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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아난다(阿難答): 중국역사상 유일한 무슬림황제가 될 뻔한 인물.

by 중은우시 2022. 9. 19.

글: 자귤(紫橘)

 

이슬람교는 중국의 중요종교중 하나이다. 회족은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다. 이슬람교는 오늘날 서북지구에서 극히 번성하고 있지만, 원나라이전에 서북은 실제로 '천리불국(千里佛國)'으로 칭해질 정도로 불교가 전파되는 중요한 교량이었다. 왜 불교가 서북에서 쇠퇴하고, 왜 이슬람교가 서북에서 크게 흥성하게 되었을까? 관건적인 인물은 몽골의 귀족인 아난다(阿難答)이다. 역사상 중국황제는 한족황제이건 소수민족황제이건, 대다수가 불교 혹은 도교를 신봉했다. 특히 몽골인은 불교를 가장 독실하게 믿었다. 다만 아난다는 몽골귀족중의 특이한 사례이다. 그는 이슬람교를 믿었고, 서북에서 이슬람교를 전파한 중요인물이다. 그리고 하마터면 중국역사상 유일한 무슬림황제가 될 뻔했었다.

 

1. 천리불국에서 이슬람교로.

 

지리적으로 보면, 서북은 신강, 감숙, 청해, 영하, 섬서의 몇개 성을 포함한다. 역사상 중국불교는 중앙아시아에서 신강을 거쳐, 감숙을 지나 관중으로 전해진다. 그후에 다시 중원으로 전해졌다. 그래서 서북, 특히 신강은 가장 먼저 불교를 접촉한 곳이고 서북은 불교가 특히 흥성했다. 신장은 천리불국이라고 불릴 정도이고, 감숙등지에는 무수한 불교명승이 남아 있다. 돈황은 불도(佛都)로 불린다. 막고굴(莫高窟)이 그 대표이다. 서하(西夏)가 서북에 할거할 때 그 통치자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 그래서 서북지구는 불교가 흥성했다.

 

이슬람교는 7세기에 탄생했다. 당나라시대인 7세기중엽, 이슬람교는 해로를 통하여 대식(大食)국의 상인들에 의해 중국연해의 천주(泉州), 광주(廣州)에 전해진다. 중국에서는 천방교(天方敎), 회교(回敎)라고 불렀다. 다만 이슬람교는 중국에서 그다지 흥성하지 못한다. 13세기에 이르러 서북의 불교가 쇠퇴하고, 이슬람교가 강력하게 발전한다. 지금 서북의 내륙은 이미 이슬람교가 흥성하는 지역이 되었다.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서북지구에 이슬람교를 전파한 핵심인물, 아난다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천주(泉州)의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청진사(淸眞寺)

2. 경건한 무슬림 아난다?

 

1264년, 원세조 쿠빌라이는 불교 고승 파스파(八思巴)가 조정에 들어왔고, 이때부터 불교는 완전히 몽골족의 종교신앙이 된다. 다만 몽골족들이 거족적으로 불교를 믿는 상황하에서 돌연 특이한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아난다이다.

 

아난다는 원세조 쿠빌라이의 적손(嫡孫)이다. 그의 부친은 쿠빌라이의 셋째아들인 망갈라(忙哥剌)이다. 망갈라는 안서왕(安西王)에 봉해지고, 왕부(王府)는 서안에 있었다. 지금의 영하, 감숙, 섬서등지를 관할했다. 프랑스인 폴 펠리오(중국명 伯希和)의 <다상몽골사(多桑蒙古史, Constantin Mouradgea d'Ohsson)>에서는 안서왕 망갈라는 저주를 받아 그의 자녀들이 모두 난장이였다. 저주를 풀기 위하여, 망갈라는 색목인 술사의 말을 믿고, 영아인 아난다를 메흐체르 하산 아흐타츠라는 돌궐인에게 보내어 기른다. 아흐타츠와 처인 주라이하는 모두 경건한 무슬림이었고, 무슬림가정에서 자란 아난다는 자연스럽게 이슬람교의 경건한 신자가 되고 <코란>을 읽는다.

 

3. 중앙정부와 결렬?

 

<다상몽골사>에 따르면, 1280년, 아난다는 제2대 안서왕에 오른다. 이때부터 아난다는 이슬람교를 널리 전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슬람교의 습속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린다. "몽골아동에게 할례를 행하게 명하고, 회교를 군대내에서 선전했다" 그의 이런 방식은 원나라중앙정부가 불교를 믿는 결정에 심각하게 위반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황제인 원성종(元成宗) 테무르는 흠차를 안서왕부(安西王府)로 보내어 아난다를 질책했다: "테무르는 사자 2명을 보내어 그에게 불교에 귀의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난다는 듣지 않는다. 그후 원성종은 아난다를 북경으로 불러, 면전에서 질책하지만, 그는 듣지 않는다. 아난다는 테무르에게 연금을 당한다. 그후 태후인 활활진(闊闊眞)이 "아난다는 당올(唐兀)의 땅에서 백성들에게 크게 신망을 받고 있는데, 그를 가두어두게 되면 민원이 발생할 것이니, 황제께서는 그를 풀어주어 안서로 돌아가 지키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보면, 아난다는 정말 경건한 무슬림이었다. 신앙을 위하여 목숨과 부귀영화까지도 버리려 했다. 즉 중앙정부와 맞선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정말 그러했을까? 아난다는 정말 신앙을 위하여 모든 영화부귀를 포기했던 것일까?

 

필자의 생각에 이후의 역사를 보면, 아난다는 야심이 컸고, 권모술수를 잘 썼다. 그가 이슬람교를 신앙한 것에는 물론 신앙의 측면도 있겠지만, 더 많은 것은 중앙정부의 반응을 살피는 것일 것이다. 중앙정부의 입장을 확인하고 중앙정부와 분정항례(分庭抗禮)하려 한 것이다.

 

첫째, 봉지에서 아난다는 둔전을 조직하여 민심을 크게 얻었고, 봉지의 식량은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둘째, 그는 이슬람신앙을 이용하여, 서북에서 불교를 억누르고, 대거 이슬람교를 선전한다. 이는 서북 이슬람교가 흥성한 시작이다. 이슬람신앙을 이용하여 그는 휘하 15만대군을 확고하게 장악한다. 그후 그는 권력을 확대하여 서북의 몇개 성의 군, 정, 재정, 감찰, 사법, 인사대권을 모조리 안서왕부가 장악한다. 서북천자(西北天子)의 모습이었다. 안서왕의 전성기에 세력은 한때 사천, 한중에 미친다. 이는 왜 태후 활활진이 원성종에게 아난다를 봉지로 돌려보내라고 권했는지에 대한 답이다.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면 서북이 전면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서북에서 기세를 탄 후에, 그는 적극적으로 중앙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적극적으로 고려승(高麗僧), 번승(番僧)등 불교도를 회유하고 심지어 고려공녀(高麗貢女)들과도 가까이 지낸다. 목적은 바로 북경궁중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두는 것이고, 경성의 동향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4. 중원을 노리고, 자칫하면 무슬림황제가 될 뻔하다.

 

원성종은 말년에 병은 많고, 자식도 없었다. 중앙정부는 모두 황후 복로한(卜魯罕)이 좌지우지한다. 이때 황위의 유력한 경쟁자는 원성종의 조카이자 막북의 변방군을 통제하는 해산(海山), 그리고 서북을 통제하는 아난다였다. 복로한은 해산과 원한을 진 적이 있어서, 1307년 정월 원성종이 죽자, 해산이 등극한 후 자신에게 보복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복로한은 즉시 아난다를 북경으로 오도록 부른다. 동시에 막북으로 가는 역참은 차단한다. 북경의 색목인 중에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를 신앙하는 회족관료들이 적극적으로 아난다의 즉위를 지지했다. 다만 마찬가지로 아난다가 이슬람교를 신앙하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더 많은 몽골귀족은 아난다를 싫어했다. 우승상 하라하손(哈剌哈孫)을 대표로 하여 해산을 적극적으로 옹립했다.

 

아난다가 먼저 북경에 도착한다. 기선을 제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해산은 아직 막북에 있었다. 하라하손은 급히 사람을 막북에 보내 해산에게 알린다. 그에게 하루빨리 준비하도록 권한다. 그후 해산은 화림(和林)에서 몽골귀족을 소집하여 대회를 열고, 원성종이 죽은 후, 황후 복로한이 비밀리에 장례도 치르지 않고 몽골의 법도에 따라 쿠릴타이대회를 개최하지 않고 권력을 장악하여 섭정을 함으로써 몽골의 법도를 어겼다고 성토한다. 화림의 대회에서 그는 대다수 몽골귀족의 지지를 받아낸다. 그후 해산은 북경과 연락하는 일부 몽골귀족을 숙청한다. 이렇게 자신 진영의 단결을 꾀하고, 여러 귀족들이 황제에 오르라고 권유하지만 그는 거절한 후, 3만대군을 이끌고 화림을 지키며 북경의 동향을 살핀다. 동시에 동생 애육려발력팔답(愛育黎拔力八答)을 북경으로 보내어 활동하게 한다.

 

장례에 참가한다는 명목으로 애육려발력팔답은 성공적으로 북경에 진입한다. 그후 애육려발력팔답의 운용하에, 북경의 친해산귀족들이 신속히 결집한다. 이때 아난다측은 황후의 지지하에 애육발력팔답의 삼월 삼일 생일때, 생일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모아 해산을 지지하는 귀족을 일망타진하고자 한다. 그러나 소식이 누설되어, 애육려발력팔답과 하리하손은 선발제인하기로 결정하고 하루 앞서서 정변을 일으킨다. 삼월 이일, 애육려발력팔답은 군대를 이끌고 황성으로 쳐들어가고, 아난다측은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생포되어, 화림으로 보내어진다. 역사에서 "대도지변(大都之變)"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그후 오월, 상도(上都) 개평(開平)의 쿠릴타이대회에서 몽골귀족은 일치하여 해산을 황제로 추대한다. 그가 원무종(元武宗)이다. 아난다는 사사당한다. 안서의 봉지는 공이 가장 큰 애육려발력팔답에게 넘겨준다. 애육려발력팔답이 서북으로 간 다음 아난다의 영향을 제거하는데 힘쏟고 이슬람교를 대거 탄압한다. 다만 이 떄는 바로 14세기초이고, 전체 세계역사의 큰 시각으로 보면, 이슬람교가 세계에서 크게 확장할 때였다. 즉 상승기였다. 미시적인 각도에서 보면 이슬람교는 아난다의 노력으로, 이미 서북에서 뿌리를 내렸다. 어느 한 사람의 숙청운동으로 끝나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난다는 비록 죽었지만 그의 뜻은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난다는 황위에 마지막 한걸음만 남겨두었다. 그는 중국역사상 유일하게 황위에 오른 무슬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방만하여 기회를 잃는다. 다만 아난다는 중국역사, 원나라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역사를 보면, 그는 중국의 이슬람교 발전에 거대한 역할을 했고, 이슬람교에서 아주 존경하는 몽골 무슬림이다. 원나라 역사를 보면, 그와 해산의 황위쟁탈전은 원나라건립후에 발생한 또 한번의 악성정변이었다. 그후 1323년 남파지변, 1328년의 양도지전의 선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