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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영화

미자산(米家山) vs 판홍(潘虹): 결혼과 이혼

by 중은우시 2022. 10. 17.

글: 주석시광(注釋時光)

 

1980년대말, <완주(頑主)>는 거여우(葛尤)를 뜨게 해주었다. 이 영화는 한때 중국 오락영화의 모범으로 불렸고, 복제하기 힘든 신랄한 풍자로 많은 사람들이 "신작(神作)"이라고 말했었다.

 

거여우는 인터뷰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완주>는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고, 이 영화의 감독 미자산(米家山)은 자신의 은인이라고. 또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완주>는 미자산에게도 가장 뛰어난 작품중 하나였다. 그들 사이에는 더많은 성취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한때 잘나가던 미자산은 지금 영화계에서 점점 잊혀져갔다. 어쨌든 그는 이미 나이가 75세이고, 아직은 일을 하고 있지만, 이제 은퇴하고 말년을 즐길 나이가 되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은 당시 미자산과 판홍(潘虹)의 사랑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싶어한다. 지금 이미 70여세가 된 미자산은 그 8년간의 혼인을 끝낸 후 지금까지도 홀몸으로 지내고 있는데, 후회하고 있을까?

 

미자산은 중국의 유명감독이다. 그는 <구부러진 돌길(彎彎的石徑)> <완주>등 영화작품이 있다. 그러나 그가 어렸을 때의 꿈은 기실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47년, 미자산은 산시(山西)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친은 미젠슈(米建書)로, 1931년 혁명에 참가한 '원로혁명가'인 그는 항일전쟁, 해방전쟁을 거치면서 민족해방과 독립에 큰 공헌을 세웠다.

 

신중국이 건립된 후, 미젠슈는 청두시장, 시위서기등의 직위를 지낸다. 미자산의 모친임 마쥔즈(馬俊之)는 은퇴하기 전에 화서(華西)의과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미자산은 아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미자산은 어렸을 때 공부를 아주 잘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학생회주석'까지 지냈으니 공부도 잘하고 품성도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미자산은 특히 이과쪽의 성적이 뛰어났다. 그는 중고등학교때 하르빈공과대학에 가서 공부하여 과학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하늘은 사람이 원하는대로 놔두지 않는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미자산은 당국의 호소에 따라 산시 샤오이(孝義)의 농촌으로 삽대(揷隊)를 가야 했고, 하르빈공과대학은 그에게 실현될 수 없는 꿈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말해서, 미자샨이 무슨 농촌에서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삽대때 농사일을 하면서 손에 성한 곳이 없었고, 힘들기 그지 없었다.

 

다행히 당시 마을의 촌서기는 그와 같이 도시에서 온 지식청년들을 아껴주었다. 촌서기는 미자산이 농사일을 하지 못하지만, 글은 안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현지 소학교로 보내 농촌아이들에게 수업을 하도록 어레인지했다. 이 일은 농사일보다는 그에게 훨씬 편했다.

 

학교에서, 미자산은 학생들에게 수업을 하는 외에, 남는 시간에는 스스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기회를 틈타 공부를 열심히 했고, 공부를 통해서 자신의 생활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했다.

 

역시 운명은 미자산의 노력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산시대학 예술학과에 미술전공으로 입학한다. 비록 그가 생각했던 과학자의 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는 금방 새로운 전공과 분야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예술학과의 수업을 통해, 자신의 미학지식과 심미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1975년, 미자산은 산시대학을 졸업하고, '분배'받은 대학생으로 아미영화제작창(峨眉電影製作廠)에 입사하여 미술을 담당한다. 그의 주요업무는 배경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때, 미자산은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이 일로 사랑을 얻을 줄은. 더더구나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언젠가 자신이 감독이 될 줄은.

 

1977년 아미영화제작창은 <노예의 딸>이라는 영화를 찍는다. 영화의 여주인공을 계속 확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제작창의 창장은 미자산과 제작주임을 상하이로 보내어 배우를 캐스팅하도록 한다.

 

상하이영화제작창에서 미자산은 유리창을 닦고 있던 판홍을 만난다. 당시 미자산은 그녀를 '하늘에서 온 선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판홍은 아름다와서 빛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영화는 결국 판홍을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한다.

 

판홍의 본명은 유영화(劉榮華)였다. 그녀의 부친은 소련사람이다. 그녀에게는 절반의 소련혈통이 있어서, 오관이 선명했고, 어려서부터 서양아이같았다.

 

그러나 운명은 그녀를 그다지 보살펴주지 않았다. 판홍의 소련인부친은 그녀의 모친을 버리고 소련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미혼모'인 판홍의 모친은 판홍을 친가에 맡길 수 밖에 없었고, 그녀는 외할머니의 손에 자란다.

 

외할머니는 판홍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다. 맛있는 것이나 좋은 것은 모두 판홍에게 먼저 주었다. 6살이 되던 해에 비로소 모친이 판홍을 데려간다. 이때 모친은 이미 결혼했고, 딸도 둘이 있었다.

 

행운이었던 것은 계부가 판홍을 친자식처럼 아껴준 것이다. 그녀에게 부친으로서의 사랑을 듬뿍 주었다; 불행한 점이라면 그후 시대가 바뀌면서, 판홍은 계부와의 관계로 인하여 차별과 모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계부는 자살을 선택한다. 그때 판홍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고, 바로 부친의 사랑이 필요한 때였다.

 

계부가 죽은 후, 모친은 그녀에게 계부의 유골함을 안고 하르빈의 고향집으로 보낸다. 판홍은 자그마한 유골함을 안고 하르빈으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나중에 판홍은 이 일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계부의 죽음은 그녀에게 나이와 고통을 초월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동년은 이미 끝났다고 여긴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들보다 성숙해졌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속에는 항상 부친의 사랑에 대한 갈구가 남아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 판홍은 숭명도(崇明島)의 농장으로 분배된다. 원래 그녀는 이름없는 여자로 살다가 죽을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운명의 신이 그녀를 돌봐준다.

 

1973년, 상하이희극학원이 숭명도에서 학생모집을 한다. 담당자는 한눈에 판홍을 마음에 들어했고, 그녀를 연기과에 합격시킨다. 판홍은 연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대학2학년때, 판홍은 감독에 뽑혀 <사막타령(沙漠駝鈴)>에 출연한다. 그리고 카메라앞에서도 그녀는 자연스러웠고, 연기를 위해 태어난 듯했다. 졸업후, 판홍은 상하이영화제작창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미자산의 눈에 들어 <노예의 딸>의 여주인공이 되었다.

 

처음에 판홍은 미자산이 그녀를 단지 여주인공으로 마음에 들어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금방 그녀는 깨닫게 된다. 미자산은 그녀를 자신의 애인으로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다. 

 

비록 당시 미자산은 이미 30살이고, 판홍은 겨우 23살이었지만, 영화를 찍는 동안, 미자산은 판홍을 여러 모로 잘 돌봐주었고, 두 사람간은 급격히 사랑에 빠진다.

 

나중에 판홍은 이렇게 솔직히 말했다. 미자산은 그녀에게 '절반의 부친을 찾은 것같다'는 느낌을 주었다고. 이전에 말한 것처럼, 판홍의 내심 깊은 곳에는 부친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더욱 성숙한 남자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학교에 다닐 때 그녀는 같은 나이의 남학생들의 구애를 거절한 바 있다.  

 

그래서, 비록 미자산은 용모가 뛰어나지 않았고, 판홍보다 7살이나 많았지만, 판홍은 아마도 미자산의 성숙함을 좋아했던 것같다. 두 사람은 금방 애인사이가 된다.

 

이들의 사랑은 처음에 다른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다. 대다수는 둘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다. 어쨌든 당시의 판홍은 나이도 어리고 용모도 예쁘지만, 미자산은 겉으로 보기에 판홍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말들이 많았지만, 두 사람의 애정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1년간의 연애후,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한다.

 

처음에, 두 사람은 결혼후에도 생활이 아름다울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같이 사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 결혼한 다음 해에 판홍이 스캔들에 휘말린다.

 

당시 판홍은 <고뇌하는 사람의 웃음>이라는 영화에 출연했고, 이 영화는 크게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판홍에게 큰 골치거리를 가져다 주었다. 영화감독 양얜진(楊延晋)은 비록 재능이 뛰어났지만, 플레이보이였다. 자주 자신의 영화에 출현한여배우들과 스캔들에 휘말렸다.

 

더욱 골치아픈 것은 양얜진이 이미 가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인 홍룽(洪融)도 상하이영화제작창의 배우였고, 성격은 직설적이면서 강인했다.

 

두 사람간에 스캔들이 발생한 후, 홍룽은 직접 판홍이 양얜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를 제작창의 공고판에 붙여놓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된다. 판홍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된다.

 

사건은 갈수록 커졌고, 결국 양얜진과 홍룽은 이혼을 선언한다. 그후에 비로소 점점 가라앉는다. 양얜진과 홍룽이 서로 갈라진 것에 비해, 미자산의 태도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그는 당시 확고하게 판홍의 편을 들어주었고, 양얜진의 집을 부숴서 판홍의 화풀이를 해준다.

 

1980년, 미자산은 판홍이 상해영화제작창에서 아미영화제작창으로 옮겨오도록 도와준다. 이제 두 사람이 같은 영화제작창의 '동료'가 된 것이다.

 

판홍은 일찌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사건에서 그녀는 미자산이 그녀의 '기사'로 여겨졌다고 한다. 항상 그녀를 보호해주었고, 이때가 아마도 두 사람간의 사이에 가장 감정이 좋았던 때인 것같다.

 

다만 나중에, 미자산과 판홍의 애정에 문제가 나타난다. 한편으로 미자산은 사업에서 성공하려는 마음이 너무 강했다. 그녀는 단순히 '판홍의 남편'으로 남고 싶어하지 않았고, 한명의 감독으로 인정받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그는 북경영화학원 감독과에 진수반으로 들어가 2년간 공부한다. 1985년에 다시 아미영화제작창으로 돌아온다.

 

다른 한편으로, 판홍은 갈수록 유명해지고, 그녀는 일때문에 더욱 바빠진다. 한번 영화를 찍으러 가면 몇달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길었을 때는 1년반이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헤어져 있는 시간이 같이 있는 시간보다 많았다.

 

나중에 미자산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와 판홍이 결혼한 8년동안, 두 사람이 진정으로 함께 한 시간은 겨우 380일밖에 되지 않는다고. 이렇게 되면 아무리 애정이 깊더라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미자산은 말한다. 그들이 매번 다시 만날 때마다 달력에 표시를 했다. 그래서 이 380일은 단 하루도 틀리지 않는다.

 

그들이 문제를 발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판홍은 한때 자신과 미자산에게는 공동의 화제가 없다고 생각하여, 특별히 그녀도 감독과정을 공부하기도 했다. 남편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미자산도 한 때 두 사람이 아이를 함께 양육하면서 부부간의 교류를 늘이고, 두 사람의 감정을 회복하려고 노력했었다. 당연히 그도 판홍이 영화를 찍기 위해서 몇달간 집을 떠나 있는 생활을 그만두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노력은 모두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함께 하는 시간이 적고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다보니 두 사람간에는 의사소통도 적었고, 판홍은 당시 한창 인기가 오르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아서 자신의 연기에 지장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휴식하는 몇년이후 그녀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고 다시 되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일로 너무 바쁘기 때문에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몇년후에 아이를 갖자고 얘기한다.

 

그러나 미자산은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쨌든 당시 미자산은 이미 40살이 되었고,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은 모두 자식이 있었다. 그래서 항상 자신에게는 뭔가가 빠졌다고 여긴다.

 

결국 두 사람은 1986년 이혼을 선택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혼당일, 미자산은 자전거를 타고 판홍을 태우고 가서 이혼절차를 처리했다고 한다. 판홍은 자전거의 뒷좌석에서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지만, 미자산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쨌던 체면은 유지했다. 그들은 평화롭게 헤어졌고, 다툼은 없었다. 이혼후에도 서로 욕하지 않았고, 서로간에 왕래를 끊은 것도 아니었다.

 

이혼후에 미자산의 사업은 한때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1987년, 미자산은 <불침의 지평선>이라는 영화를 감독한다. 그러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이 영화는 계속 삭제 수정된 후에야 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수익도 엉망이었다. 정산후에 60만위안의 손실이 발생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미자산이 왕삭(王朔)의 소설 <완주>를 개편하여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든 후에 비로소 그의 사업은 호전된다. 이 영화는 평가가 아주 높았다. 거여우, 장궈리(張國立)등의 배우들이 인기를 얻게 해주었을 뿐아니라, 제9회 "금계상"의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미자산의 대표작이 된다. 그는 이로 인하여 중국의 유명감독반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중에 미자산은 적지 않은 영화를 감독한다. 예를 들어, <원씨유산사건>, <너는 16살이 아니다>, <전지황화>등이 있다.

 

그러나 아마도 자신에게 돈이 얼마 없어서 영화를 찍으려면 여러 사람에게 눈치를 보면서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싫었던 것같다. 그래서 그는 광고, 부동산쪽에 진출하여, 자신이 번 돈으로 영화를 찍고자 한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자산은 사업을 꽤 잘했고, 그는 확실히 자신의 돈으로 자신의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2015년, 미자산은 5년의 시간을 들여 중국의 국화대사(國畵大師)의 다큐멘터리영화 <대사(大師)의 배영(背影)>을 찍는다. 이 다큐멘터리영화는 2022년 5월 인터넷에 올라오고 널리 호평을 받는다.

 

다른 한편으로, 미자산은 이혼후에 친구와의 식사자리에서 젊은 여자아나운서를 만난다. 그녀는 젊고 예뻤고 당시 20살도 되지 않았다. 미자산은 바로 그녀의 미모에 반하고 그녀에게 맹렬하게 구애했다.

 

미자산의 구애는 금방 그 여자의 마음을 움직였고, 두 사람은 한동안 연애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금방 베이징으로 옮겨갔고, 두사람의 애정은 그렇게 흐지부지된다.

 

나중에 미자산은 양화(楊華)와의 사이에 소문이 나기도 했다. 두 사람이 결혼했는지 아닌지는 외부에서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미자산이 나중에 '일반인'과 결혼했다고 한다. 이름까지도 '기밀'로 하면서. 그러나 이것도 아마 근거없는 소문일 것이다.

 

현재의 미자산은 아직 홀몸이다. 그의 자식을 가지고 싶다는 꿈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그와 전처 판홍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부부라는 관계만 없을 뿐이지,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친구같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미자산모친의 병이 위중할 때, 판홍이 '전 시어머니'를 병문안갔으며, 미자산이 감격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미자산은 후회했을까? 만일 그가 판홍과 이혼하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의 사이에는 아마도 아이가 생겼을 수도 있다. 지금 그들은 아마도 행복한 가정을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이전의 혼인관계에 대하여 모두 후회한다는 말을 했다. 당시 너무 바쁘게 지내느라고 혼인관계를 중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모두 미자산은 낮에 일로 바빴지만, 밤에는 혼자서 외로웠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모두 추측일 뿐이다. 미자산은 어쨌든 지금 75세나 되었다. 이 나이에도 여전히 사업으로 바쁘다면 아마도 그가 추구하는 것은 정신적인 만족일 것이다. 아마도 애정방면은 일찌감치 포기한 것같다.

 

그가 더욱 즐겁게 보내고 행복하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