가 별로 차이나지 않았지만, 윤당은 윤사의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겼고, 그를 존경했다. 더더욱 윤사에게는 "정기(正氣)"가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아주 어려서부터 윤당은 윤사를 따르고 지지했다.

 

예를 들어, 강희47년, "장명덕(張明德)이 윤사의 관상을 봐준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은 강희제를 대노하게 했다. 그리고 조정에서 윤사에 대하여 "망축대지(妄畜大志), 당우상호구결(黨羽相互勾結)"(헛되이 큰 뜻을 품고, 일당들이 서로 결탁했다)했다고 책망했다. 그리고 윤사를 붙잡아 심문하도록 명한다.

 

바로 이 때, 윤당은 윤사가 억울하다고 여겼다. 부친 강희제가 머리끝까지 화난 상태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여전히 나서서 윤사를 위해 변명한다. 결국 강희제는 화를 내며 그 자리에서 그의 뺨을 두 대 때린다.

 

그렇지만, 윤당은 윤사와 환난을 함께 하겠다는 뜻을 꺽지 않았다. 그후 윤사가 심문을 받을 때, 윤당은 몸에 독약을 품고, 스스로를 묶고서 직접 윤사와 함께 간다. 이를 통해 자신은 윤사와 환난을 함께하겠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윤당은 윤사의 확실한 추종자라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의 윤사에 대한 지지는 황십삼자의 옹정제에 대한 지지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이런 사람을 옹정제가 어찌 경계하고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팔야당'을 분화시키고 와해시키려면, 자연히 먼저 윤당이라는 이 확실한 지지자부터 없애야 했다.

 

만일 윤당이 '팔야당'에서의 역할때문에 옹정제의 미움과 원한을 샀다면, 그의 옹정제에 대한 태도는 옹정제가 그를 죽여야겠다고 마음먹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윤당의 옹정제에 대한 태도는 한 마디로 말해서 '불복(不服)'이다. 그것도 드러내놓고 하는 불복이다.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강희제가 붕어했을 때, 윤당과 그의 생모 의비(宜妃)가 강희제의 영구 앞에서 옹정제에게 한 행동은 옹정제를 폭발하게 만들었다.

 

먼저, 의비이다. 의비는 강희제가 살아있을 때, 큰 총애를 받았다. TV드라마 <강희미복사방기>에 나오는 의비(宜妃)의 원형인물이 바로 윤당의 생모이다.

 

강희제가 사망한 다음 날, 의비는 강희제의 영당에서 이전에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을 내세워, 고의로 옹정제의 생모인 덕비(德妃)보다 앞자리를 차지한다.

 

이 일이 이전에 벌어졌다면 상관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옹정제의 생모인 덕비는 이미 황태후(皇太后)에 봉해진 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의비가 이렇게 한 것은 명백하게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더 나아가, 의비는 옹정제와 덕비를 전혀 눈아래 두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당시 의비는 옹정제를 보고서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극도의 오만한 모습을 보였다.

 

옹정제는 의비가 자신의 모비(母妃)라는 점을 고려하여 그 자리에서 폭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옹정제는 사소한 원한도 반드시 갚는 인물이다. 의비가 그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들었는데, 그가 어찌 가만히 참고 넘어갈 것인가.

 

그래서, 강희제는 장례식을 치른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의비의 주변 사람들을 제거한다. 먼저 의비를 모시는 태감 20여명을 모조리 체포한다. 그후 이들을 영고탑(寧古塔)으로 유배보내 노비로 삼는다.

 

심지어, 옹정제는 만일 이들 중 감히 가지 않으려는 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참살하고, 시신은 불태워버리며, 불탄 유골을 영고탑에 보내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나중에 옹정제가 강희제의 비빈들에게 봉호를 추봉할 때, 고의로 의비는 누락시킨다.

 

의비가 옹정제에게 악독한 태도를 보인 것 외에, 의비의 아들인 윤당도 옹정에 대한 태도가 극도로 좋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강희제의 영당에서 옹정제가 꿇어앉아 통곡을 하고 있을 때, 윤당은 오만무례하게 강희제의 유체와 마주 앉았다. 전혀 신하로서의 예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더욱 옹정제를 화나게 만든 것은 강희제의 대렴(大殮)을 진행할 때, 모든 사람이 애도하는데, 윤당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것이다.

 

옹정제는 윤당에게 왜 너는 슬퍼하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는데, 윤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직접적으로 옹정제에게 반문한다. 그가 황위를 찬탈하지 않았느냐고.

 

이런 장면으로 옹정제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된다.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윤당의 옹정제에 대한 태도이다. 즉 드러내놓고 불복한 것이다. 윤사가 암중으로 수완을 쓰면서, 겉으로는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 것과는 달리, 윤당은 드러내놓고 옹정에 대항했다. 옹정제의 체면은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옹정제는 물론이고, 고대의 어느 제왕이라도 용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강희제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된 옹정제는 윤당에 대해 손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윤당이 옹정원년 서녕으로 쫓겨간 후, 옹정4년 처참하게 죽을 때까지 어떤 일이 있었을까?

 

처음에 즉 옹정원년, 옹정제는 서북군에 사람이 부족하여, '왕공을 파견하여 전선에 보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윤당을 서북으로 보낸 것이다.

 

윤당은 당시 계속 저항하면서, 미루고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이월이 되자 옹정제는 그를 강제로 서녕으로 보낸다. 그리고 그에게 태감 몇명만 데려갈 수 있게 한다.

 

서녕에 도착한 후, 옹정제는 다시 연갱요(年羹堯)를 시켜, 윤당을 현지의 대통성(大通城)으로 보내고, 연갱요에게 그를 엄밀히 감시하도록 명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윤당을 서북으로 보낸 것은 기실 그를 연금하고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이 기간동안, 윤당은 여러번 옹정제에게 서신을 보내어 북경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옹정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전히 서녕의 대통성안에 가두어 둔다.

 

그리고 이 곳에서, 윤당은 근 4년의 세월을 보낸다. 배록 행동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그래도 목숨은 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옹정4년에 이르러, 윤당의 처지는 크게 바뀐다. 진정 힘든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옹정4년 정월, 이미 패자(貝子)로 강등되었던 윤당은 이때 패자의 작위도 박탈당한다. 그후에는 황대자(黃帶子)도 박탈당하고, 종적(宗籍)에서도 삭제된다.

 

이것은 옹정제가 이미 윤당을 애신각라 족보에서 빼버렸다는 것이다.

 

이건 아직 시작이다. 그해 삼월, 옹정제는 다시 명령을 내려, 윤당의 이름을 "사이쓰헤이(塞思黑, 만주어로 혐오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함)"로 개명시킨다. 윤당이 개명당한 외에, 윤당의 ㅡ아들들도 모조리 옹정제에 의해 개명당한다. 바뀐 이름은 모두 좋지 않은 뜻이다.

 

그해 사월에 이르러, 옹정제는 다시 성지를 내린다. 윤당을 북경으로 압송하라는 것이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당시 윤당은 몸에 세 줄의 무거운 쇠줄로 묶여 있었고, 걸어서 북경까지 가야 했다고 한다.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윤당은 여전히 담담하게 웃으면서 평소와 같았다고 한다. 사료의 분석에 따르면, 그는 당시 옹정제가 그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정에 이르렀을 때, 직예총독 이불(李紱)이 그를 감옥에 넣었고, 그는 그제서야 자신에게 큰 화가 닥쳤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윤상이 감옥에 갇힐 때, 아주 놀란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불에게 자신이 옹정제에게 글을 올리면 자신이 풀려날 희망이 있는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옹정제가 그를 풀어줄 리 있겠는가? 그리고 윤당을 감옥에 가둔 후, 옹정제는 이불에게 윤당의 대우에 관하여 별도로 명을 내린다.

 

"형편없는 음식을 보내주는 것 외에, 일체의 붓, 먹, 침대, 휘장, 책, 글자, 얼음 한조각, 탕 한 숫가락도 주지 말라" 

 

이렇게 하여 윤당은 좁은 감옥에서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게 된다. 당시는 이미 음력 오월중순이었고,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윤당이 갇혀 있는 감옥은 사방이 막혀 있었고, 오직 식사를 넣어주는 조그마한 구멍만이 있었다. 그 안의 윤당은 생불여사의 상황이었다.

 

사료기록에 따르면, 당시는 날씨가 덥고, 실내공기가 유통되지 않아서, 윤당은 여러번 더위먹어 혼절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다행히 당시 그의 몇몇 가솔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어서, 차가운 물로 몸의 체온을 내려주어 윤당이 다시 깨어나곤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윤당의 가솔들도 격리수감된다. 그래서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게 되자 윤당은 더욱 처참했다. 게다가 몸에는 쇠줄이 묶여 있어, 고통이 더욱 심했다. 

 

이렇게 하여, 감옥에 갇힌지 3개월후에, 결국 윤당은 감옥 안에서 죽고 만다. 나이 겨우 46살이었다.

 

윤당이 죽은 후, 그의 적푸진(嫡福晋) 동악씨와 장남 홍성(弘晟)도 모두 옹정제의 명으로 감옥에 갇힌다. 그중 동악씨는 감옥에서 사망하고, 홍성은 50여년간 갇혀 있다가, 건륭43년이 되어서야 석방된다.

 

어린 소년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될 때까지 윤당의 장남 홍성은 감옥 속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옹정제가 아홉째동생 윤당에 대하여 이렇게 악독하게 한 것은 주로 두 가지 이유때문이다. 첫째, 윤당은 '구자탈적'때 '팔야당'의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윤사의 핵심심복일 뿐아니라, '팔야당'의 자금줄이었다. 둘째, 윤당의 옹정에 대한 태도는 극히 비협조적이었다. 공공연히 멸시하고 저항했다. 이 두 가지 원인으로 옹정제는 그를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