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옹정제)

옹정제는 왜 연갱요(年羹堯), 융과다(隆科多)를 제거했는가?

중은우시 2015. 1. 2. 02:38

글: 일득재주(一得齋主)

 

연갱오, 융과다는 원래 옹정이 윤사집단을 상대하는 두 개의 칼날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옹정제 즉위후 윤사집단보다 먼저 제거되어 버린다. 도대에 무슨 원인에서였을까? 일부 청사연구자들은 연갱요, 융과다가 "교종불법(驕縱不法, 교만하고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다)"하였다는 것을 유일한 답안으로 내놓는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확하다. 그리고 연갱요, 융과다가 제거당한 진상을 말해주지도 않는다.

 

옹정제는 윤사, 윤당, 윤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약간의 정치적인 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그런 조치가 효과를 낼지 말지는 옹정제가 정치적으로 실적을 내느냐마느냐에 달렸다. 연갱요가 청해반란을 평정한 것은 조야에 옹정제가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데 충분했다. 그리고 청해문제는 강희제도 잘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이다. 옹정제가 즉위하자 몇 달도 되지 않아 기이하게 깨끗이 해결한 것이다. 이는 원래 그를 반대하는 적대파들에게 할 말이 없게 만든 것이다. 융과다는 옹정제를 옹립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연갱요는 옹립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옹정의 즉위라는 면에서는 연갱요가 융과다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옹정2년이 되어, 연갱요가 서북에서 큰 공을 세우자, 예전의 윤제보다 훨씬 명성을 얻는다. 기세는 점점 융과다를 추월하여 옹정시기의 제1호 총신이 된다. 연갱요의 최전성기는 무원대장군의 직을 받았을 뿐아니라, 일등공에까지 봉해진다. 연갱요의 부친 연하령(年遐齡)까지도 1등공에 봉해지고 태부(太傅)의 관직까지 받는다. 연갱요의 아들 연빈(年斌)은 1등자(一等子, 자작)에 봉해지니 온 집안이 고관대작이 된다.

 

연갱요는 천섬총독(川陝總督)이지만, 관여하는 곳이 많았다. 운남(雲南)의 일도 그가 관장할 수 있었다. 산서순무(山西巡撫)는 연갱요의 지시에 따르지 않다가 옹정제에 의하여 순무 관직을 박탈당한다.

 

조정의 중대한 인사변동때도 옹정제는 연갱요의 의견을 들었다. 연갱요가 추천한 사람은, 이부, 병부에서도 특히 중시했고, 중요한 일로 취급해주었다. 그래서 한때는 "연선(年選)'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옹정제는 연갱요에게 친밀하게 말한다: "네가 이번에 한 일은 내가 어떻게 너를 예뻐해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비로소 천지신명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 뿐이 아니다. 옹정제는 연갱요에게 이런 말까지 한다. "짐이 만일 뛰어난 황제가 되지 못한다면 가장 먼저 미안할 사람은 바로 너이다." 이는 거의 아부 수준의 말이다.

 

옹정제는 연갱요에게 리치를 내리는데 신선함을 유지하게 하기 위하여, 역참의 사람들이 미친듯이 달리게 하여, 경사에서 서안까지 겨우 6일이 걸린다. 당시 '일기홍진비자소(一騎紅塵妃子笑)'의 양귀비와 비교하더라도 별로 못하지 않다.

 

연갱요는 비록 '번저구인(藩邸舊人)'이기는 하지만, 눈앞의 이 새 황제를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는 황제가 그에게 이렇게 잘 대해주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을지라도 무슨 사고가 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예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 북경으로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러 갈 때, 왕공대신들이 말에서 내려 그에게 문안인사를 할 때도 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어떤 신료는 무릎을 꿇고 맞이했지만 그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연갱요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 융과다도 풍생수기(風生水起)하며 한때 잘 나갔다. 융과다는 옹정제의 즉위때 옹립한 공로가 있어 태보(太保), 이부상서, 이번원상서, <성조인황제실록>총재관, <대청회전>총재관, <명사>감수총재의 관직을 받는다. 옹정제가 그를 언급할 때면 항상 그를 "구구(舅舅, 외숙이라는 뜻임)'라 불렀다. 그러니 얼마나 친한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연갱요는 총애를 얻으면서 융과다를 무시한다. 옹정제는 당연히 연갱요에게 융과다가 그를 황제에 옹립하는데 공을 세운 얘기를 할 수 없었고, 그저 두리뭉실하게 말할 뿐이었다: "구구 융과다는 성조황제의 충신이고, 짐의 공신이며, 국가의 양신이다. 진정 당대제일의 초군발류(超群拔類)한 보기드문 대신이다."

 

융과다는 혼자서 이렇게 많은 "신'을 겸하고 있었으니, 위맹한 정도는 확실히 연갱요보다 위였다. 옹정제는 두 사람 사이가 나빠질까봐 우려해서 연갱요의 장남 연희(年熙)를 융과다에게 양자로 보내게 하였다.

 

융과다에게는 이미 두 아들이 있었다. 이 양자로 들어온 연희를 받아들이고 나서 옹정제에게 말한다: "신의 사주팔자에는 아들 셋이 있습니다. 오늘 황상의 은혜로 큰 상을 하사받으니, 마치 하늘이 내리시는 것같습니다."  이는 바로 그가 연갱요와 끝까지 단결하겠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옹정제, 연갱요, 융과다는 '삼위일체'의 '천고군신지우(知遇)'의 모범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옹정제 자신이 말한 것처럼 되지도 않았고, 연갱요, 융과다가 기대한 것처럼 되지도 않았다. 1년여도 지나지 않아서, 새황제는 안면을 바꾼 것이다.

 

"토사구팽"의 역사현상은 비록 많이 발생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남송명장 악비는 송고종 조구가 직접 발탁한 대장이다. 그를 해친 것은 주로 두 가지 원인 때문이다. 첫째, 조구의 평화협상이라는 대계에 방해가 되었다. 둘째, 조구의 금기를 건드렸다. 첫째는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바로 악비가 조조에게 조백종을 황태자로 삼으라고 말한 것이다. 조구는 일찌기 금군의 추격을 받아 놀랐기 때문에 발기부전을 앓았다. 그는 종실의 두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였는데, 하나가 조백종이고 하나가 조백구이다. 아직까지는 누구를 황태자로 삼을지 최종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악비가 오로지 충성스러운 마음에서 조백종을 태자로 삼으라고 직언했는데, 이 일은 당시에도 벌써 악비에게 그런 직언을 하지 말라고 한 사람이 있었다. 악비는 대장이므로 후계자에 관한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악비는 그러나 그 말을 듣지 않고 직언을 한 것이다. 역시 그 조언을 해준 사람의 말대로 악비가 그 말을 꺼내자 조구는 아주 불쾌해 한다. "너는 대장이고 수중에 많은 병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일에 네가 개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송나라때는 무장이 국가정책에 관여하는 것을 막았다. 역대군주는 모두 무장이 정무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큰 금기로 여겼다. 악비는 비록 충성심에서 한 것이지만 이로 인하여 살신지화를 부르게 된다.

 

악비의 사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옹정이 급히 연갱요, 융과다를 정리한 것은 바로 연갱요, 융과다가 옹정제의 최대 금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옹정제의 최대 금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황위계승을 둘러싼 것이다.

 

옹정제는 '득위부정(得位不正, 황제위를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얻었다)'이다. 윤사, 윤당, 윤제가 비록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 생각하지 않고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루빨리 윤사, 윤당, 윤제와 같은 정적이자 내막을 아는 자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것은 옹정제의 기정방침이다. 그러나 연갱요, 융과다는 이 대사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고, 이는 옹정제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그래서 옹정제는 살기를 품게 된다.

 

우리는 먼저 옹정제의 최후를 보기로 하자. 연갱요는 옹정제의 눈에 '전과'가 있는 인물이다. 일찌기 황자일 때, 옹정제는 연갱요가 황삼자 윤지의 문인인 맹광조에게 우호적인 제스추어를 취하여 옹정제가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 연갱요를 "악소(惡少)"라고 욕하고, 연갱요에게 황제(강희제)에게 고발하겠다고까지 협박한다. 그리하여 연갱요는 그저 그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연갱요는 비록 옹정의 '번저구인'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조정의 봉강대리이고, 옹정은 황자로서 직접 연갱요를 지휘할 권한은 없었다.

 

옹정제가 가장 신경을 썼던 일은 황구자 윤당이 일찌기 외국인 목경원(穆景遠)을 보내어 연갱요를 회유한 일이다. 목경원은 연갱요에게 말한다: "구아거(아홉째 황자, 즉 윤당을 가리킴)는 복이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장래 아마도 황태자로 세워질 것입니다." 연갱요는 그러나 그 말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장면은 옹정제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지게 된다. 그후 윤당은 서북에 연금되어 연갱요에게 관리를 맡긴다. 연갱요는 상소를 올려 윤당이 "잘못을 알고 행동을 조심한다"고 보고한다. 이것은 분명 윤당을 좋게 말해주는 것이다. 옹정제는 그의 말이 틀렸다고 보고 반박하여 말한다. "윤당은 간사하고 마음 속에 나쁜 뜻을 품은 자이다. 계속 방비해야 한다" 이를 보면 윤사, 윤당을 처리하는 문제에 있어서 연갱요는 옹정제와 의견차이가 있었다.

 

연갱요가 옹정제의 즉위를 지지했다는 점에는 그다지 큰 의문이 없다. 주종관계가 그다지 밀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관계가 없다. 윤제가 서북에서 돌아온 후, 연갱요는 혼자서 위기를 해결하라는 명을 받았고, 짧은 몇 달만에 나포장단진의 반란을 진압하여 옹정제의 체면을 살려준다. 다만, 연갱요가 성심성의껏 옹정제를 옹호하는 것과 그가 극단적인 수단을 써서 윤사, 윤당, 윤제를 처리하는 것을 굳건히 집행하는 것은 별개이다. 연갱요는 윤당을 가까이에서 감시하므로, 윤당과 적지않게 얘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전의 인연도 있었다. 윤당이 어떤 사람인지, 연갱요는 너무나 잘 알았다. 연갱요가 보기에, 윤당은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다지 힘들여 방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윤당이 옹정제에 승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사고를 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윤당이 서북에서 심복인 목경원과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쪽지를 보내왔는데, 위에는 산서,섬서의 백성이 내가 좋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힘들게 산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 쪽지를 보고 그 사람에게 돌려보내면서 그 자에게 말했다. 우리 형제는 천하를 다툴 생각이 없다. 이후에 이런 말을 다시 한다면 나는 사람을 시켜 체포할 것이다." <문헌총편> 제1집 <윤사윤당안.묵경원구공>

 

어떤 사람은 나서서 윤당으로 하여금 옹정제에 강하게 맞서라고 권했으나, 윤당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는 그가 비록 형인 옹정에 승복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형제간의 집안일이고, 천하를 다투는 지경으로까지 갈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이는 윤당이라는 사람이 비록 재능은 평범하지만, 머리가 멍청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극단적인 수단으로 보복할 준비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갱요는 이런 상황에 대하여, 그리고 서북의 일부 사람의 윤당에 대한 인상에 대하여 그가 몰랐을리 없다. 그리고 그는 옹정제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알았다. 연갱요의 윤당에 대한 관찰에 따르면, 그는 윤당과 같은 인물은 원망은 하더라도 잘 관리하기만 하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를 죽여버릴 필요까지는 없다고 보았다. 연갱요의 이런 생각은 그로 하여금 윤사, 윤당문제에 있어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이는 옹정제에게 하나의 착각을 준다. 연갱요가 이전처럼 그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한다면, 옹정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갱요, 융과다같은 중량급의 인물이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골치아픈 일이다.

 

<옹정조기거주>에는 옹정2년 사월초칠일자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옹정제가 대신들에게 원망하며 말한다: "너희 대신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공개적으로 혹은 비빌리에 상소를 올려 윤사가 짐보다 현명하고 사람됨이 무겁고 국가사직에 도움이 되니, 짐이 자리를 양보하라고 했다." 이처럼 체통을 잃은 말을 즉위한지 이미 2년이 된 황제의 입에서 나오다니 이는 충분히 설명해준다 당시 이 황제의 처지가 얼마나 힘들고 상대방의 위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옹정이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감이 없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줄을 잘못서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연갱요에게도 마찬가지로 경고하는 것이다. 옹정2년 십일월 십삼일, 즉 연갱요를 제거하는 조치가 시작되기 이틀전에, 옹정제는 이렇게 말한다. "조정의 여러 신하들은 염친왕(윤사)이 우직하고, 오히려 짐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가 억울하다고 여긴다. 짐이 여러번 유지를 내리면서 그대들의 신색을 살펴보니 염친왕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같다." 옹정제가 여기서 말한 '조정의 여러 신하'에는 연갱요가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같은 날, 옹정제는 다시 이유균(李維鈞)의 상소에 비시(批示)하면서 이렇게 썼다: "근일 연갱요가 몇 가지 일을 주청올렷는데, 짐은 그가 불순한 생각을 품고 있다고 의심된다. 머리를 굴려서 권력을 농단하려는 뜻이 있는 것같다." 그리고 이유균에게 점차 연갱요를 멀리하라고 한다. 이전에 누군가 규서, 아령아와 같은 황팔자 윤사의 심복을 질책하려는 생각이 아마도 연갱요에게서 나왔을 것이라고 말하자 옹정제는 바로 부인한다. 이는 측면으로 옹정, 연갱요간에 윤사집단의 처리에 있어서 이견이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옹정은 윤사, 윤당 및 윤제를 포함해서 모두를 제거해야한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연갱요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연갱요가 그들을 동정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악독하게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연갱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옹정제의 금기를 건드린 것이다. 옹정제는 원래 윤사집단을 타격하는데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연갱요, 융과다의 호응을 기대했다. 이 두 사람이 이 문제에서 100% 순종하지 않는다면, 옹정이 나중에 연갱요를 제거한 것은 그가 보기에 "연갱요의 기량을 잘 알고 있어서, 그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옹정제가 연갱요 개인이 황권에 불리한 거동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갱요는 감히 그렇게 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옹정제가 가장 걱정한 것은 연갱요와 같은 신분과 그런 '애매한 마음'을 윤사집단이 이용하게 되면 골치가 커진다는 것이다. 옹정제가 그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안으로는 융과다, 밖으로는 연갱요였다. 그리고 연갱요는 융과다와 달리, 군대를 거느리고 있고, 멀리 서북에 있었다. 만일 누군가 그를 외부지원자로 삼는다면, 새황제에게 엄청난 압력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바로 옹정제가 여러번 당시에 떠돌던 유언비어인 "제출삼강구(帝出三江口), 가호작전장(嘉湖作戰場)"을 가지고 연갱요에게 경고한 이유이다.

 

그 외에 연갱요는 은총을 믿고 스스로 조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교만방자해졌다. 그는 총독, 순무, 장군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더 이상 대등한 말투가 아니라, 상사가 부하에게 훈계하는 말투와 규격을 썼다. 이것은 바로 그 자신이 총독,순무의 위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연갱요의 곁에는 여러 관료들이 모여서 그를 응원하고, 그를 위해 뛰어다녔다. 은연중에 연씨소집단이 형성된 것이다. 옹정제 자신이 예전에 황위를 얻을 때 사당을 조직한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이 사당을 조직하는 것을 가장 꺼렸다. 연갱요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신의 심복들을 발탁하였다. 비록 이 방면에서 옹정제가 그에게 일부 특권을 부여했다고 하지만, 연갱요는 옹정제가 은혜를 베푸는 진정한 의도를 잘못 읽었고, 그가 신하로서 몸가짐을 조심하지 않고 비양발호했다. 여러가지 요인으로 옹정제는 연갱요와 융과다를 제거하는 것이 윤사, 윤제, 윤당을 제거하는 것보다 시급하다고 결정하게 만든다. 첫재는 연갱요, 융과다는 실력이 커지고 있어, 윤사, 윤제, 윤당처럼 이미 사당이 흩어진 경우와 달랐다. 연갱요, 융과다는 황제의 총신이라는 신분으로 출현하여, 만일 빠른 시일내에 청산하지 않으면, 반드시 오인한 많은 신하들이 그들을 따르게 될 것이었고, 세력이 더욱 커지면 위험은 더욱 심각해진다. 둘째는 연갱요 융과다를 제거하는 것은 새 황제의 위엄을 세울 수 있었다. 소위 누구든 귀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지만, 천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갱요는 천섬총독에서 1등공, 무원대장군이 되었지만, 1등공에서 1등죄인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천양지차는 바로 황제 한 사람의 수단이다. 셋째는 연갱요, 융과다를 청산하면 윤사의 일당이 이 두 명을 빌어서 사건을 일으키려고 계획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세 가지 이유로 연갱요는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연갱요가 제1차 입경때 무상의 영광을 누렸던 것과 비교하면, 제2차 입경은 실질적인 변화가 생긴다. 옹정제는 입으로는 그가 "공충체국(公忠體國)"하낟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이미 그를 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갱요은 십월에 북경에 도착하는데, 십일월 십삼일, 옹정제는 연갱요의 친구이며 직예순무인 이유균에게 연갱요를 멀리하라고 말한다. 이유군은 원래 연갱요가 옹정제에게 추천한 사람이다. 이유균의 처는 연갱요 심복의 수양딸이다. 두 집안은 아주 가까웠다. 옹정제가 이유균에게 말했다는 것은 이미 연갱요를 처리하는 일정이 잡혔다는 말이다. 이어서, 고기탁등 봉강대리가 전후로 옹정제의 비밀 지시를 받는다. 그들로 하여금 점차 연갱요와는 선을 긋고 황제의 편에 서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옹정제는 연갱요와 반대편에 선 이발, 채정을 발탁한다. 이발, 채정은 예전에 원래 연갱요가 옹정제에게 추천한 적이 있으나, 나중에 개인적인 은원으로 쌍방은 서로 싸우고 불쾌한 사이가 되었다. 옹정제는 이 점을 이용하여, 이발, 채정에게 앞장서서 연갱요를 고발하라고 시킨 것이다. 옹정제는 연갱요을 제거하는 준비작업을 마친 후 계획적으로 연갱요를 치기 시작한다.

 

옹정2년 십이월 십일일, 그는 연갱요가 올린 글에 기이한 내용의 비시를 남긴다: "무릇 신하로서 공을 세우려고 하는 것은 쉬우나, 공을 세우기는 어렵다; 공을 세우기는 쉬우나, 공을 지키기는 어렵다; 공을 지키기는 쉬우나, 공을 끝까지 유지하기는 어렵다; 임금된 자로서 은혜를 베푸는 것은 쉬우나, 은혜를 잘 베푸는 것은 어렵다; 은혜를 잘 베푸는 것은 쉬우나, 은혜를 지키는 것은 어렵다; 은혜를 지키는 것은 쉬우나, 은혜를 시종일관하기는 어렵다." 이 말에 숨은 뜻은 바로 연갱요에게 네가 신하로서 공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나도 은혜를 계속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연갱요는 아직도 옹정제가 그를 어떻게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음 해인 옹정3년 정월, 다시 한 가지 잘못을 저질러 옹정제는 철저히 그의 약점을 틀어쥐게 된다. 이 해의 정월, 연갱요의 심복인 호기항이 섬서도원 김남영을 탄핵한다. 연갱요는 김남영이 그렇게 큰 내력을 지니고 있을 줄 몰랐다. 그는 옹정의 첫째가는 심복인 이친왕 윤상이 추천한 사람이었다. 김남영을 탄핵하는 것은 윤상에게 하야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전에 연갱요는 윤상에게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고 있었다. 윤상을 표리부동하다고 조롱하기까지 한다. 옹정은 그의 옛고질병이 도져서 다시 윤상에게 도발을 했다고 보고, 대노한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연갱요, 호기항이 붕당을 꾸민다고 질책한다. 이월, 연갱요는 상소를 올리면서 황제의 "조건석척(朝乾夕惕)'을 '석양조건(夕陽朝乾)'이라고 써서 황제의 진노를 산다. 옹정은 작은 문제를 크게 삼아서 연갱요를 질책하고, 나아가 연갱요를 위협한다: "(연갱요)는 조건석척의 네 글자가 짐에게 맞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다....연갱요의 청해의 공을 짐이 인정할지 말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당당한 대청황제가 신하와 이렇게 어린아이처럼 말꼬리를 잡고 있다. 신하가 글자를 잘못쓴 것을 가지고, 황제는 너의 과거 군공까지도 빼앗아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소동의 결과는 하나이다. 그것은 연갱요의 하야이다. 사월, 연갱요는 무원대장군에서 파면되고, 항주장군으로 강급된다. 청나라초기의 몇몇 무원대장군의 운명은 모두 좋지 않았다. 투하이(圖海)는 무원대장군을 지냈는데, 야사에 의하면 그는 나중에 강희제에게 놀라 죽었다고 한다. 푸췐(福全)도 무원대장군인데 작전이 철저하지 못하여 책벌을 받는다; 윤제도 무원대장군인데 황태자가 되지 못했을 뿐아니라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연갱요는 더욱 철저히 망한다.

 

정계에서는 예전부터 "담장이 무너지려 하면 모든 사람이 밀어버린다(墻倒衆人推)"는 말이 있다. 연갱요가 일단 총애를 잃자, 그의 친구들이 돌연 그의 적으로 바뀐다. 이유군은 가장 먼저 연갱요가 "모람군공(冒濫軍功), 침탄국탕(侵呑國帑)"했다고 욕한다. 이어서 이발은 황제에게 연갱요를 죽임에 처하라고 주청한다; 전문경(田文鏡)도 연갱요를 주살하라고 주청한다. 연갱요에게 낙정하석하는 측면에서 옹정제의 심복중에서는 이발, 전문경이 던진 돌이 가장 컸다. 옹정3년 구월, 옹정제는 연갱요를 체포하도록 명한다. 십이월에 죄를 논하여, 연갱요에게 92가지 죄를 뒤집어 씌운다. 십이월에는 연갱요를 사사한다. 연갱요가 죽기 1달전에, 그의 여동생, 즉 옹정제의 귀비(貴妃)인 연씨도 병사한다. 어떤 사람은 만일 그녀가 살아 있었더라면, 연갱요가족은 아마도 좀더 관대하게 처리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옹정제는 정치적 적수를 상대하는데 있어서는 봐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그의 친아들까지도 일률적으로 극형에 처했다. 그래서, 연씨가 연갱요보다 나중에 죽었더라도, 연갱요의 최후는 실질적으로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옹정제가 연갱요에게 씌운 92가지 죄상중에서 연갱요가 뇌물을 수수했다는 등 몇 가지 죄상이 그런데로 근거가 있고, 나머지는 모두 억지로 만들어 뒤집어 씌운 것이다. 예를 들어, 연갱요가 "참월(僭越)"했다는 것은 바로 신하의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인데, 연갱요가 식사를 하는 것을 '용선(用膳)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사(賜)"라고 하며, 부하관리를 만나는 것을 "인견(引見)"이라고 하였다는 것인데, 이런 단어는 원래 황제전용이다. 연갱요가 마음대로 썼으면 '참월'이다. 그러나, 옹정의 또 다른 총신인 이위(李衛)도 이렇게 대담하게 '참월'한 바 있다. <주비유지.이위주절>을 뒤져보면, 옹정2년 구월초육일, 옹정이 이위에게 내린 비시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천마(川馬), 고동(古董)을 받는 것은 모두 유의해라. 양면 '흠용(欽用)'패는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안된다. 그것은 소인이 성공한 후에 드러내는 태도이다. 네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이 비시를 보면, 이위도 마찬가지로 뇌물을 받고 마찬가지로 자신의 집사패에 '흠용'이라고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옹정은 그에게 욕을 한두마디 했을 뿐이다. 그에게 소인득지의 행태라고 했을 뿐 더 심하게 질책하지는 않았다. 옹정2년, 이위의 당시 직무는 그저 운남포정사였다. 연갱요의 1등공, 무원대장군, 천섬총독의 지위에는 전혀 못미쳤다. 게다가 이위의 '참월'은 옹정이 쉽게 넘어가 주었을까? 실제로 이위의 오만방자는 연갱요까지 들었고, 그는 직접적으로 이위의 이런 결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옹정제는 가볍게 봐주고 넘어간다. 이위가 나중에 절강총독이 되었을 때, 서호 화신묘에 자신 및 처를 위하여 터무니없는 '호산신위'를 모셔서, 자신을 절강지구의 신성한 '대선(大仙)'이라고까지 한 것이다. 나중에 건륭제가 남순때 보고는 철거를 명한다.

 

이를 보면, 이위의 소위 '교망방종'은 옹정제의 비호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황제가 지지하고 신임하는 사람이면, 설사 뇌물을 받고, 참월을 하더라도 작은 문제에 불과하다. 다만 일단 총애를 잃으면 이런 문제는 바로 정치적인 차원의 문제로 승격되는 것이다. 연갱요가 죽임을 당한 주요 이유는 수뢰가 아니다. 참월도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연갱요는 윤사, 윤당등의 처리에 대하여 옹정제와 이견이 있었다. 그래서 옹정제는 그를 믿을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정치적 적수에게 이용될까봐 걱정했고, 먼저 손을 써서 연갱요를 처결하기로 한 것이다. 연갱요를 죽이는 일에서, 당시 민간에서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일부 지식분자는 연갱요에 대하여 동정적이었다. 왕경기는 <독서당서정필기>에서 선의로 연갱요에게 황제의 '토사구팽'을 주의하라고 일깨워준다. 그러나 연갱요는 이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연갱요사건이 터지자 옹정은 금방 핑계를 잡아 왕경기를 죽인다. 연갱요는 전공이 혁혁하여, 항주로 유배갔을 때, 용금문의 곁에 앉아 있지, 병졸들이 연갱요를 알아보고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며, '연대장군이 여기 계신다'고 말한다. 옹정이 후계자로 확정한 황태자 홍력(나중의 건륭제)도 연갱요에 대하여 동정적이었다. 그는 연갱요와 같은 얻기 힘든 명장은 서북에 남겨서 전쟁에 대비해야한다고 여겼다. 이 일은 <영헌록>의 <속편>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누구도 감히 연갱요사건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없었다. 그저 홍력 한 사람만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옹정제가 서북양로에서 마땅한 장군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홍력의 건의는 안목이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갱요가 이렇게 인망을 얻었음에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연갱요가 죽자, '진정한 당대제일의 초군발류의 보기드문 대신'이라던 융과다도 인생의 최후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