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자주한관' 정책의 한계성
비록 명청정부의 '자주한관'정책은 외래침략을 방어하는 일면이 있고, 중외교류를 가로막지는 않았지만, 이 정책이 완전히 정확했다는 말은 아니다. 반대로, 그 한계성은 아주 분명하다. 주로 두 가지 방면에서 나타난다: 한편으로, 소극적인 방어가 주도적인 지위를 점한다. 16-19세기 서방식민침략세력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계속 중국의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데, 명청통치자들은 이 역사적 대변국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이나 과학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전통의 조공체계에 만족하면서, '천조상국(天朝上國)'으로 자처했고, 마음 속으로 대외왕래를 제한하거나 감소시키면 천하태평이 올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다. '일구통상'이후 거대한 이익을 얻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해금을 실시한 후 잠깐동안의 안녕은 청명통치자들로 하여금 정책이 가져다주는 이득에 혼자 희희낙락하게 만들었고, 스스로 '한관'으로 서방인의 침입을 해결하고 강산을 안정적이고 공고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모르고 있었던 것은 자주한관은 본질적으로 소극적 방어에 속하는 것이며, 주도적이거나 장기적이거나 전면적인 조치가 못되었다는 것이다. 자주한관은 결국 효과적인 방어목적도 달성하지 못한다. 한관은 그저 단기간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해주었을 뿐, 근본적으로 식민침략을 저지하지 못한다. 한관은 단지 짧은 기간동안 숨을 쉬게 해주었을 뿐 장기적인 안정국면은 가져다주지 못했다. 한관은 그저 일시적인 이익만 얻을 수 있었을 뿐, 지속가능한 성장은 얻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명청의 대외관계에서 중국이 계속하여 피동적인 지위에 처하고 힘들게 대응해야 했으며, 한동안 '다구통상'을 하다가, 다시 한동안 '일구통상'을 하는 등 관리조치가 번잡했다. 소극방어로는 어쨌든 중국과 서방의 역량대비를 바꿀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서방의 선진적인 과학기술에 대하여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리하여 군사와 기술에서의 낙오가 더욱 분명해진다. 엥겔스는 일찌기 '단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차같은 하나의 과학적 성과는 그것이 존재한 첫 50년간 세계에 가져다준 것이 세계가 최초부터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치른 댓가보다 훨씬 컸다." 산업혁명은 유럽의 과학기술에 대변혁을 가져다 주었을 뿐아니라, 철저하게 유럽과 중국의 역량대비를 바꾸어버린다. 강건시대, 청나라조정은 비록 유럽식민침략의 위협을 인식했고, 마음 속으로 경계심을 품고 있었고, 서방이 적지 않은 분야에서 중국을 앞서간다는 것도 깨달았지만, 묵수성규(墨守成規)의 보수적관념, '불귀이물(不貴異物)'의 진부한 사상이 서방과학기술에 대하여 충분히 민감하게 느끼지 못했고, 서방과학기술지식을 받아들이는데 조심하고 의심스러워하며, 진전이 느렸다. 사실상 강희제는 서방과학기술을 열심히 학습하고 연구했으며, 여러 방면에서 중국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고보자봉(固步自封)하고, 이런 지식을 전파하거나 보급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역량을 조직하여 이런 지식을 더욱 풍부하게 발전시키지 않았다.
18세기 후반, 청나라조정은 이미 서방과학기술이 중국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건륭제는 영국인이 "해로를 잘 알고, 항해를 잘한다"는 것을 알았다. 1793년 매카트니사절단이 중국으로 온 후, 그는 직접 영국인이 가져온 선물을 보았고, 그들의 발달한 과학기술에 깜짝 놀란다. 특히 110문대포를 장착한 황실군함모형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는 "상세하게 당시 설치를 도운 사절단인원에게 군함의 여러 부품에 관한 문제 및 영국의 조선사업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를 물어본다." 건륭제의 황자도 "외국사물에 대해 즐겨 물어보았고, 외국의 과학발명에 대하여 흥취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런 흥취는 시종 인식층면에 머물렀다. 학습, 연구하는 조치까지는 가지 못했다. 청나라조정은 유럽의 계속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날로 선진화하는 '견선리포(堅船利炮, 튼튼한 배와 날카로운 대포)'를 보면서도 진취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여, 과학기술과 군사장비가 날로 낙후된다. 그리하여 근대중국은 피동적으로 얻어맞는 국면이 연출된다.
역사를 형량하는 것은 반드시 당시의 특정환경을 고려해야 해서, 후인들이 전인들에게 가혹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청나라때의 저명한 사학가 전대흔(錢大昕)은 역사를 평가할 때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역사는 일가(一家)의 책이 아니라, 실은 천년(千年)의 책이다." 일부 학자들이 '연대를 고려하지 않고, 시세를 살펴보지 않고,억지로 그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했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비난을 하는 것은 기준을 너무 높게 잡은 것이고, 너무 가혹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의 말은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근대중국이 낙후하고 얻어맞은 역사에 대한 책임을 모조리 청나라정부에 떠넘길 수는 없다. 근대중국이 서양과 발전의 차이가 커진 것은 단순히 명청시대 대외정책이라는 단일요소때문만은 아니고, 그것은 중외역사의 기나긴 과정중에서, 각국발전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필연적 결과였다. 또한 봉건제도의 뿌리깊은 문제로 인한 필연적 결과였다. 명청시기의 사상의식, 사회제도, 내외정책등 여러 요소가 상호작용한 필연적 결과이지 단순히 어느 한 층면에서 분석하고 설명한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명청 두 왕조의 통치자들은 근대중국의 낙후에 떠넘길 수 없는 역사적 책임이 있다. 역사는 다시 한번 하나의 기본적인 철칙을 증명한다: 옛것을 고수하고 사상을 해방하지 않고, 포잔수결(抱殘守缺)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지 않고, 묵수성규하면서 용기있게 개혁하지 않으면, 국력이 쇠락하고, 사회는 정체되며, 백성은 도탄에 빠진다. 역사조류에 순응하고, 적극적으로 변화하며, 주도적으로 변해야 비로소 시대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조정은 서방종교, 사회제도를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동시에, 서방의 선진과학기술을 '기기음교(奇技淫巧, 괴상망측한 기교를 부려 지나치게 공교로운 물건을 만들다)'로 보았다. 예를 들어 군함대포같은 '전쟁에서 승리를 취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를 문안으로 들이지 않고, 실제로 시대발전의 반대편에 섰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자주한관은 합리성도 있고, 일정한 정도로 서방식민주의자들의 피비린내나는 확장의 발걸음을 지연시킨 점도 있다. 자주한관에는 선천적인 결함이 있다. 농후한 수성성(守成性)을 지녔을 뿐아니라, 아주 강한 보수성(保守性)을 지녔다. 전자는 명청통치자의 맹목적인 자아과대평가로 나타나서, '천조상국'의 위세를 지키기만 하면 외래의 충격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후자는 명청통치자들의 고보자봉으로 나타나서, 단순하게 어느 정책의 조정만으로 모든 외래의 위협을 막아내려 하였다. 사실상, 자주한관은 그저 잠깐동안의 효과와 일시적인 안정을 가져다 주었을 뿐이다. 근본적으로 명청왕조의 운명과 중국사회의 방향을 바꾸지 못했다. 더더구나 서방식민주의자들의 탐욕스러운 본성과 중국을 노리는 야심을 바꿀 수 없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날로 강대해진 서방식민주의자들이 중국을 침략하려는 욕망이 날로 팽창할 때, 가경제, 도광제 두 황제의 정치적 부패는 날로 심해지고 있었다. 자주한관을 더 이상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더더구나 청나라조정의 통치를 지탱하기도 힘들었다. 중국은 반식민반봉건사회의 고난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된다.
결론
보수, 낙후, 봉쇄는 명청시기 중국사회의 주요내용이 아니다. 또한 명청시기 대외교류의 전모도 아니다. 명청사회를 "폐관쇄국"라는 말로만 레테르를 붙일 수는 없다. 16-18세기 적지 않은 서방사회의 엘리트들이 보기에 중국은 고도의 정치문명을 지닌 예의지국이었다. 문명지혜와 도덕질서의 모범이었으며, 동방문화가치체계는 볼테르등 계몽사상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다. 심지어 그들이 신사상을 선전하고, 구제도를 비판하는 중요한 무기가 된다. 그외에, 차, 도자기등 중국상품은 유럽사회생횔에 심원한 영향을 끼친다.
명청시기, 중국의 서방에 대한 영향은 광범위했다. 세계에 대한 공헌도 거대했다. 이는 존중받아야할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19세기 중국의 이미지는 서방에서 바뀌게 된다. 이는 쌍방간의 역량대비의 결과이기도 하고, 서방정치가, 문인, 학자들이 편견에 사로잡혀 일부러 이미지를 조작한 결과이기도 하다.
명청역사는 중국역사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사회제도이건, 대외정책이건,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우월한 점도 있고, 열악한 점도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썩어빠지고 몰락한 봉건제도, 봉건예교를 찬양할 수도 없고, '폐관쇄국'이라는 말로 명청역사가 중국과 세계에 미친 의의를 모조리 부정할 수도 없다.
'중국의 역사논쟁 > 폐관쇄국논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연구원의 "폐관쇄국유리론"을 비판한다. (0) | 2022.09.08 |
---|---|
역사연구원의 "폐관쇄국유리론"을 반박한다. (0) | 2022.09.08 |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자주한관(自主限關)정책하의 대외교류 (0) | 2022.09.08 |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명청시대 중앙정부의 대외정책 (1) | 2022.09.08 |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 명청시기의 중국과 서방 (0) | 2022.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