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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원순제(元順帝)는 어떻게 중원에서 쫓겨났는가?

by 중은우시 2020. 12. 14.

글: 문재봉(文裁縫)

 

토토(脫脫)가 축출되어 죽임을 당한 후, 원순제는 철저히 추락한다. 그는 하마(哈麻)에게 고혹되어 성색견마(聲色犬馬)에 빠진다. 궁중에 청녕전(淸寧殿)을 짓고, 청녕전의 주위에 백화궁(百花宮)을 지어, 매 5일마다 궁을 옮긴다. 조정은 황태자인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答臘)에게 맡겨버린다.

 

지정16년(1356), 하마는 원순제가 황위를 황태자에게 양위하도록 계획을 꾸민다. 그러나, 그의 매부인 투루테무르(禿魯帖木兒)가 원순제에게 밀고하여, 원순제가 대노하여, 하마를 쫓아낸다. 그후에 다시 박불화(朴不花), 삭사감(搠思監)이 조정을 교란시킨다. 역사서에는 "당시 천하에 사고가 많았는데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밖으로는 반란군이 일어나 강역이 날로 줄어들었고, 안으로는 국고가 텅비어, 쓸 곳에 돈을 줄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오락에 빠져 있고, 정무를 살피지 않았다." 당시 원나라는 이미 강산의 절반을 잃었다. 도성조차도 위기에 빠져 있었다.

 

지정18년(1358) 십이월, 원나라의 배도(陪都)인 상도(上都)가 파두반(破頭潘), 관선생(關先生)이 이끄는 홍건군(紅巾軍)의 공격에 함락당한다. 궁궐은 불에 탄다. 그후 원순제는 매년 상도로 가서 피서하던 전통을 중단한다. 지정18년, 지정19년(1359), 농민반란으로 조운(漕運)이 단절되고, 대도(大都)에서도 기근이 발생하여, 수십만명이 굶어죽는다. 이런 상황은 장사성(張士誠)이 원나라에 항복하면서 양식운송이 비로소 호전되게 된다. 지정20년(1360) 십이월, 막북의 양적왕(陽翟王) 아루휘테무르(阿魯輝帖木兒)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켜, 상도로 쳐들어 온다. 그리고 원순제에게 사신을 보내여 이렇게 말한다: "조상이 천하를 너에게 주었는데, 너는 어찌 절반이나 잃어버렸느냐? 국새를 나에게 넘겨라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 그는 다음 해에 진압된다.

 

이때 기황후(奇皇后)와 황태자는 점점 다른 생각을 품게 된다. 원순제로 하여금 양위하게 하려 한다. 그들은 선위음모를 반대하던 좌승상 하유일(賀惟一)을 죽이고, 환관 박불화, 승상 삭사감에 의지하여, 직언을 하는 진조인(陳祖仁), 이국봉(李國鳳)등 대신을 몰아내며 점점 조정을 장악해 나간다. 외부에서는 원나라조정이 의지하던 홍건군을 진압하는 주력인 차칸테무르(察罕帖木兒)와 보로테무르(孛羅帖木兒)의 두 군벌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중원의 백성들을 도탄에 빠졌다.

 

지정23년(1363), 황태자일당의 핍박을 받던 원순제의 외삼촌인 샤(沙)가 대동(大同)의 보로테무르에게 도망친다. 황태자일당은 보로테무르에게 샤를 내놓으라고 했으나 응하지 않자, 원순제에게 보로테무르를 토벌하자고 요구한다.

 

지정24년(1364), 사월과 칠월, 보로테무르는 두 번에 걸쳐 대도로 진격한다. 먼저 원순제에게 박불화와 삭사감을 내놓도록 압박하여, 그들을 죽여버린다. 그후에 다시 원순제로 하여금 자신을 우승상에 임명케 한다. 그리고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를 쫓아낸다. 황태자는 태원(太原)의 코코테무르(擴廓帖木兒)의 군영으로 도망쳐서, 원나라는 한때 2개의 조정이 존재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보로테무르가 권력을 장악한 초기에 투루테무르등 원순제를 황음에 빠지게 한 간신들을 죽이고, 궁안의 서번승려(西番僧侶)를 쫓아내며, 환관을 줄여서, 돈과 양식의 낭비를 줄여셔 한때 성적을 낸다. 그러나 나중에는 후궁에서 음란한 행동을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람을 마구 죽인다. 그리하여 황태자측이 다시 공격해 올 때 결국 패전하게 된다.

 

원순제도 보로테무르에게 불만이 컸다. 그리하여 위순왕자(威順王子) 화상(和尙)을 시켜 보로테무르를 암살하게 한다.

 

지정25년(1365) 칠월 이십구일, 보로테무르가 입궁했을 때 살수인 서사(徐士)등이 연춘각(延春閣)의 오얏나무 아래에서 암살당한다. 암살행동이 진행될 때, 원순제는 밀실 안에 숨어 있는다. 성공한 후에는 비둘기를 날려서 방울소리를 내기로 되어 있었다. 비둘기의 방울소리가 들린 후, 원순제는 밀실에서 나와, 보로테무르의 부하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라고 명령한다. 동시에 보로테무르의 수급을 상자에 담아서, 태원에 있는 황태자에게 보낸다. 지정25년 구월, 코코테무르는 황태자를 호송하여 대도로 보낸다. 원순제는 노신 백살리(伯撒里)를 우승상에 임명하고, 코코테무르를 좌승상에 임명한다. 이렇게 궁중의 내부투쟁은 일단 종결된다.

 

그후, 원순제는 코코테무르를 하남왕(河南王)에 봉하여, 남하하여 강회를 정리하도록 시킨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코코테무르와 이사제(李思齊), 장량필(張良弼)등 여러 군벌이 하남, 산서, 섬서 등지에서 혼전을 벌이는 국면을 초래한다.

 

원순제는 코코테무르에게 딴 뜻이 있다고 의심하여,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로 하여금 천하의 병마를 이끌게 하고, 대무군원(大撫軍院)을 열게 하여 코코테무르를 토벌하게 한다. 이런 군벌혼전은 대도가 함락되기 전날까지 지속되어, 원나라의 힘을 크게 약화시킨다.

 

원순제는 비록 흐리멍텅했지만, 국난이 닥치자 지정27년(1367) 비밀리에 고려의 제주도에 궁전을 건설한다. 나중에 도망갈 곳을 준비한 것이다. 원나라에 내란이 일어났을 때, 주원장(朱元璋)은 남방에서 힘을 키웠고, 진우량(陳友諒), 장사성, 방국진(方國珍)등의 군웅을 물리치고, 지정27년 십월 "구축호로(驅逐胡虜), 회복중화(恢復中華)"의 북벌전쟁을 일으킨다. 

 

지정28년(1368) 정월, 주원장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명(大明)이라 하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한다. 명군이 진격하니 파죽지세였다. 지정28년 윤칠월, 원순제는 코코테무르와 화해를 한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다. 지정28년 윤칠월 이십삼일, 명군이 직고(直沽)에 도착한다. 이십육일, 지추밀원사 보얀테무르(卜顔帖木兒)가 대도를 나와 명군을 맞아 싸우나. 생포되어 죽임을 당한다.

 

이십칠일, 원순제는 회왕(淮王) 테무르부카(帖木兒不花)를 감국(監國)으로 임명하고, 경동(慶童)을 중서좌승상에 임명한 후, 자신은 도망칠 준비를 한다. 태묘(太廟)의 패위도 수습한 후, 도망갈 때 가져간다. 이십팔일, 원순제는 대도의 청녕전으로 가서, 여러 신하들과 후궁, 그리고 황태자를 불러 모은 다음 정식으로 상도로 천도하겠다고 선언한다. 지추밀원사 하라장(哈剌章, 토토의 아들)이 극력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원순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也速)이 이미 패했고, 코코테쿠르는 멀리 태원에 있다. 어떻게 원병을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환관 조백안불화(趙伯顔不花)는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진언한다: "천하는, 대대로 조상의 천하입니다. 페하께서는 마땅히 죽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어찌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신등이 군대와 백성 그리고 케세크타이(怯薛歹, 친위대)를 이끌고 나가서 막겠습니다. 원컨대 페하께서는 경성을 굳게 지켜주십시오!" 원순제는 탄식하며 말한다: "오늘 어찌 다시 휘흠(徽欽, 송휘종과 송흠종, 북송의 마지막 황제)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밤, 대도 건덕문이 열리고, 원순제와 황태자, 후비 및 100여명의 대신은 상도로 도망친다. 원순제는 도망치는 길에 너무나 놀라서, 산사태까지 명군이 온 것으로 여겼을 정도였다. 팔월 십오일, 원순제 일행은 마침내 상도에 도착한다. 이전에 대도는 이미 팔월 이일 명군에 점령당했었다. 감국 회왕 테무르부카등은 순국한다. 원나라의 중원통치는 이렇게 끝났고, 북원(北元)이 시작된다.

 

원순제와 같은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좋을까? 그는 13살에 등극했고, 20여세가 되어서 비로소 조정을 장악했다. 이전에 원나라의 실제권력은 권신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원순제는 처음에 확실히 일을 하고 싶어했다. 그는 토토를 중용하여 개혁을 실시했고, 당시의 여러가지 현실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했었다. 나중에 친정한 후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효과가 크지 않았다.

 

원순제가 원나라의 운명을 바꾸어, 부흥시키지 못하고, 그의 조상인 징기스칸, 쿠빌라이같은 업적을 내지 못한 것은 그 자신의 자질과도 관계가 있다. 원순제는 비록 이상이 높았으나, 그는 권신들의 압박에 너무나 시달렸다. 현실생활에서 자주 고난을 겪는다. 비록 개인생명의 위협도 당했지만, 그 자신은 이를 바꿀 능력이 없었다. 이는 그가 이십여세때, 하마가 보내온 미녀를 보았을 때 신속히 타락한 원인중 하나이다. 그 근원을 추적해 보면, 원순제는 의지가 굳건한 제왕이 아니었다. 단지 어려서부터 권력을 빼앗긴 도련님일 뿐이었다. 공을 세우는 것도 좋고, 주색에 빠지는 것도 좋다. 결국 그가 한 모든 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다. 비록 행동할 때 사직과 창생을 생각하기는 했겠지만, 모두 일시의 충동일 뿐이다.그래서 그는 사치와 음락 속에서 조정을 싫어하게 되고, 그는 책임감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나라를 일으킬 중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어찌되었건, 군왕의 각도에서 보건, 사람됨의 각도에서 보건 원순제는 성공한 인물이 아니다. 군왕으로서 그는 충분한 재능이 없었고, 충분한 책임감도 없었다. 한 사람으로서, 그는 의심이 너무 많았고, 주색에 빠졌다. 실로 불합격의 군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