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진(李眞)
1989년의 천안문사태는 덩샤오핑, 리펑(李鵬)이 결정한 대도살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이 사태는 당시의 베이징시장 천시퉁의 책임이라고 선포한다. 천시퉁은 신소(申訴)도 소용없자, 책을 출간한다. 첫째 이유는 스스로의 무고함을 밝히려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자신의 부정부패혐의는 "장쩌민에 의해 뒤집어씌워진" 정치적 숙청의 결과라는 것이다.
"6.4천안문사태"때 베이징시장을 맡고 있던 천시퉁은 <천시퉁진술: 중구삭금난삭진(衆口鑠金難鑠眞, 많은 사람들이 애기하면 쇠를 녹여 없앨 수는 있지만, 진실을 녹여없앨 수는 없다)>라는 책을 출간한다. 이 책에서 전중공총서기 장쩌민이 부정부패죄로 그를 낙마시켰는데, 그는 부정부패혐의를 부인한다. 그리고 그는 부정부패혐의는 문혁이래 최대의 원안(寃案)이라고 말하면서, 전중공총서기 장쩌민이 그를 끌어내린 원흉이라고 암중 비판했고, "6.4천안문사태"의 책임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허수아비였다고 말한다.
책을 쓴 동기: 억울함을 호소
이 책을 쓴 사람은 자오쯔양의 지낭이었던 야오젠푸(姚監復)이다. 야오젠푸는 일찌기 국무원농촌발전중심, 중공중앙농촌정책연구원의 연구원이고, 병원에서 천시퉁과 8차례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고, 홍콩출판사에서 책으로 편찬하여 출간했다. 이 책의 출판을 책임진 바오푸(鮑朴)에 따르면, 이는 보기 드문 경우라고 한다. "6.4천안문사태"의 막후책임자로 지목된 사람이 직접 당시의 사정을 상세하게 토로한 것이기 때문이다.
야오젠푸는 해외중문매체의 기자가 책을 쓴 동기를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내 생각에 아주 간단하다. 이 어르신은 아주 억울하다고 생각했고, 호소하고자했다. 그는 부정부패하지 않았는데, 왜 부정부패죄가 되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가 억울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말을 받아적은 사람으로서 이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얘기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독자여러분들이 총명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이 판단해달라."
야오젠푸는 천시퉁 본인의 말을 인용하여, 그는 단 한푼도 부정부패하지 않았으며, 이는 문혁이래 최대의 원안이라고 말했다. "이 책안에 있다. 그가 말했다. 이것은 최대의 원안이라고. 정치국위원 중에서, (상하이시위서기) 천량위는 죄를 인정했다. 그는 인정하지 않았다."
천시퉁은 그가 이미 작고한 중공총서기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보다도 더 많은 죄를 받았다고 했다. "그들과 비교하면, 나는 그저 작은 인물이다. 다만 내가 직면한 불공정과 모멸은 더욱 심했다." 그는 말한다: "나는 계속하여 언젠가 그들이 잘못을 시정해줄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완고했다. 나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만일 최고인민법원이 나의 사건을 뒤집지 않는다면,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사법독립은 그저 헛소리에 불과하다."
한때 신소(申訴)에 기대했으나, 절망후 책을 출판하다.
관찰가에 따르면, 당시 천시퉁사건은 전 중공당수 장쩌민이 직접 지시한 것이다. 장쩌민이 왜 이렇게 그를 심하게 처벌했는지에 대하여 천시퉁은 알지 못한다: "장쩌민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양심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권력투쟁에 참가한 것도 부인했고 장쩌민을 반대한 적은 없다고 했다. 장쩌민이 그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그는 이런 옛말을 인용했다: "주의신사(主疑臣死, 주군이 의심하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다)" 그는 또한 당시 베이징시위서기 리시밍(李錫銘)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한다: 장쩌민은 정치사기꾼이고 투기분자이다.
아마도 천시퉁을 보호하려는 생각에서, 야오젠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이번에 책을 낸 것은 "그와 출판사의 생각"이라고. 천시퉁은 그저 그의 책출간에 동의했을 뿐, 구체적인 날짜는 모른다고. "그 본인은 이 책이 언제 출간되는지 몰랐다" 야오젠푸는 이런 말도 한다. 천시퉁이 처음 내건 조건은 2011년 12월 31일 전에는 책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부정부패사건에 대하여 최고인민법원에 신소를 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2012년이후, 그는 다시 천시퉁에게 책을 출간하는 일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천시퉁은 신소결과를 기다리자고 했다. 그러나, 신소에 대하여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그는 책을 출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전체적인 인터뷰과정에서 압력을 받지는 않았다고. 그리고 외부에 알려지지도 않았다고. 이 책은 단지 두 사람의 8차례에 걸친 대화내용을 담고 있다. 쌍방은 모두 십여차례 대화를 나누었다.
천시퉁: 나는 장쩌민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숙청당했다.
천시퉁은 1991년 7월부터 1994년 11월까지, 대외교류과정에서 귀중한 선물 22건을 수수하여 인민폐 55.5만여위안의 뇌물을 받았다고 기소당했다. 천시통은 이로 인하여 유기징역 13년형을 받았고, 그외에 직무소홀죄로 4년형을 받았다.
천시퉁은 말한다. 16년전의 그에 대한 부정부패죄는 "문혁이래 최대의 억울한 사건"이라고. 그는 장쩌민에게 정치적숙청을 당한 피해자라고.
그는 말한다. 당시 그가 뇌물을 받았다고 하는 사건은 외국의 정계요원로부터 받은 선물을 베이징인민예술극원(BPAT)에 넘겼는데, 실제로 이는 장쩌민의 지시였다고 한다: "하루는 장쩌민이 베이징인민예술극원을 시찰했다. 그들의 자금이 부족한 것을 보고 그는 사람을 시켜 나에게 서신을 보냈다. 나에게 인민예술극원을 도와주라고 한 것이다."
천시퉁은 마침 홍콩에 갔고, 홍콩의 부호들로부터 기부를 받았다. 그는 당시 1억위안을 모아서 극원에 발전기금을 설립할 생각이었다. 그는 외국정계요인들로부터 받은 선물도 그 기금에 기증할 생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규정에 따라, 우리는 선물을 자선기구에 기부하기도 하고, 정부에 바치기도 한다. 내가 한 것은 완전히 합법적인 것이고, 모두 적절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영수증도 있다."
천시퉁은 이들 선물을 사무실에서 가치평가했으며,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천시퉁은 인터뷰과정에서 권력투쟁에 참가한 것을 부인했다: "권력투쟁과정에서, 무슨 일이든 발생할 수 있다. 상대방에게 온갖 비열한 수단을 서서 권력을 탈취할 수 있다."
어떤 관찰가는 이렇게 말한다. 천시퉁은 당시의 국가주석 장쩌민에 반대했고, 그리하여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6.4천안문사태의 비극은 "피할 수 있었다"
천시퉁은 1989년 "6.4천안문사태"때 베이징시장을 맡고 있었다. 학생들과의 대화에 참여했고, 1992년 베이징시위서기로 승진한다.
"6.4천안문사태"가 진압된 후, 천시퉁은 베이징시장 겸 국무위원의 명의로 전인대상무위원회에 <동란을 제지하고 반혁명폭란을 평정한 것에 관한 상황보고>를 하여, 학생운동을 '폭란'으로 규정하고, 당국의 진압을 '폭란평정'이라고 칭했다. 이 보고서는 100만부가 인쇄되어 전국각지에 전달된다. 이는 천시퉁을 "6.4천안문사태"의 원흉으로 보는 역사적 증거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천시퉁은 이렇게 해명한다: "당중앙에서 나에게 보고서를 쓰라고 했다. 내가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 보고서에 대하여 나는 단 한글자도 토론에 참여하지 못했고, 부호 하나도 고칠 수 없었다. 다만 내가 책임을 진 것이다."
천시퉁의 말투를 보면, 천시퉁은 당시의 진압이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게 분명했다. 이는 리펑이 <일기>에서 기세등등하게 기염을 토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다만 "다만 내가 책임을 진 것이다"라는 말애서는 천시퉁이 어느 정도 참회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야오젠푸는 천시퉁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은 시장으로서, 시민들이 무고하게 죽었는데 어떤 느낌입니까?" 천시퉁이 대답한다: "시장으로서 나는 괴로웠다...만일 잘 처리했더라면, 한 사람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날 수백명이 죽었다." 야오젠푸는 지적했다: 6.4천안문사태에 대한 인식에서 천시퉁은 여전히 '집정자의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그러나 대화과정에서, 천시퉁의 '인간성이 회복되고 고민하는 모습'이 나타났다고 한다. 천시퉁은 말했다: "6.4사태를 회고하면서 나는 피할 수 있었다고 본다. 피했어야 했는데 피하지 않은 비극이다."
마찬가지로 당시의 진압자이면서 "6.4참극"을 애기하면서, 천시퉁과 리펑은 전혀 다른 어조였다. 이는 대체로 천시퉁이 당한 처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진압의 '공신'으로, "6.4사태"이후 천시퉁은 베이징시위서기, 정치국위원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쩌민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부정부패죄'로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16년형을 받는다. 잘나가는 고관에서 죄수로 전락한 것이다. 천시퉁은 거기에서 인생무상을 느꼈고, 이 점은 리펑이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
"6.4천안문사태"에 대하여, 외부에 널리 알려진 것은 덩샤오핑의 심복인 천시퉁이 덩샤오핑에게 "상황을 거짓보고"하고, "학생운동의 심각성을 과장보고하여 덩샤오핑으로 하여금 진압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천시퉁은 이렇게 변명한다: "덩샤오핑은 보고 듣는 것이 많다. 그를 어떻게 속이겠는가? 거짓보고라는 말은 덩샤오핑을 너무 쉽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천시퉁은 이런 말도 한다: "덩샤오핑의 집에 가본 적은 전혀 없다."
천시퉁은 동시에 책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자신은 "6.4천안문사태"에서 단지 허수아비였다고. 천시퉁은 자신이 "베이징계엄지휘부총지휘"라는 것을 부인한다. "2010년에 <리펑일기>를 보고서야 비로소 내가 총지휘라는 것을 알았다. 89년때 리펑이 왜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을까? 리펑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에게 물어볼 것이다. 왜 나에게 일찌감치 말해주지 않았는지?"
이 모순에 대하여 어떤 평론가는 아마도 덩샤오핑과 리펑이 "계엄지휘부"를 만들고 직무를 나눠주었지만, 명확하게 통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당시 덩샤오핑, 리펑 두 사람조차도 계엄과 진압이 성공할 수 있을지 완벽한 자신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의로 말을 두리뭉실하게 했다: 더 가능성이 많은 것은 당시 중공내부는 혼란에 빠져 있어서, 도대체 누가 계엄총지휘에 임명되었는지도 불명확한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소리 보도에 따르면, 당시 직접 6.4에 참여하거나 그 사건에서 가족을 잃은 당사자들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천시퉁이 그 사건에서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천안문모친"이라 불리는 딩쯔린(丁子霖)은 6.4 그날 그녀의 아들을 잃었다. 그녀는 미국의 소리에 이렇게 말했다: "천시퉁에게는 천시퉁의 죄가 있다. 당시의 베이징시장으로서 그와 리시밍은 학생들이 단식을 할 때, 그들은 당중앙에 매일의 대사기(大事記)를 보고했다. 내가 직접 귀로 들은 것은 시위서기 리시밍과 시장 천시통이 당중앙에 보고한다는 것이다. 그외에 당시 교위의 허동창(何東昌)이 있었는지...그들 3명이 한패이다."
6.4의 당사자이자 베이징의 대학교사인 우런화(吳仁華)도 미국의 소리에 이렇게 말했다: "천시퉁은 허수아비가 아니다. 그는 주요책임자이다. 학생운동이 시작되자, 그는 사람을 보내어 학생의 대자보에서 자료를 수집했고, 심지어 사람을 보내어 대자보를 수거해갔다. 그들은 게속 이런 자료를 리펑에게 보냈고, 그후 리펑이 다른 중앙지도자들에게 보냈다. 아주 분명하다. 그래서 진압방식을 취한 것이고, 학생운동을 확실하게 짓밟은 것이다."
오직 3명만이 천시퉁이 장쩌민을 고발하는 서신을 보았다.
<장쩌민 그 사람>이라는 책에 따르면, 1989년 "6.4.사태"로 최고지도자에 오른 장쩌민은 군대가 단한번도 총을 들어본 적이 없는 군사위주석인 자신을 따르지 않을까봐 겁냈다고 한다. 당시 덩샤오핑은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장쩌민은 14대(1996년)때 군대핵심에서 양씨형제를 쫓아내고, 자신의 심복을 대거 심는다. 그후 장쩌민은 창끝을 베이징시라는 이 중요한 정치적 진지로 향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천시퉁은 덩샤오핑과 관계가 아주 좋았다. 장쩌민이 베이징으로 발탁되어 오자, 천시퉁은 마음 속으로 불만이었다. 그리고 장쩌민을 무시했다. 1995년초, 천시퉁은 각성급의 간부들과 연합하여, 덩샤오핑에게 연명으로 장쩌민을 고발하는 서신을 보낸다. 다만 덩샤오핑은 서신을 보이보(薄一波)에게 넘긴다. 그리고 보이보에게 자신이 발탁한 장쩌민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게 한다. 그런데, 보이보는 장쩌민을 불러서, 경위를 알려준다. 장쩌민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고, 몸을 전율했다. 결국 보이보와 장쩌민은 거래를 한다. 보이보는 장쩌민을 도와 천시퉁을 끌어내려주기로 한다. 그는 주위부터 손을 쓰기 시작한다. 반대급부로 장쩌민은 보시라이와 심복들을 승진시켜준다.
보이보는 사람을 끌어내리는데는 도사이다. 천시통의 이 고발서신을 보자, 보이보는 장쩌민의 약점을 잡았다고 좋아했다.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장쩌민을 협박헤서 아들과 심복들을 승진시킬 수 있겠다고 여긴다.
그래서, 보이보는 천시통의 고발서신을 장쩌민에게 보여준 것이다. 장쩌민은 보이보에게 애걸한다. 덩샤오핑의 앞에서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서 총서기의 직위를 보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보시라이가 관료로서 잘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친 보이보의 손에 천시퉁이 덩샤오핑에게 보낸 장쩌민의 고발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단지 4명만이 알고 있다: 천시퉁, 덩샤오핑, 보이보 그리고 장쩌민. 장쩌민은 그리하여 천시퉁을 사지로 몰게 된다.
그 후에 셔우강(首鋼)의 전 동사장 저우관우(周冠五)가 1995년 경제문제로 낙마하고, 그의 아들 저우베이팡(周北方)은 체포된다. 저우베이팡과 관계가 밀접했던 덩즈팡(鄧質方)도 이후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베이징시 비서그룹의 뇌물수수사건도 발생한다. 부시장 왕바오썬(王寶森)은 같은 해 4월 베이징교외 화이러우현(懷柔縣)의 한 산에서 정부공식발표에 따르면 권총자살을 한다. 실제로는 현장의 발자국, 총구, 화약, 탄피등의 단서로 보면, 왕바오썬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 국가안전부의 내부소식에 따르면, 장쩌민이 보낸 국가안전부문의 요원이 한 일이다.
왕바오썬의 죽음은 CCTV를 통하여 대거 방송되고, 천시퉁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저우베이팡이 형을 받고, 덩샤오핑도 자신의 후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일 장쩌민과 척을 지게 되면, 덩씨집안의 후손들이 장쩌민에게 숙청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시퉁은 자신이 이번 겁난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만 장쩌민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찾아낸 증거는 겨우 천시퉁이 "1991년 7월부터 1994년 11월까지 대외교섭중에 받은 귀중한 선물 22건(그중 금은제품 8건, 명품시계 6개, 명품만년필 4개, 사진기 3대, 촬영기 1대가 있다), 모두 인민례 55.5만위안어치였다" 이는 정치국위원급의 지도자에게 있어서 실로 아무 것도 아닌 수준이다. 그는 '청렴'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천시퉁은 이것때문에 감옥에 들어간다. 부정부패로 13년형을 받고, 직무소홀죄로 4년을 받았다. 두 죄를 병과하면서 형기는 유기징역 16년이 된다. 1995년 천시퉁은 당내직위를 박탈당하고,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하고, 1998년 천시퉁은 16년형을 받는다. 전해에 천시퉁의 아들 천샤오퉁(陳小同)은 뇌물수수죄로 12년형을 받는다. 2004년 천시퉁은 병보석으로 풀러난다. 판결문에 따르면, 천시퉁은 2013년 8월 1일 정식 출감하도록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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