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뢰일(李磊一)
최근 시간이 남아서 다시 한번 <옹정왕조>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강희제(康熙帝) 말년에 발생한 소위 '구자탈적'의 일을 모두 알고 있다. 즉, 황위를 서로차지하기 위하여 황자들간의 다툼이 발생한 것이다. 황장자(皇長子) 윤제(胤禔), 폐태자(廢太子) 윤잉(胤礽), 황삼자(皇三子) 윤지(胤祉), 황사자 윤진(나중의 옹정제), 황팔자(皇八子) 윤사(胤禩), 황구자(皇九子) 윤당(胤禟), 황십자(皇十子) 윤아(胤䄉), 황십삼자(皇十三子) 윤상(胤祥), 황십사자 윤제이다. 이들중에서 한쌍의 형제가 아주 특수하다. 그것은 바로 황사자 윤진과 황십사자 윤제로 동모친형제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적대진영에 속했다. 이치대로라면 고인들이 항상 말하는 것처럼, "상진친형제(上陣親兄弟), 타장부자병(打仗父子兵)"이다 친형제간의 감정은 당연히 더 가까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황십사자 윤제는 친형인 황사자 윤진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진영인 황팔자 윤사를 지지했을까? 그 원인은 필자가 보기에 아래의 몇 가지 로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황위쟁탈전에서, 친형제간의 유대는 믿을 것이 못된다.
기실, 고대 황위쟁탈전에 뛰어든 황자들간에 형제간에 서로 죽이고, 부자간에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양용(楊勇)과 양광(楊廣)형제간의 다툼이 그러했다. 두 사람은 모두 동부동모의 친형제이다. 그러나 권력앞에서 형제간의 정은 믿을 것이 못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그저 음모궤계를 꾸며서 상대를 쓰러뜨렸을 뿐이다. 이건성(李建成), 이세민(李世民)과 이원길(李元吉)의 형제떄는 친형제간에 서로 피를 뿌리면서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이세민은 친형 이건성을 활로 쏘아 죽인다. 나중에 이승건(李承乾)과 이태(李泰)도 친형제이지만 역시 황위를 놓고 다투지 않았던가?
그래서, 윤진과 윤제의 사이에서도 유사한 상황이다. 두 사람의 목표는 모두 지고무상의 황권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진영에 설 수가 없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윤진과 윤제 두 형제가 처음에는 황위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저 이 구자탈적의 중요참여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구자탈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위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황장자 윤제와 폐태자 윤잉간의 다툼이 있었는데, 이때는 황사자 윤진과 황십사자 윤제가 모두 폐태자 윤잉의 중요지지자였다. 뒤에 강희51년 윤잉이 재차 폐위되고, 그제서야 비로소 윤진은 스스로 황권을 노리는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윤잉이 폐위되었으므로 "팔야당(八爺黨, 황팔자 윤사를 지지하는 일파)"의 명성이 최고조에 달한다. <옹정왕조>에 나타난 "의거신태자(議擧新太子)"의 장면이 바로 가장 좋은 증거이다. 그러나, 윤사가 강희제에게 질책을 받고 황팔자는 후계자의 리스트에서 빠지게 되자, "팔야당"이 새로 내놓은 대표선수가 바로 황십사자 윤제였던 것이다. 즉, 이때부터 형제 둘의 최고목표는 같았다. 어찌 상대방을 지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초기에 황사자 윤진은 황위를 노린다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니, 황십사자 윤제가 황사자 윤진을 지지할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이때 윤진을 지지한다는 것은 폐태자 윤잉을 지지한다는 것이나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황십사자 윤제는 이때 이미 황위를 노릴 마음이 있었거나 혹은 더욱 큰 정치적 이익을 고려할때, 친형인 황사자 윤진을 지지하고, 나아가 폐태자 윤잉을 지지하는 것은 황팔자 윤사를 지지하는 것만큼 이익이 크지 않다고 보았을 것이다.
만일, 황팔자 윤사가 순조롭게 황위에 올랐다면, 황십사자 윤제야말로 최대의 수혜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건 황사자 윤진이 황제에 오른 후, 황십삼자 윤상이 최대의 수혜자가 된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윤상은 강희제때 패륵(貝勒)에도 봉해지지 못했었는데, 옹정이 황위를 승계하자마자 그에게 친왕(親王)의 작위를 내리고, 그 뒤에는 '철모자왕'이 된다. 게다가 윤제는 스스로 황위를 노리게 되면 팔야당이 그를 뒤에서 밀어줄 수 있었다. 윤잉이 두번째로 태자위에서 폐위되고난 후, 황팔자 윤사도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었을 때, 황십사자는 팔야당이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후보가 된다. 그후에는 '대장군왕'이 되어 조야에서 공인된 가장 유력한 황위계승후보자가 되었다. 기실 이것을 보면 황십사자 윤제의 선택은 아주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생모인 우야씨(烏雅氏)의 아들들에 태도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황사자 윤진과 황십사자 윤제의 생모는 강희제의 덕비(德妃) 우야씨(烏雅氏)이다. 그러나 윤진을 낳을 때, 우야씨는 하급후궁이었다. 청나라궁중의 법도에 따르면, 빈비(嬪妃)이상이 되어야 직접 자신의 아이를 키울 수 있다. <청사고(淸史稿)>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효공인황후 우야씨, 호군참령 위무(威武)의 딸이다. 나중에 성조(聖祖, 강희제)를 모신다. 강희17년 십월 정유, 세종(世宗, 옹정제)이 태어난다. 18년, 덕빈(德嬪)이 되고, 20년, 덕비(德妃)가 된다."
즉, 옹정제를 낳고나서 비로소 덕빈으로 승진한 것이다. 그래서 직접 자신이 낳은 아들을 양육할 권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여 윤진은 황귀비(皇貴妃) 퉁자씨(佟佳氏)가 양육하게 된다. 이렇게 윤진은 11살이 될 때까지 양모 퉁자씨가 죽을 때까지, 양모 퉁자씨와 함께 산다. 퉁자씨가 죽은 후, 강희제는 잠깐 윤진을 직접 부양하다가, 마지막에 생모 덕비 우야씨에게 보낸다. 중요한 점은 퉁자씨가 윤진을 아주 잘 보살펴주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그러다보니 감정이 깊었다. 이점은 나중에 옹정제가 퉁자씨의 동생인 룽커도(隆科多)를 '외숙(舅舅)'이라고 불렀다는데서도 알아볼 수 있다. 윤진은 십여년간 생모인 우야씨의 양육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모자간에는 심후한 감정이 없었다.
그리고, 덕비 우야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 자신에게 친근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아주 크게 원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녀의 둘째아들은 겨우 5살때 요절해버린다. 큰아들인 윤진은 자신과 친근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윤진을 좋아하지 않게 된다. 윤진이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을때는 이미 황십사자 윤제가 태어나 있었다. 이때는 강희27년이다. 이때는 이미 덕비였고, 윤제는 그녀가 직접 기를 권한이 있었다. 자연히 그녀는 모든 모정을 이 어린아들에게 쏟았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덕비의 두 아들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가 분명 윤제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게다가 두 사람은 나이차이도 있다. 덕비는 윤제를 좋아하고, 윤진을 싫어했다. 자연히 윤진은 우야씨에게서 그다지 모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모친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자라는 동생 윤제를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형제간의 감정은 우야씨로 인하여 가까워질 수 없었다. 기실 현실생활에서 어느 자식이 어려서 남의 집으로 보내어졌다가 다시 나이가 어느 정도 든 후에 되돌아온다면 부모와 형제간의 감정이 그다지 친근해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옹정이 13살때 모친이 죽은 황십삼자 윤상에게는 동병상련의 느낌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윤진은 윤상을 직접 가르치게 된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남다르게 되고, 싶은 정감이 쌓이게 된다.
윤진과 윤제간에는 그런 관계가 없었다. 형제간에 친근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윤제는 윤진을 지지하지 않았고, 나중에 윤진이 황제에 등극한 후에도, 덕비 우야씨는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 그녀를 황태후로 책봉하는 것을 거절하기도 했다. 이는 확실히 옹정제의 체면을 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일부 영화드라마작품에서는 덕비 우야씨가 윤진이 윤제의 황위를 찬탈했다고 여긴다고 그렸다. 모친의 아들에 대한 이런 태도는 윤제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성격이 다르고, 가치관도 달랐다.
영화드라마에서, 우리는 두 사람의 성격차이를 확실히 엿볼 수 있다. 옹정제는 '냉면왕(冷面王)'으로 불릴 정도이다. 이는 그가 일처리를 하는데 원칙을 따지고, 신축성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성격상의 특징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성격이 음침하다. 이런 성격의 인물은 친구를 사귀기 힘들다. 우리가 생활에서 성격이 내향적인 사람은 친구가 많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반대로 성격이 쾌활하고 외향적인 사람은 친구가 많다. 옹정은 바로 내향적인 사람이다. 심지어 재미없는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황자들간에도 이런 관계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성격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게 되는 것이니까. 황팔자, 황구자와 황십자는 관계가 밀접했다. 그건 성격과 큰 관계가 있다. 황십사자 윤제도 성격이 직선적이고 시원스럽다. 이는 그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는데서 알아볼 수 있다. <옹정왕조>를 보면, '의거신태자'때 강희제가 황팔자 윤사를 질책하자, 윤제가 바로 일어나 변호한다. 그리고 뒤에는 황십삼자 윤상과 싸우기도 한다. 그의 성격은 이것만으로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윤진과 윤제는 성격이 전혀 달랐고, 가치관도 달랐다. 그래서 성격이 서로 다르다보니 형제 둘은 같이 대사를 도모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넷째, 윤제도 자신의 계산과 고려가 있었다.
황실에서 태어나면 황자들은 모두 내심 깊은 곳에 황권을 쟁탈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다만 여러가지 이유로 일부 황자들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경쟁에서 퇴출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그들의 꿈과도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황자는 모친이 비천하여,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조의 아들 조창(曹彰)은 병력을 이끌고 싸우는 것을 좋아했다. 이융기(李隆基)의 큰형 이헌(李憲)은 스스로 후계자의 자리를 포기한다. 다만 더 많은 경우에는 스스로 황위쟁탈전에 참여한다.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자신에게 더욱 큰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황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세민의 세력이 커지자, 이원길은 자신도 황위에 욕심이 있었지만, 자신의 실력으로는 이건성과 이세민에 대항할 수 없다고 보고, 이건성의 편에 서기로 결정했다.
기실, "구자탈적"에 많은 황자들은 모두 중요한 참여자이다. 예를 들어, 황삼자 윤지, 황구자 윤당, 황십자 윤아와 황십삼자 윤상등등. 그들은 황위를 노릴 실력과 마음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도 이 황위쟁탈전에 가담한다. 황십사자 윤제도 그런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초기에 팔야당에 가담한 것은 성격이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황팔자 윤사는 '현왕(賢王)'으로 불렸고, 이런 사람은 인간관계를 잘 처리한다. 자신의 진영에 들어온 형제들과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인자하다. 그게 진심이건 아니면 위장이건, 이런 사람은 많은 사람을 끌어모으고, 좋은 명성을 유지한다. 윤제가 팔야당에 가담한 것은 황팔자 윤사의 사람됨을 인정한 것이다. 윤잉이 두번째로 태자에서 폐위된 후, 윤사도 후계자가 될 가능성을 잃어버린 후, "팔야당"은 황십사자 윤제를 내세운다. 이것이 윤제의 생각이었다. 태자당과 팔야당이 경쟁할 때, 팔야당에 가담하는 것이 그의 목적을 실현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태자당에는 태자가 폐위되더라도 윤진이 앞에 있고, 심지어 한때 강희제가 좋게 보았던 황십삼자 윤상도 있다. 윤제에게 순서가 돌아올 가능성은 적었다. 그러나 팔야당에는 윤제의 적수가 황팔자 윤사 한명뿐이다. 나머지 황구자와 황십자는 그저 도와주는 역할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팔야당이 윤제를 지지하게 되면 관료집단의 지지까지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과연 그후에 윤제는 '무원대장군왕(撫遠大將軍王)'에 봉해지고, 조야상하에서는 일치하여 그가 후계자에 오를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황십사자 윤제는 동모형제인 황사자 윤진을 지지하지 않고, 황팔자 윤사를 지지했던 것이다. 생모 우야씨가 윤진을 좋아하지 않았던 영향외에, 두 사람은 성격이 달랐고, 가장 중요한 것은 황권의 쟁탈전에서 친형제의 정이라는 것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윤진은 근본적으로 황위쟁탈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드러내지 않았고, 윤제도 황위쟁탈에 참여할 뜻이 없었다. 나중에 윤진과 윤제 형제가 황위쟁탈전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도 황권을 노리게 되니, 자연히 옹정을 지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팔자 윤사를 지지하는 것이 그가 가장 손쉽게 막후에서 황권쟁탈전에 가담할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고, 가장 유리한 경쟁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윤제의 선택은 정확했다. 어쨌든 나중에 옹정제가 즉위하지만, 그의 모친인 우야씨는 여전히 황위는 마땅히 황십사자 윤제에게 갔었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니까. 당시 대부분의 독서인들 혹은 관료들고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이는 나중에 옹정제의 즉위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는 원인중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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