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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영화

관지림(關之琳): "정부(情婦)로 산 것이 후회된다"

by 중은우시 2022. 6. 30.

글: 왕사차소(往事叉燒)

 

1

 

1954년, 장빙천(張氷茜)은 장성영화회사에서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녀는 한쌍의 살구눈으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녀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장빙천은 성격이 고오(孤傲)했고, 누구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 해에 관산(關山)은 아직 철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남동생과 여동생을 키우고 있었다. 관산은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를 잡지 못했었다.

 

관산은 포기하지 않았고, 2년후 장성영화회사에 면접을 본다. 그는 이미지가 좋아서, 감독인 원앙안(袁仰安)은 그에게 배우훈련반에 시험칠 것을 권한다. 다음 해, 관산은 정식으로 배우가 된다. 그는 장빙천의 포스트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멍해진다.

 

이때 관산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감히 장빙천을 쫓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는 당연히 장빙천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958년, 원앙안이 <아Q정전>의 남자주인공을 뽑는데, 캐스팅을 여러번 열었지만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캐스팅에 참여하지 않은 관산을 보게 되었고, 그가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관산은 막 회사에 들어왔고,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찌어찌하여 남자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Q정전>이 상영된 후, 반응이 열렬했다. 관산은 이 영화로 스위스 로카르노국제영화제의 최우수남자주인공상을 받아버린 것이다.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최초의 홍콩배우가 되었다.

 

장빙천의 마음 속에도 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관산은 자주 그녀와 함께 식사를 했고,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60년, 관산과 장빙천이 결혼한다. 이 소식은 홍콩영화계를 뒤흔들었다. 그후 장빙천은 거의 영화를 찍지 않게 된다.

장빙천과 관산

2년후, 장빙천이 딸을 낳는다. 이름은 관가혜(關家慧)로 짓는데 바로 나중의 관지림이다.

 

관지림은 부모의 미모를 이어받아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왜왜(瓷娃娃)"라고 불린다. 관지림은 너무 예뻤기 때문에, 많은 사진관에는 그녀의 어렸을 때 사진이 걸리게 된다. 심지어 많은 임산부들이 그녀의 사진을 침대 옆에 놓아두고,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낳기를 기원했다.

 

장빙천은 관지림이 소학교를 다니면서부터 그녀에게 얼굴팩을 하게 하고, 그녀에게 발레교습을 시킨다. 그런데, 발레를 하다가 다리가 굵어질까봐 걱정이 되어 다시 수영으로 바꾸어 배우게 한다.

 

모든 사람들은 이들이 행복한 세 가족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현실의 관지림은 집안에서 감히 큰 소리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이때 관산의 사업은 잘나갔다. 많은 여자들이 그를 "꿈속의 애인"으로 여겼다. 동시에 그의 스캔들도 많이 나왔다.

 

장빙천은 초조하고 불안했다. 자주 관산을 추궁했다. 관산은 그게 싫어서 밤늦게 귀가하고, 곁에는 계속 여자들이 바뀌었다. 관산이 집에 있을 때면 자주 장빙천과 말다툼을 했고, 관지림은 항상 문 뒤에 숨어있어야 했다. 마음 졸이며 갈수록 심하게 다투는 부모를 보아야 했다. 관산의 기분이 좋을 때만 관지림은 나가서 그에게 안길 수 있었다.

 

한번은 관산과 관지림이 싸울 때, 관산이 그녀에게 못나서 사내아이도 못낳았다고 말한다. 장빙천은 아주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다시 사내아이를 낳아서 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혼인관계를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임신한 장빙천은 친구와 자신의 고민을 얘기했다. 관지림이 옆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빙천의 친구가 이렇게 묻는다: "네 딸은 우리가 뭘 얘기하고 있는지 알아듣는거냐?"

 

장빙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얘는 몰라."

 

여러 해가 지난 후, 관지림은 이렇게 기억했다: "기실 나는 다 알고 있었다. 엄마는 남동생이 생기면 부부관계가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연 아들을 낳은 후에도 관산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장빙천과는 별거를 요구했다.

 

별거후, 장빙천은 자주 넋이 나가 있었다. 관지림은 모친을 보면서 자신이 이 집안을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관지림이 남동생과 집에 있을 때, 남동생은 겨우 3,4살이었고 놀기 좋아했다. 부친의 라이터를 켜서 장난감 하나에 불을 붙인 후, 서재에 던져넣고 문을 닫고 나왔다. 조금 후 관지림은 불타는 냄새를 맡았다. 모두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하고서 자신이 한층 한층 다니면서 소화기를 가져왔고, 모친과 아이(阿姨, 집안일하는 아줌마)에게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서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때 관지림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키가 컸기 때문에 적지 않은 감독의 부인들이 그녀에게 미인선발대회에 출전하라고 권했다. 자신이 추천인이 되어주겠다면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관지림은 난감해 했다: "나는 이제 12살인데요."

관지림은 부모들처럼 배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이상은 졸업후 공간설계사가 되는 것이었다.

 

1980년의 어느 날, 관지림이 집으로 돌아왔는데, 모친이 짐을 싸면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부친도 짐을 싸고 있었다. 물어보고나서야 알 수 있었다. 부친은 이미 모친에게 이혼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혼후, 모친은 상심이 컸고, 관지림의 나이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거주한다. 부친은 영화계에서 은퇴하고, 새 여자와 함께 타이완으로 가서 사업을 한다. 관지림 혼자 홍콩에 남게 된 것이다.

 

그때, 관산은 사업이 잘 되지 않았고, 모친도 수입이 없었다. 관지림은 계속 공부할 돈이 없었고, 돈을 벌어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여러 해후, 관지림은 부친 관산을 이렇게 평가한다: "풍류, 집안을 돌보지 않는다. 부친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2

 

하루는 한 숙부가 관지림을 찾아온다: "내가 방송국을 살려고 하는데, 네가 우리 방송국과 계약하면 어떻겠느냐. 광고도 찍고, 영화도 찍을 수 있다."

 

관지림은 마음 속으로 생각한다: 숙부가 돈을 아주 많이 주고, 자신은 자유롭다. 그럼 계약하자. 이렇게 하여 관지림은 아주TV와 계약을 체결한다.

 

이 해는 홍콩영화드라마의 황금기였다. 많은 여배우들이 자신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첫째 해에, 관지림은 6부의 드라마, 2부의 영화를 찍는다. 매일 2,3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관지림은 자신이 귀신처럼 영화세트장을 오간다고 느낀다.

 

둘째 해에, 관지림의 처녀작이 방영된다. 25살의 장국영(張國榮)과 파트너가 되어 찍은 TV드라마 <첨첨이십사매(甛甛廿四妹)>였다. 이 드라마는 홍콩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으나, 매체는 19살의 관지림을 주목하고, 여러 신문에서 크게속속 보도한다. 제목은 "영화황제의 딸이 연예계에 들어왔다. 대미녀이다."

 

회사는 관지림이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계속 그에게 배역을 준다. 다만 관지림은 영화드라마를 찍는 과정을 즐기지 않았고, 그저 힘들다고만 느낀다. 어떤 때는 하나가 끝나면 다른 하나가 시작되는데, 중간에 단지 1시간의 휴식밖에 없다. 관지림이 집으로 돌아가서 목욕을 겨우 할 수 있을 시간이다.

 

하루는 관지림이 친구들과 만나는데, 그때 그녀보다 16살이 많은 부유한 상인 왕국정(王國旌)을 알게 된다. 왕국정은 관지림을 보고는 첫눈에 반해서 미친 듯이 그녀를 쫓아다닌다. 빈번하게 영화드라마세트장에 와서 관지림을 찾았고, 관지림이 영화드라마를 찍는데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세상 일을 아직 잘 모르던 그녀는 금방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리고 왕국정을 자신의 구명도초(救命稻草)로 여긴다. 왕국정은 관지림에게 따뜻한 가정을 약속한다. 관지림도 오직 그만이 자신에게 새로 가족의 사랑을 안겨줄 수 있다고 여긴다.

 

얼마 후, 관산은 딸이 왕국정과 연애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대노한다. 관지림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너희 둘이 함께 하는 것에 결사반대이다"라고 말한다.

 

왕국정은 이혼을 한번했고, 현지에서 유명한 플레이보이였다.

 

전화를 끊은 후, 관산은 바로 타이완에서 홍콩으로 달려가서, 딸의 혼인을 막으려 한다. 다음 날, 관지림은 부친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영화는 더 찍지 않겠다. 왕국정에게 시집가겠다." 관산은 화가나서 물건을 집어던지며 위협했다: "네가 그와 결혼하면, 나는 너와 부녀관계를 끊겠다."

 

누가 알았으랴. 관지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바로 당신들이 나에게 주지 않은 이 가정을 떠나려는 것이다. 나는 이미 그와 미국에서 결혼등기하고 살기로 결정했다."

 

관산은 대노하여 곁에 놓인 칼을 들고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자살하겠다고 그녀를 압박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1982년, 관지림과 왕국정은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결혼한다. 관산은 가족들의 권유로 마지못해 결혼식에 참석한다.

좌에서 우로: 왕국정, 관지림, 장빙천, 관세화, 관산

결혼후 관지림은 연예계를 그만두고 미국에 거주하며 가정주부로 살려고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결혼한지 1달만에 왕국정은 나이트클럽과 카바레를 돌아다니고 밤에도 집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알고난 후, 관지림은 되돌리고 싶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더욱 큰 고통뿐이었다. 5개월후, 두 사람은 이혼한다. 나중에 왕국정은 이렇게 관지림을 평가했다: "관지림같은 그런 여자는, 아무렇게나 길거리에서 붙잡은 여자도 그녀보다는 낫다."

 

그 해에 관산은 다시 여자친구를 만난다. 관지림보다 겨우 10살이 많았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매체에 보도된다. 둘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이혼후, 관지림은 더욱 부친을 원망하게 된다. 그리하여 부친을 철저히 자신의 생활에서 배제한다.

 

3

 

관지림은 낙담해서, 홍콩으로 돌아가 계속 영화를 찍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쨌든 막 이혼한 여자이다. 감독들도 쉽게 그녀를 캐스팅할 수가 없었다.

 

1984년의 어느 날, 관지림은 집에서 의외의 전화를 받는다. 저명한 제작자인 홍금보(洪金寶)의 전화였다. 전화에서 홍금보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흥미가 있으면 내가 감독제작하는 코미디쿵후영화 <하일복성(夏日福星)>에 출연하는게 어떠냐?" 전화를 받은 후 관지림은 너무 기뻤다. 마치 하늘에서 떡이 떨어진 것처럼. 그녀는 바로 하겠다고 대답한다.

 

다만 관지림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유명한 것도 아닌데, 왜 홍금보가 출연하도록 요청했을까?

 

영화를 찍기 시작하자마자 관지림은 다시 논란에 휩싸인다. 한 매체에서 이렇게 보도한 것이다: 관지림이 성룡(成龍)과 영화세트장에서 연애를 했다는 것이다.

 

이때의 성룡은 임봉교(林鳳嬌)와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이미 아들 방조명(房祖名)을 낳았다. 그리고 관지림은 막 이혼했다.

 

스캔들은 갈수록 커져갔다. 임봉교는 분노하여 홍금보를 찾아와 호소한다. 홍금보는 성룡과 영화세트장에서 한바탕 싸우게 된다.

 

관지림의 부친 관산이 이것을 알고 관지림에게 묻는다: "너는 왜 성룡과 이런 스캔들에 빠지느냐"

 

이때서야 관지림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 배역을 맡은 것은 원래 부친이 추천한 것이라는 것을. 관지림은 그러나 감사한 마음은 없었고, 오히려 차갑게 부친에게 말한다: "앞으로 내 일과 생활에 간섭하지 마세요." 크게 한바탕 싸우고 관지림은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후 관지림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부모가 이혼한 것은 제3자(정부)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제3자가 된 적이 없다."

 

그러나, 다음 해, 관지림은 다시 다른 사람의 가정을 깨트렸다고 지목받는다.

 

마청위는 홍콩의 은행가 마금찬(馬金燦)의 장남이다. 그의 처는 '소청(小靑)' 진미기이다. 관지림이 마청위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이미 결혼한지 여러 해가 되었고, 진미기는 임신한 상태였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관지림과 마청위의 불륜이 폭로된 후, 누군가 자주 진미기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를 괴롭혔다: "네 배가 부른 건 전세계가 안다. 너는 금방 남편에게 버림받을 것이다." 나중에, 진미기는 모친의 집으로 옮겨가서 거주한다. 그래도 그녀를 괴롭히는 전화는 끊이지 않았고 매번 전화목소리를 들으면 진미기는 심장이 배로 뛰었고, 20여일 후에 유산한다. 그후에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된다.

 

그때 관지림 진미기 마청위간의 일은 온 홍콩을 떠들석하게 만든다. 크고 작은 신문과 잡지에 모두 그들의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관지림은 만언서를 써서 극력 부인한다: "나는 일을 만드는 걸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나를 욕하는 전화를 너무 많이 받았다. 나는 한번도 전화한 적이 없고, 진미기를 욕하고 괴롭힌 적이 없다. 만일 내가 제3자라면, 내가 상대방의 집에 전화를 걸어서 그렇게 떠들겠는가."

 

그러나 관지림은 여전히 네티즌들의 욕을 얻어먹었다. "소삼(小三, 정부를 가리킴)은 교활한 변명은 그만둬라." 결국 진미기와 마청위는 이혼한다. 진미기는 인터뷰때 이렇게 말한다: "관지림이 다시는 '가정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때, 홍콩 연예게에서 관지림의 포지션은 여전히 "옥녀화병(玉女花甁)'이었다. 모든 감독이 그녀를 선택할 때는 그녀의 미모때문인 것이다.

 

1988년, 관지림이 처음으로 유덕화(劉德華)와 합작한다. 영화 <군룡탈보(群龍奪寶)>에서 '은막커플'로 나온다. 인터뷰때, 유덕화는 직접적으로 말했다: "관지림을 한번만 보면, 그녀와 결혼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해에 관지림은 미국의 <People Weekly>에서 선정한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뽑힌다. 그녀는 아시아 여성미의 모범이 되고, 홍콩매체조차도 그녀를 "정절향항(靚絶香港)"이라고 칭송했다.

 

누가 알았으랴. 다음 해, 관지림의 말은 다시 한번 전 홍콩을 뒤집어버린다.

 

1989년, 관지림은 황점(黃霑)이 진행하는 대담프로그램 <금야불설방(今夜不設防)>에 출연한다.

 

그때의 관지림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황점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활색생향(活色生香)의 대미인은 눈에서 전기가 나온다. 그녀가 한번 쳐다보면 10명이 남자들 중에서 11명이 어질어질해서 그녀를 짝사랑하게 될 것이다."

 

프로그램에서 황점은 관지림에게 이렇게 묻는다: "만일 누군가 당신과 연애만 하고 결혼은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떡하겠는가?"

 

관지림은 잠시 생각한 후 이렇게 말한다: "왜 나와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지, 그에게 부인이 있기 때문인가?" 황점은 그녀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것을 보고 다시 묻는다: "당신은 기꺼이 다른 사람의 정부가 될 생각이 있는가?"

 

당시, 관지림과 마청위(馬淸偉)간의 스캔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소문에 따르면 관지림이 끼어드는 바람에 마청위의 처인 진미기(陳美琪)가 유산을 했다고 했다.

 

관지림은 이렇게 대답한다: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도 사귀어 봤고, 결혼한 남자도 사귀어 봤다. 나는 하고 싶으면 한다. 나는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상대방, 상대방의 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고려할 것이다. 나는 그런 시간을 귀하게 여길 것이다. 다만 나는 더 뭘 바라는 것은 없다."

 

4

 

1991년, 서극(徐克)이 <황비홍(黃飛鴻)>을 찍으려고 준비할 때, 이연걸을 캐스팅한다. 이연걸은 흔쾌히 응한다. 영화에서 서극은 "십삼이(十三姨)"라는 배역을 추가했고, 이 배역은 미인이 맡아야 했다. 그래서 서극은 관지림을 고려한다.

 

그러나, 이연걸은 십삼이의 후보가 관지림이라는 것을 알자, 극력 반대한다.

 

이연걸은 이렇게 말한다. 관지림은 너무 예쁘게 생겼다. 무술신을 찍을 때, 그녀의 얼굴이 긁힐까봐 걱정해야 하고, 화장이 지워질까 걱정해야 한다.

 

다만 서극은 더욱 적합한 후보를 찾을 수가 없어서, 관지림에게 전화를 건다. "너에게 십삼이의 배역을 맡길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맨얼굴로 찍어야 한다." 관지림은 맨얼굴로 촬영하는데 동의한다.

 

<황비홍>이 상영된 후, 반응이 열렬했다. 관지림이 연기한 "십삼이"는 눈빛이 살아있고, 아주 아름다웠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관지림이 십삼이역을 잘 연기했다기보다 그녀가 바로 십삼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나중에 관지림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 맨얼굴로 촬영한 것은 서극 감독이 그녀의 눈이 충분히 커서, 화장을 하면 이미지가 맞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라고.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 인물의 이미지는 정말 너무 완벽했고, 이 역할로 관중들이 25년이나 기억하게 되었다.

 

10년만에 관지림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딸의 성취를 보면서 관산도 아주 기뻤다. 여러번 관지림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매번 관지림은 전화를 받으면서 차갑게 대했다.

 

더욱 관산을 힘들게 만든 것은 관지림의 연애소문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이 해에 관지림과 마청위는 7년만에 결국 헤어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지림은 친구들과의 모임에 갔다가 소개를 받아 당시 경제계에서 유명했던 부호 유란웅(劉鑾雄)을 만난다.

 

관지림은 이 부호에게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모임이 끝난 후, 그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란웅은 관지림의 미모에 반했고, 그녀를 쫓아다닌다. 자주 그녀를 만나러 오고, 그녀에게 꽃을 보내며 맹렬하게 대시했다. 관지림은 시종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경우가 너무 많았던 때문이다.

 

유란웅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혼자서 관지림의 모친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자신이 관지림을 사랑하고 그녀를 평생 돌봐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홍콩 Mid Levels(半山, 부호거주지역)의 760만홍콩달러짜리 저택의 열쇠를 그녀에게 건넨다.

 

그 말을 듣고 관지림은 마음이 약간 움직인다. 하루는 유란웅이 평소처럼 그녀를 만나러 왔고, 휴식때 유란웅은 전처와의 이혼서류를 관지림에게 건넨다. 유란웅이 하는 모든 것을 보고, 관지림은 마음이 움직였고, 이제서야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관산이 이 일을 알고는 다시 반대한다. 관지림을 찾아와서 유란웅에게서 멀어지라고 권한다. "유란웅은 플레이보이이다. 그는 여러 여배우들과 관계가 가깝다. 그는 너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관지림은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 "내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다. 유란웅은 나를 위해 많은 것을 내놓았다.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관지림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꿈꿀 때, 당초의 비극이 다시 그녀에게 닥친다.

 

유란웅의 열정이 지나가자, 다시 다른 여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관지림의 결혼요구에  응하지 않는다. 그리고 매체에서도 보도하기 시작한다. 유란웅이 이가흔(李嘉欣)과 사귀기 시작했다고. "관지림과 이가흔의 애정쟁탈전"이 신문을 가득 채운다.

 

더욱 대중을 놀라게 만든 것은 이런 소문이었다. 관지림은 유란웅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에게 골프공을 그녀의 하체에 넣게 하고, 2천만홍콩달러를 받았다는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관지림은 골프공을 넣고난 후 세인트메리병원에 가서 골프공을 꺼냈다는 것이다. 다만, 홍콩에 그런 병원은 없다. 그저 메리병원만 있을 뿐이다.

 

"골프공사건"은 관지림의 명성을 땅바닥에 떨어뜨린다.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관지림은 이렇게 말한다: "나와 유란웅은 인연이 있었다. 그러나 유연무분(有緣無分)이다. 나는 그에게 감사한다. 그는 내가 스스로에게 잘 대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평생 그 어느 남자도 나에게 그렇게 가르쳐준 적이 없다."

 

유란웅이후, 관지림의 애정생활은 상당히 조용해진다.

 

2001년, 관지림은 자신보다 2살어린 모델 황가낙(黃家諾)을 만난다. 두 사람은 3년후 헤어진다.

 

황가낙과 헤어진 후, 관지림은 연예계를 떠난다. 끝까지 그녀는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배역은 해본 적이 없다. 인터뷰에서 관지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발랄한 역할이나 악역을 연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감독들이 모두 나를 너무 아껴서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관지림은 가수로 발전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종성(李宗盛)이 냉정하게 말했다: "너의 목소리는 아직 잘 발육되지 못했다."

 

이때 관지림은 일과 애정을 모두 잃는다. 그래서 방구석에 쳐박혀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알게 되었다. 부친이 당초 했던 말이 맞았다는 것을.

 

다만, 관지림은 부친과의 갈등이 너무 오래되었고, 화해할 수가 없었다.

 

관지림이 망설이고 있을 때, 관산이 중풍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진니(珍妮)도 그를 떠나버렸다. 관지림은 부친의 집으로 가서 부친을 돌본다.

 

몸이 좋아지고 난 후, 관산은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사죄한다. "내가 당초 무책임했다. 그래서 네가 젊었을 때 그런 일을 겪게 만들었다.

5

 

2004년이후, 관지림은 오직 남자 한명만 있었다.

 

2007년, 홍콩 <일주간>은 관지림이 타이완의 10대부호중 한명인 진태명(陳泰銘)과 사귄다고 폭로한다. 관지림은 친구의 소개로 진태명을 만났고, 진태명은 비록 이미 결혼했지만, 관지림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맹렬하게 대시한다.

 

소문에 따르면, 관지림과 같이 지내기 위해 광동말도 공부했다고 한다. 수시로 꽃을 선물하고, 갖은 보석으로 그녀의 환심을 사려했다.

 

다만 진태명의 친구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관지림에게 선물을 보낸 적이 없다고. 진태명이 친구생일파티가 끝난 후 2차를 가다가 실에서 관지림을 만났고, 친구의 소개로 둘은 서로 인사한 적이 있을 뿐인데, 매체에서 사진을 찍혀 오해받게 된 것이라고.

 

진태명과 관지림은 동시에 성명을 발표하여 거짓보도이니 믿지 말라고 말한다.

 

2012년이 되어, 홍콩매체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파리를 여행하는 모습을 찍는다. 관지림은 나중에 두 사람이 생일축하하는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하여 관계가 공개된다.

 

그 후 두 사람에게서 혼인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3년후, 한 행사에서 기자가 관지림에게 묻는다: "소문에 따르면 부자인 남자친구 진태명과 냉전중이라는데, 당신들은 헤어진 건가?" 관지림이 말했다. "우리는 헤어진게 아니라 이혼한 것이다."

 

사람들은 깜짝 놀란다. 결혼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돌연 이혼한단 말인가. 관지림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태명은 공개적으로 말한다. 자신의 전처는 오직 원래 아이의 엄마 한명 뿐이라고.

 

소식통에 따르면, 관지림과 진태명은 몰디브에서 소규모혼례를 올린 적은 있다고 한다. 혼례에 참석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두 사람은 1년간 동거했는데, 혼인증명서를 받기도 전에 파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매체는 계속하여 그녀는 이미 늙었다고 보도하기 시작한다. "관지림의 미모는 이미 늙었다. 자식도 없다. 아주 비참하게 생활한다."

 

2005년, 관지림은 <강희래료(康熙來了)>에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나의 일생은 애정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2017년, 관지림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전의 행동을 후회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

 

관지림이 단신으로 돌아온 후, 스스로를 바꾸기 시작한다. 개인잠옷브랜드를 만들고, 스키, 요가등 자신의 버킷리스트 20개를 내놓는다.

 

원촨과 아안의 지진때, 관지림은 각각 200만홍콩달러를 기부한다. 그리고 부친의 명의로 구이저우에 관산소학을 설립한다. 관지림은 매년 시간을 내서 이 학교아이들을 보러 간다. 심지어 소문에 따르면, 자식이 없는 그녀는 자신이 죽은 후 재산을 모두 기부할 것이라고 한다.

 

다만 매체가 관지림에게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반쪽을 찾고 싶습니까"라고 묻자, 관지림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낙담하지 않는다. 계속 내가 좋아하고, 나를 아껴줄 사람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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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관지림의 부친 관산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관지림은 400만홍콩달러를 들여 선전 다펑만 화교공묘에 6인묘를 구매한다. 이 묘의 이름은 "대붕전시혈(大鵬展翅穴)"이다. 조부의 묘와 나란히 있다.

 

장례식날, 관지림의 남동생 관세화는 손에 부친의 영정사진을 들었고, 관지림은 선글래스를 끼고 곁에서 묵묵히 걸어갔다.

 

묘지에 도착하자, 한 풍수가가 손에 나침반을 쥐고 방위를 찾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물러나라고 하고, 관을 땅 속에 집어넣는다. 관지림과 남동생은 묘혈에서 망부의 관에 흙을 뿌린다. 관지림의 모친 장빙천은 시종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관지림은 묘앞에서 향불을 사르고, 절을 하며 다시 유엽수(柚葉水)로 손을 씻는다. 전체 장례의식이 끝났다. 그녀는 계속 눈물을 흘렸고, 코는 새빨갛게 되어서 오랫동안 서 있었다. 아무도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