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황보용(皇甫容)
원나라는 원세조 쿠빌라이가 창건했고,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강역이 유라시아에 걸쳤던 왕조이다.
쿠빌라이는 일찌기 몽케칸의 명을 받아, 막남(漠南)의 한지(漢地)를 관할했다. 그때 사건담당관리인 아로와적(牙魯瓦赤)과 부지아(不只兒)등은 밀린 세금을 납부하도록 추궁하다가 하루에 28명을 죽인 적이 있다. 쿠빌라이는 이들을 질책하며 이렇게 말한다: "무릇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반드시 상세하게 조사한 후에 비로소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 지금 하루에 28명이나 죽였으니 분명히 무고하게 죽은 자가 있을 것이다. 장형에 처해도 될 경우에 참살을 한다면 그게 무슨 형법인가?" 당시 부지아는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1260년,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를 승계하고 형법을 개혁한다. 생사대권을 모조리 칸의 조정으로 회수했고 각지의 제후장관은 함부로 사형을 집행하지 못하게 했다. 쿠빌라이는 이렇게 말한다: "인명은 지극히 중요하다. 일단 처형한 후에는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다. 짐은 그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쿠빌라이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짐이 천하를 다스리는데에는 사람의 목숨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 무릇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재삼 증거를 확인하여 증거가 확실할 때 비로소 그를 처벌해야 한다."
쿠빌라이는 즉위초기, 어떻게 법을 집행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이는 초원문명과 중원문명이 관련되는 일이었고, 이때 세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나왔다.
첫째는 몽골귀족으로부터 나온 의견이다. 그들은 초원의 전통적인 관습법에 익숙했다. 자신의 관할영지의 범죄와 민사분쟁을 처리하고자 했고, 한족지역의 통일된 율법으로 범죄를 처벌하기를 원치 않았다.
둘째는 한족선비들로부터 나온 의견이다. 그들은 유가의 윤리도덕을 중시했고, 유가의 도덕이념을 죄인을 심리하는데 익숙했다. 법치의 방식이 아니라.
셋째는 금나라 유신들로부터 나온 의견이다. 그들은 금나라때의 엄격한 법률로 죄인을 징벌하기를 원했다. 도덕의 구속력은 중시하지 않았다.
이 세 가지 관점 중에서 쿠빌라이는 그 어느 것도 채택하지 않는다. 그는 덕치(德治)를 위주로 하면서, 법치(法治)로 보완하는 방식을 택한다. 쿠빌라이때 제정된 법률은 전체 국민에 대한 것이다. 황친국척부터 일반백성까지 전체적인 왕조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위주로 했다.
지원20년, 원나라는 <지원신격(至元新格)>을 제정한다. 이 법률은 비교적 전면적이었다. 여러 분야의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형벌조례는 지나치게 엄격하여, 쿠빌라이의 휼민인정(恤民仁政)의 강령에 위배되어 쿠빌라이의 불만을 산다. 그는 하영조(何榮祖)에게 이 율법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도록 명하고, 많은 형벌조례는 삭제하도록 한다. <지원신격>이 수정된 후, 쿠빌라이는 비로소 세상에 반포한다. 이 율법은 나중에 <대덕신률(大德新律)>이라 불린다.
중국고대에 초기의 형률에는 묵(墨), 의(劓), 월(刖), 궁(宮), 대벽(大辟)의 다섯가지 형이 있었다. 당태종때는 오형을 수정하여 태(笞), 장(杖), 도(徒), 류(流), 사(死)로 정한다. 원나라는 쿠빌라이때부터 원말까지 당태종시기에 제정한 오형을 그대로 썼다. 그리고 당태종시기에 채찍으로 등을 때리지 못하게 하여 수형자의 오장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하는 규정도 유지했다.
쿠빌라이는 가까운 신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짐이 분노하여 너에게 죄인을 죽이라고 말하더라도, 너는 절대 가서 죽여서는 안된다. 반드시 하루이틀 늦춘 다음에 다시 아뢰어라. 이런 말은 고대의 인자한 군주들이 한 적이 있다. 이런 건 옛 것이라고 버려서는 안된다."
<원전장(元典章)> 형부2 <금지참각혹형(禁止慘刻酷刑)>에는 명확하게 혹형의 사용을 금지했다. 그것이 자백을 실토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혹형과 고문을 하지 못하게 했다. 원문은 이러하다: "죄지유무(罪之有無), 하구부득(何求不得)"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어찌 조사해서 알아내지 못할 것인가?
당시 원왕조는 어느 관청이건 전부 혹형을 금지했다. 만일 관리가 이 규정을 위반하면 중죄로 처벌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했다. 각지의 관리들은 황상의 관인(寬仁)과 휼형(恤刑)을 받들어, 혹리가 횡행하고 날뛰던 옛기풍을 버려야 한다.
쿠빌라이는 흉금이 넓었고, 인자하였으며, 감옥에 갇힌 죄인들에게도 그러했다. 규정에 따르면, 형옥을 담당하는 관리는 사건을 심리할 때 반드시 신중해야 하며, 옥졸이 학대하는 것을 방지해야 했다. 죄인을 심문할 때 관리는 반드시 성의로 대해야 했고, 갇혀있는 죄인에게 만일 친척이 없거나, 친척이 가난하면, 감옥에서 반드시 범인에게 하루에 1되의 쌀을 주도록 했다; 그리고 3되의 양곡중에 1되의 양곡은 반드시 위에 부담을 주지 않는 좁쌀로 해서, 질병에 걸린 범인들에게 주도록 했다.
매년 겨울에 친척이 없는 죄인들에게는 감옥에서 반드시 양가죽겉옷과 바지, 양말을 제공해야 했고, 땔감과 풀도 주어 범인도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해야 했다. 유배된 죄수들에게도 관청에서 반드시 매일 쌀 1되를 주어야 했다. 만일 병을 앓으면 즉시 의원을 파견하여 치료해주어야 했다. 불행히 억울하게 재판을 받은 사람에게는 무죄로 판결나면 반드시 보상을 제공해야 했다.
지원12년, 쿠빌라이는 '등문고(登聞鼓)'제도를 설립하도록 명령한다. 억울한 백성은 어느 계층이건 모두 큰 북을 울려 직접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수 있었다. 이 제도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보고하는데도 도움이 되었고, 관리를 감찰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규정에 따르면, 태형과 장형의 횟수를 감경했다. 10을 7로 고쳤다. 예를 들어 50대의 장형은 47대의 장형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리고 범인이 장형을 받을 때 너무 굵고 튼튼한 몽둥이로 때릴까봐 장형에 쓰는 몽둥이의 너비도 규제했다. 만일 범인의 나이가 70이 넘었거나, 장애가 있거나 중병을 앓는 경우에는 장형을 쓸 수 없게 했다.
원나라에서 범인을 지나치게 관대하게 대하는 것에 대하여 대신들은 불만이 있었다. 황경2년 사월, 한 관리가 상소를 올려, 조정에서는 좋은 일을 하기 위하여 매번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죄인을 석방해주곤 한다. 이렇게 죄를 지은 나쁜 자들을 석방하게 되면, 피해를 입은 자들은 억울한 마음을 풀 길이 없고 오히려 조정이 법도가 망가지게 된다. 범인들도 습관이 되면 법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원나라때 사람인 섭자기(葉子奇)는 <초목자(草木子)>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나라는 세조이후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린지 6,7십년이 되었다. 형을 가볍게 하고, 세금은 적게 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있었고, 죽은 자는 묻힐 수 있었다. 만리를 가더라도 자기 집처럼 숙박할 수 있었다. 실로 태평성세라 할 만하다!"
<기문(紀文). 상대사농진소암서(上大司農陳素庵書)>에서 담천(談遷)은 이렇게 말했다: "당나라이래로 강남의 백성은 부유했다. 송나라때는 1무당 세금이 1말(斗)이었는데, 지금(원나라)은 세금이 1무당 3되(升)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원나라 중통,지원연간에 오중(吳中)지역은 부유하기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다. 명나라초기에 이르러 1무당 세금이 8말로 올랐다. 그래서 오중의 백성들은 원나라때 가장 즐겁게 살았고, 명나라때 가장 힘들게 살았다."
사료를 보면 원나라는 백성들에게 관대하게 대했고, 범인에게도 형벌을 감경해주었다. 또한 세금도 가장 적게 받아갔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원나라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인상은 독재, 잔혹이지만, 사료에 기재된 내용은 우리의 상상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아마도 역사의 진면목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필자도 원나라때 폐해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형벌이나 세금만 놓고 보자면 원나라의 관대함이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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