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옹정제는 왜 생모와 사이가 나빴는가?

중은우시 2014. 6. 23. 22:23

글: 김만루(金滿樓)

 

옹정은 황위를 얻은 후, 생모인 덕비(德妃) 우야씨(烏雅氏)의 첫반응은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마음 속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청세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우야씨는 옹정이 즉위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 "나의 아들이 대통을 승계하도록 명하는 것은 실로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다"였다고 한다. 이 말은 아주 불길하다. 자신의 아들이 황제에 오르는데, 모친의 첫번째 반응이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니. 우야씨의 말은 두 가지 의미를 품고 있는 것같다. 첫째는 자신은 옹정을 좋게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의문을 가졌다는 것이다. 둘째는 아마도 다른 사람이 더 적절하다고 믿었던 것같다. 아쉽게도 마지막에 대권이 옹정에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추측에 따르면, 우야씨는 아마도 자신의 작은 아들로 당시 명성이 아주 높았던 십사아거(十四阿哥) 윤제(胤)가 승계하기를 바랐던 것같다.

 

윤진(胤禛, 옹정제의 이름)의 생모인 우야씨는 순치17년(1660년)에 태어났고, 강희제보다 6살이 어렸다(강희제는 순치11년, 1654년에 태어났다). 공식문건에 따르면 그녀는 만주 정황기(正黃旗) 사람이라고만 되어 있고 부친의 이름은 위무(威武)이며 정3품인 호군참령(護軍參領)이었다고 한다. 호군참령은 만주팔기의 군직이고, 매기에 10명의 정원이 있다. 정참령은 3품이다(겉으로 보기에는 높아 보이지만 실은 아주 보통의 군직이다)

 

우야씨는 개략 14,5세때 입궁한다. 아마도 강희제의 첫번째 황후인 허셔리(赫舍里)씨가 죽고 난 이후일 것이다. 강희16년(1677년) 이월, 강희제가 처음으로 비빈을 정식 책봉할 때, 8명의 비빈(귀비 1명, 빈 7명)이 이름을 올리는데, 우야씨는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그녀는 아마도 '상재(常在)' 혹은 '귀인(貴人)'의 급별이었을 것이다. 강희17년(1678년), 우야씨는 아들을 낳는다. 그가 바로 첫번째 아들인 사아거 윤진이다. 비록 윤진이 태어난지 한달이 되자 귀비 퉁자씨(佟佳氏)가 데려가서 키우게 되지만, '모이자귀(母以子貴)'(모친은 자식이 귀해지면 따라서 귀해진다)는 원칙에 따라, 우야씨는 아들은 낳은 공로가 있어, 강희18년(1679년) 덕빈(德嬪)에 봉해지게 된다. 강희19년(1680년) 이월, 우야씨는 육아거 윤조(胤祚)를 또 낳게 된다. 우야씨는 연이어 두 아들을 낳았으므로, 강희20년(1681년) 십이월 다시 덕비(德妃)로 승진한다. 아쉽게도 육아거 윤조는 박복하여 6살에 요절하고 만다.

 

그후에도 우야씨는 계속 자녀를 낳는다. 강희21년(1682년) 육월에 황칠녀(皇七女)를 낳는데, 이 딸은 더욱 단명하여 3개월만에 요절한다. 그러나, 우야씨는 이 몇년간 강희제의 총애를 많이 받았던 것같다. 그녀의 생육능력도 아주 강했다. 다음 해(강희22년, 1683년) 구월, 우야씨는 다시 황구녀(皇九女)를 낳는다. 이 딸은 순조롭게 성장하여, 강희제의 20명의 공주들 중에서(양녀 1명이 있다. 즉, '대공주'이다.). '오공주(五公主)'로 칭해지고 나중에 퉁궈웨이(佟國維)의 손자인 슌안얜(舜安顔)에게 시집간다. 강희25년(1686년) 사월, 우야씨는 황십이녀(皇十二女)를 낳는다. 이 공주는 그녀가 낳은 세번째 딸이다. 통상적으로 "칠공주(七公主)'라고 부른다. 아쉽게도 이 막내공주는 12살까지밖에 살지 못한다. 강희27년(1688년) 정월 초아흐레, 우야씨는 그녀의 마지막 자식을 낳으니, 그가 바로 십사아거 윤제이다.

 

당시로 보면, 우야씨는 '영웅'엄마이다. 그녀는 강희제와의 사이에서 모두 3남3녀를 낳는다. 강희제의 후궁에서 삼아거 윤지(胤祉)의 모친인 영비(榮妃) 마쟈씨(馬佳氏)와 더불어 공동1위에 해당한다. 영비 마쟈씨는 강희제와의 사이에 5남1녀를 낳는다. 다만 '이공주(二公主)'와 가장 어린 삼아거 윤지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우야씨의 6명의 자녀중에서 황칠녀가 요절하고, 육아거가 6살에 요절하고 칠공주가 12사에 요절한 것을 제외하면, 사아거 윤진, 오공주 및 십사아거는 모두 순조롭게 자라서 어른이 된다.

 

윤진이 세상에 태어난 후, 우야씨는 자신이 직접 아들을 키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청나라궁중의 법도에 따르면, 빈 이상의 후궁(빈을 포함)만이 황자를 기를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윤진은 어려서부터 우야씨와 떨어져 살게 된다. 황귀비 퉁쟈씨가 병으로 죽을 때까지 그를 길러 주었다(그 때 윤진은 11살이었다). 비록 윤진은 생모 우야씨와 문안인사를 하거나 생일축하를 하는 등 고정적으로 만날 시간은 있었지만, 궁중의 삼엄한 제도하에서, 모자간에는 가까이 할 수도 없었고, 필요한 교류와 의사소통도 모자랐다. 옹정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낳아준 은혜는 길러준 은혜만큼 크지 않다." 아마도 당시의 윤진이 보기에, 양모 퉁쟈씨야말로 자애로운 모친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옹정제와 친생모친 우야씨와의 감정은 양모 퉁쟈씨만 못했다. 이것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옹정이 즉위한 후, 양모 퉁쟈씨의 가족에 하사한 봉상은 생모 우야씨의 가족들보다 훨씬 많았다. 이것은 아마도 옹정에 퉁쟈씨에게 보답하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야씨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녀는 자신의 친아들과 항상 접촉할 수 업었을 뿐아니라, 윤진의 양모는 지위가 더욱 존귀하고, 그녀의 지위는 하천하였다. 이것이 아마도 그녀가 윤진에게 감정을 가지는데 장애가 되고 벽이 생긴 것같다. 아마도, 윤진도 그는 황귀비(당시 궁중에서 최고 어른)의 부양을 받다보니 무의식중에 자랑하는 심리를 드러냈을 것이다. 이것은 우야씨로 하여금 상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다보니, 모자관계는 자연히 서로 틈이 생기고, 관계가 서먹서먹한 난감한 처지에 처하게 된다. 어렸을 때 모친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어른이 된 후의 윤진은 우야씨에 대하여 그저 예의적인 존중에 그쳤을 것이다. 이런 관계는 아마도 서먹서먹하면서도 또한 익숙할 것이다; 빈번하면서도 냉담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것은 제도에 의하여 상처를 입고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 모자관계이다. 비애이면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모자의 성격으로 보더라도, 우야씨와 윤진은 모두 비슷한 점이 있다. 동모소생인 십사아거 윤진까지 합쳐서 모두 고집이 세고 감정적이다. 강희제는 윤진이 어렸을 때, "희노부정(喜怒不定, 금방 좋아하다가 금방 화를 낸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쉽게 감정적이 되는 성격은 아마도 우야씨로부터 유전된 것일 것이다. 윤진과 윤제 두 형제는 모두 감정적인 사람들이다. 윤제는 팔아거 윤사(胤禩)를 보호하기 위하여 화가 잔뜩 난 강희제와 들이받을 수 있었고, 윤진은 비록 황위쟁탈전때는 도광양회했지만, 즉위후에는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가 쓴 여러 비시(批示)를 보면 시원시원스럽다. 보는 사람들이 무릎을 탁 칠 정도이다.

 

우야씨도 그러했다. 마찬가지로 집요하고, 마찬가지로 감정적으로 일처리했다. 원래 옹정이 황제에 올랐으면, 모친인 우야씨는 그저 기뻐하면 그만이다. 다만 이 황태후의 행위는 실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옹정이 즉위한 후, 우야씨는 자신은 '천자가 사해로 성모(황제의 생모를 성모황태후라 부름) 1명을 봉양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순사하겠다고 한다. 대행황제(강희제)를 따라 죽겠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실로 웅정제의 체면을 너무나 봐주지 않는 행동이다.

 

옹정 자신의 말에 따르면, "황부가 붕어할 때, 모후는 애통해 하며 황부를 따라 순장하겠다고 하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짐은 머리를 찧으며 통곡했고, 모후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황고(죽은 황제인 부친)는 대사를 나에게 부탁했는데, 이제 모친이 같이 따라죽겠다고 고집부리면, 아들인 나는 누구에 의지해야 합니까? 앞으로 천하신민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나도 그저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재삼 간절히 애원하여, 모후는 비로소 죽을 생각을 버렸고, 억지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후, 짐은 매일 저녁 친히 소인전으로 가서 담당 태감에게 상세히 물어보곤 했다. 모후가 밤에 편안히 잠들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안심하고 선황의 영을 지키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보면, 우야씨의 방식은 절정(絶情)일 뿐아니라, 첨란(添亂)이다. 옹정은 그녀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된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겠습니다. 천하의 백성들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한 명은 남편을 따라죽겠다고 말하고, 한 명은 모친이 죽으면 따라죽겠다고 협박한다. 결국 우야씨도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자살할 생각을 포기한다. 이러한 모자관계는 코미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강희61년(1722년) 십일월 이십일, 원래 옹정이 등극하는 날이다. 우야씨는 그러나 협조해주지 않는다. 관례에 따르면, 황제가 등극하기 전에, 먼저 황태후에게 가서 예를 올려야 한다. 예부 관리들이 옹정의 뜻에 따라, 하루 먼저 등극절차를 황태후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우야씨는 이렇게 말한다; "황제가 대위에 등극하는 것은 축하받을 일이다. 나에게 예를 행하는 것이 뭐가 중요하냐. 필요없다." 우야씨의 뜻은 마치 뱃속에 불만이 있는 것같다. 자신은 새황제 옹정과 관계없으니 예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옹정제가 신경써서 준비한 등극대전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 실로 분위기를 망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번의 교훈이 있으므로, 옹정은 모친 우야씨의 성격을 다루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옹정제는 예부, 내부무총관등 관리를 보내고, 윤제와 관계가 좋은 윤사를 보내어 모두 함께 황태후가 예를 받도록 설득하게 한다. 다만, 우야씨는 정말 고집이 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권하는데도 듣지 않았다. "읽어본 후에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옹정제는 초조해서 어쩔 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친히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재삼 간청해서 우야씨는 비로소 마음으로 내켜하지 않으면서, "여러 대신들이 선제가 대례를 행한 선례를 들어서 간절히 청하니, 나로서도 어찌할 수가 없구나."

 

'어찌할 수가 없다'라니. 우야씨의 말을 들으면, 마치 선제의 선례를 봐서 여러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같다. 단어를 참 잘 골라썼다.

 

관례에 따라, 옹정은 우야씨에게 황태후의 존호를 바친다. 당시 내각한림원도 이미 "인수(仁壽)"황태후라는 존호를 마련해 놓았다. 황태후의 표문, 책문, 그리고 금책, 금보. 이들 증명문서와 의장절차의 각종 준비가 모두 완료되었다. 흠천감에서도 황도길일을 택하여 모든 것은 준비되었다. 그저 동풍만 불면 된다. 그러나, 유독 우야씨가 동의를 하지 않았다.

 

우야씨는 이렇게 말한다. "장례가 지금 거행중이고, 애통하기 그지없어서 다른 일에 신경쓸 수가 없다. 그저 나의 아들이 선제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좋은 명성을 영원히 남기길 바랄 뿐이다. 여러 왕과 대신들도 선제의 마음을 헤아려서 각자 충성으로 일을 해서 백성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고, 사해가 평안하게 해달라. 그러면 나는 크게 영광이겠고, 존호를 받는 것보다 훨씬 낫다." 우야씨는 강희제의 장례가 아직 끝나지않았다는 핑계를 들어 황태후의 존호를 받는 것을 거절한다. 그리고 여러해동안 살아왔던 영화궁(永和宮)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황태후는 영수궁(寧壽宮)에 거처한다).

 

이렇게 되지 옹정제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된다. 원래 황제에 오른 것이 아주 떳떳한 것은 아니어서 의식에서 법도를 잘 지켜 완벽하게 하여 천하인들이 그에 대하여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게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누가 생각했으랴. 생모인 우야씨가 사사건건 충돌한다. 이것은 아들인 옹정의 마음을 답답하게 했다. 다만 어쩔 도리가 업었다.

 

방법이 없다. 옹정은 그저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친히 가서 공손하고 간절하게 재삼 간청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야씨가 죽어도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여러 왕과 대신들이 옛날의 사례를 들어 간절하게 말을 하고, 황제도 여러번 고개숙여 청하니 나도 어찌할 수가 없구나. 알았다."

 

'알았다'. 이것은 중국의 권모술수에서 아주 경전적인 말이다. 무엇이 '알았다'인가? 당연히 '이해하였다'는 것과 같이 간단한 것이 아니다. '알았다'가 가진 숨은 뜻은 너무나 많다. 아마도 가부에 대한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부동의를 표시한 것일 수도 있고, 보고하는 사람이 말하는대로 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 만일 일을 잘 처리하면 그것은 부하가 총명하고 영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만일 일을 잘못 처리하면 윗사람은 자신의 책임을 떠넘길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지도자들은 '알았다'라는 말에서 기선을 잡는 것이다.

 

우야씨의 '알았다'는 그저 완병지계(緩兵之計)일 뿐이다. 이런 말로 억지로 말을 막은 것이고, 실제로는 봉호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황태후가 거처하는 영수궁으로 옮겨가고 싶지도 않았다. 소는 억지로 물을 먹이려고 머리를 누르면 끝까지 물을 마시지 않는다. 우야씨는 바로 그런 성격이다. 그녀는 황제의 생모인데, 옹정제가 어떡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다. 이 일은 그저 미루는 수밖에.

 

얼마 지나지 않아, 옹정원년(1723) 삼월, 마침 옹정이 등극한 후 우야씨의 첫번째 생일이 되었다. 이치대로라면, 이 황태후의 생일에는 '성수절(聖壽節)'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황제가 모친에 효도하고 공경한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인효치천하(仁孝治天下)"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부관리는 옹정제가 각 왕공대신, 문무백관을 이끌고 황태후를 찾아가서 집단으로 생일축하를 하려고 기획했다. 그러나 우야씨는 또 한번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봉의지(奉懿旨), 면행례(免行禮)"(의지 즉 황태후의 명을 받들어 예를 행하지 않았다) 옹정재는 원래 이 기회에 생모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모친에게 봉호를 받아들이고 영수궁으로 옮겨서 거주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우야씨는 미리 알아차렸는지 옹정이 입을 열기도 전에 문밖에서 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우야씨의 이런 거동은 마치 인정머리가 전혀 없는 행동같다. 도대체 왜 그렇게 했을까?

 

이 일은 아마 십사아거 윤제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같다. 윤제는 우야씨가 낳은 막내아들이다. 부모는 막내아들을 예뻐한다. 심지어 막내아들을 편애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다. 천하의 부모는 항상 자신이 자녀들에게 공정하다고 생각하고 하는 모든 일은 불편부당하며 매우 이치에 맞는다고 느낀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에 편애하는 마음이 없는 부모는 없다는 것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그릇에 담은 물처럼 고르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야씨는 원래 행복했어야 한다. 그녀의 두 아들은 모두 능력이 있었다. 그중에 반드시 한 명은 황제가 될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바로 그녀가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황제가 되지 못했다는데 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이 실패한 아들을 편애했다는 것이다. 윤제가 서북에서 돌아온 후 옹정제는 처음에는 윤제에게 위세를 부린다. 먼저 그의 왕의 작위를 박탈하고, 그저 최초의 패자(貝子) 신분만 남겨준다. 이것은 모친으로서 두 아들을 볼 때, 하나는 천상에 하나는 지하에 있고, 하나는 양보하지 않고 하나는 승복하지 않고 있다. 형이라는 자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동생을 괴롭히고 있다.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이 세 사람은 바로 성격이 강하다. 죽어도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누구도 타협하려 하지 않는다. 그 결과 모순은 갈수록 깊어지고, 거의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가 된다. 옹정이 윤제를 타격하면 할수록, 우야씨는 옹정의 일에 더욱 협조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거의 냉전상태에 접어든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의심할 지도 모르겠다. 우야씨는 원래 막내아들을 사랑했고, 강희제의 말년에 막내아들의 명성이 아주 높았다. 그러나 최종결과는 막내아들의 황위를 큰아들이 빼앗아가고 만다. 우야씨가 얼마나 실망했을지는 상상이 간다. 그렇다. 원래 명분이 있고, 당당하게 황태후가 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황위를 찬탈한 난신적자'가 봉해주는 '가짜 황태후'가 되어야 하니,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옹정원년(1723년) 삼월 이십칠일, 옹정은 즉위후 처음으로 북경성을 나선다. 이것은 황제가 된 후에 북경성을 나선 몇 안되는 경우중의 하나이다. 그는 이번에 왕공대신을 데리고, 황태후 및 후궁의 비빈들과 함께 친히 강희제의 관을 준화 청동릉으로 모셨다. 이번 장례활동에 동원된 사람은 아주 많다. 규모도 컸다. 다행히 그다지 큰 혼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원래 장례식은 아주 잘 진행되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장례가 끝난 후, 장례인원이 북경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옹정제는 중대하지만 무정한 결정을 하나 내린다. 그것은 바로 윤제로 하여금 준화에 남아 능을 지키게 한 것이다. 이것은 윤제를 이 곳에 연금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뿐 아니라, 옹정제는 윤제의 저택에서 일하는 자인 샹야투와 호위 쑨타이, 쑤보, 창밍등에게 손을 대어, 그들의 목에 칼을 씌워 사람들이 보게 한다. 그후 윤제가 준화에 연금될 때, 옹정은 다시 누군가 주절에 대장군과 황상을 나란히 썼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패자 윤제의 녹미(祿米)도 박탈한다. 이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려 한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 윤제는 무슨 잘못이 없다. 옹정이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 윤제를 손보았을 뿐이다.

 

옹정이 이렇게 동생을 못살게 굴자, 모친인 우야씨는 그냥 참아넘기지 않았다. 윤제의 녹미가 박탈된 십일째 되는 날, 우야씨는 돌연 병이 든다. <청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우야씨는 옹정원년(1723년) 오월 이십삼일 미각(오후 1시에서 3시)에 병이 난다. 다음 날 축각(새벽 1시에서 3시)에 사망한다. 우야씨는 발병에서 사망까지, 중간에 아주 짧은 십여시간뿐이었다. 이는 급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저 추측해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대의각미록>에는 이런 민간의 소문을 기록하고 있다: 어느 바람이 많이 불고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황태후 우야씨가 거주하는 영화궁안에서 돌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원래, 옹정은 황태후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 급히 문병하러 왔는데, 두 마디도 하기 전에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게 된다. 바깥의 궁녀와 태감들은 전전긍긍하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황태후가 안에서 욕하는 소리는 들렸다: "너는 왜 네 동생에게 인정머리없이 구는가? 그가 도대체 무슨 큰 대죄를 지었길래 네가 그를 이렇게 해치는가. 너는 도대체 어떡하려고 하는가? 우리 모자를 모조리 죽여야 네가 기쁘겠는가?" 옹정은 땅바닥에 꿇어 앉아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신(兒臣)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아신은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황태후가 말한다: "그럼 좋다. 나는 지금 윤제를 봐야 겠다. 너는 그럴 풀어줘라." 옹정이 말한다: "선재의 능묘는 누군가 지켜야 합니다. 윤제는 오만하고 자부심이 강하여 자주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에게는 그곳에서 문을 걸어닫고 잘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황태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웃으며 말한다: "좋다, 좋다. 너는 그를 그곳에 가두어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너는 자신이 황제 자리에 올랐으니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천하인들은 똑똑히 보고 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저울이 있다. 때가 되면 너는 후인들이 너의 척추뼈를 자를 것이 겁나지 않느냐?" 옹정제도 아마 격노한 것같다. 안에서 찾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후, 궁중에는 돌연 '펑'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기둥에 부닥치는 소리같았다. 그후에는 정적이었다. 옹정제가 걸어서 나온다. 얼굴색은 음침했고 이렇게 말한다: "황태후의 병이 위중하다. 빨리 어의를 부르지 않고 무엇하느냐?" 다만 때는 이미 늦었다. 다음날 궁중에는 황태후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린다. 당연히 영화궁의 기둥에는 피가 묻어있지 않았다.

 

도대체 황태후는 기둥에 머리를 박고 죽은 것일까? 이 점은 이미 고증할 수가 없다. 다만 우야씨의 몸을 보자면, 하루도 안되어 사망하다니 그것은 예상밖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우야씨는 원래 기관지염과 천식같은 류의 질병이 있었다. 여기에 강희제의 붕어는 그녀에게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다만, 이것이 가장 주요한 원인은 아닐 것이다. 우야씨의 신체상황이 악화된 것은, 아마도 윤진과 윤제 두 형제간의 알력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옹정제가 막내아들에 대하여 불공정한 대우를 한 것이 우야씨라는 모친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 것이다.

 

비록 민간 전설의 "핍모(逼母)"가 반드시 성립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야씨의 죽음에 옹정제가 전혀 관련없다고 할 수는 없다. 사료가 부족하여, 우야씨가 윤제가 구금된 후에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관심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어보고 확인하려 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날 밤에 우야씨는 폭발했을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심하게 옹정을 질책했을 것이고, 아마도 눈물을 흘리며 윤제를 풀어주어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식기록에 따르면, 옹정제는 황태후의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들은 후, 급히 영화궁으로 간다. 그리고 주야로 탕약을 올린다. 바로 그날, 옹정제는 시위 오희(吳喜)와 주란태(朱蘭太)를 준화 경릉으로 파견하여 윤제를 불러들인다. 다만, 의외의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윤제를 감시하는 책임을 지고 있던 부장 이여백(李如柏)이 윤제를 풀어준 후, 마음 속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두려워한 것은 누군가 조서를 위조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사람을 보내어, "성지의 뜻이 불분명하고 도장이 없다는 이유로 윤제를 다시 데려온다. 그리고 옹정이 보낸 시위를 구금한다. 그 후에 자신이 친히 옹정에게 지시를 구한다. 물은 내용은 윤제를 풀어주어 북경으로 보내도 될 것인지? 그것이 옹정제의 뜻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 비로소 이여백은 윤제를 풀어주어 북경으로 보낸다. 다만 이때는 이미 이십삼일 낮이었다. 우야씨는 일찌감치 그날 새벽에 사망했다. 향년 64세였다.

 

늦었다. 모든 것이 늦어버렸다. 윤제가 황궁으로 돌아와서, 본 것은 자신의 모친의 차갑게 식은 시신이었다. 그러나, 이여백은 여기서 이득을 얻는다. 나중에 그는 백은 천냥을 하사받고, 총병관으로 승진한다.

 

우야씨가 죽은 후, 옹정제는 다시 황태후에게 존호를 받으라고 간청할 필요가 없었고, 황태후에세 영화궁에서 영수궁으로 옮겨가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기괴한 점은 옹정은 우야씨의 사후에, 먼저 그녀의 관을 영수궁으로 옮기고, 3일간 모신 후에야 다시 제후가 영구를 모셔두는 수황전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 안에 숨은 의미는 실로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설마 옹정제는 이러헥 하는 것이 모친의 뜻에 어긋난다는 것을 몰랐단 말인가?

 

윤제는 옹정의 주시하에, 모친의 영구앞에서 통곡하고 실신한다. 곡을 마친 후, 두 동모형제는 여전히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고, 누구도 상대방을 보지 않았다.  이런 삭막한 분위기 속에서 옹정제는 황태후의 관앞으로 걸어나가, 소매에서 유지(諭旨)를 꺼내서 천천히 읽기 시작한다: "패자 윤제는 무지하고 광망하며 오만하고 자부심이 강하니, 짐은 오로지 모친인 황태후의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윤제를 군왕으로 승격시킨다. 그대가 이후 이전의 잘못을 회개하면 짐은 은혜를 베풀 것이다; 만일 계속하여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으면, 국법이 있고, 짐은 부득이 그 죄를 물을 수밖에 없다."

 

그 해 구월 초하루, 우야씨의 관은 강희제의 관과 함께 경릉 지궁에 묻힌다. 윤제는 다시 준화로 돌아가서 경릉을 지킨다. 반년만에, 옹정과 윤제는 자신의 부친과 모친을 모두 잃는다. 다만 잃어버린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와 동시에, 옹정제는 자신의 동모동생을 잃었다. 윤제도 더 이상 옹정이라는 동모형이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물과 불처럼 서로 적이자 상대방이 된다. 우야씨가 살아있을 때도 풀지 못한 은원을 그녀가 죽고나서 어찌 풀 수 있겠는가?

 

궁중에서 서로 싸우고, 골육상쟁을 벌이는 것은 제왕지가에서 드문 일도 아니다. 옹정은 <대의각미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짐이 일찌기 황태후에게 윤제를 접견할 것을 주청드렸다. 황태후는 유지를 내려 말하기를: 나는 황제가 나의 친아들이라는 것만 알고, 윤정(允禎, 즉 윤제)은 그저 여러 아거와 마찬가지이 ㄹ뿐이다. 나와 특별히 친하지 않다. 그렇게 윤허하지 않았다. 짐은 다시 윤정이 다른 형제들과 같이 접견하면 되겠는지 주청했다. 태후는 그제서야 윤허했다. 여러 형제들이 윤정과 같이 황태후를 만났는데, 황태후는 윤정에게 따로 말 한마디도 더 해주지 않았다."

 

이 말은 너무 의심스럽다. 이것은 우야씨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 옹정제와 윤제는 모두 우야씨의 친아들이다. 어찌 윤제가 단독으로 만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다른 아들들과 함께 만나도록 한단 말인가? 그리고 만나고서도 따로 윤제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니 너무나 조작된 티가 난다. 우야씨는 마음 속으로 옹정제를 뼛속까지 미워해서 그를 제거하여야 시원하겠다고 하여 황자들을 만나는 문제에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고, 옹정제의 시기를 방지하여 자신의 막내아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몰라도.

 

권장쟁녕혈유재(權杖猙獰血猶在), 무정최시제왕가(無情最是帝王家). 만일 그렇다면 이는 더욱 큰 비애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