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논쟁/폐관쇄국논쟁

역사연구원의 "폐관쇄국유리론"을 비판한다.

중은우시 2022. 9. 8. 22:05

글: 욱풍(郁風)

 

최근 <중국역사연구원과제죄: 명청시기"폐관쇄국"문제신탐>이라는 제목의 글이 인터넷에 널리 퍼지고 있다. 문장의 결론은 전통적인 "폐관쇄국으로 중국이 근대에 낙후되었다"는 관점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특정시기 유럽중심주의영향하의 문화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 정책은 반침략, 반식민, 반해외적대세력간섭, 반문화침투의 적극적인 작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장의 원문은 이러하다: "우리는 명청시대의 중앙정부가 취한 것은 '자주한관'의 대외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각도에서 보자면, 개방할 것인지 말 것인지, 어떻게 개방할 것인지, 개방범위는 얼마나 넓힐 것인지는 국가주권범위에 속한다. 국내외의 일부학자들이 간단하게 그것을 '낙후'하다고 배척하고, '야만'스럽다고 질책하며 심지어 소위 '국제법'에 위반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근거가 없다."

 

검색해보니 이 글은 금년 6월말에 간행물에 실렸고, 당시에는 그다지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8월 24일 역사연구원이 전문을 인터넷에 올린 후에는 일석격기천층랑(一石激起千層浪)하게 되었다. 현재의 국면을 고려하면, 이 글의 뜻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폐관쇄국'정책을 미화, 찬양, 합리화함으로써 이론과 역사적 근거를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교과서에 여러 해동안 들어가 있는 '폐관쇄국론'을 뒤집고, 긍정적인 '자주한관'으로 미화하려면 어쨌든 견실하고 확실한 역사적사실이 받쳐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글을 다 읽어보아도, 기본적으로 무슨 새롭거나, 설득력있는 사료는 내놓지 못했다. 그저 대량으로 '모 역사학자는 생각한다' '모학자가 지적했다'는 정도의 '논거'만 있을 뿐이다.

 

논리학적으로 자주 볼 수 있는 오류는 '권위에 호소'하거나 '전문가에 호소'하는 것이다. 즉 어느 전문가의 말로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다. 사실 자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에서 적지 않은 학자들의 관점을 실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논리이건 사실이건 모두 글의 관점을 논증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에 호소'하는 외에, 이 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단은 기존의 사실을 왜곡, 이용하거나 혹은 '용어해석권쟁탈'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에는 원래 '폐관쇄국'이라는 단어가 없다든지, 이 단어는 외래어가 합쳐져서 생겼다든지, 그 자체가 인위적이고 주관적인 색채를 띄어서, 서방의 '중상모략'이고 특정시대 '유럽중심주의'영향의 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쁜 해석을 좋다고 하거나 혹은 나쁜 해석을 '오해'라고 하거나,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는 결국 누가 역사를 장악하면, 그가 현재를 장악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간단하게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비판해보겠다:

 

서문에 '학술계를 점거한 주류관점은 명청시대중앙정부는 '폐관쇄국'정책을 취했다. 즉 압박을 받아(被迫) 전면적으로 나라의 문을 걸어잠그는 정책을 실시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먼저, 학술계의 주류관점은 폐관은 만청통치자들이 스스로 취한 정책이라는 것이다. '압박을 받아' 한 것이 아니라. 다음으로, '압박을 받아'는 도대체 어디서 온 말인가? 서방국가가 원한 것은 개항이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압박을 받아' 했다고 하면서 폐관은 어쩔 수 없이 나라를 위해 선택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제1단에서 '왕굉빈은 자세한 고증을 통해, 건륭제는 '강해관, 민해관, 절해관의 3해관을 폐쇄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고 하고, 제4단에는 더 나아가 '사실상 광주 일구통상으로 한정했지만, 서방각국상인이 기타 삼구로 가서 통상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세한 고증'은 무엇이고, '사실'은 무엇인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1757년 건륭제는 명확하게 조서를 내렸다. "영행문해국번상(令行文該國番商), 편유번상(遍諭番商), 사후구안정어광동(嗣後口岸定於廣東), 부득재부절성(不得再赴浙省)" 그리고, 광주도 청나라조정은 엄격하고 가혹한 관리통제조령을 내린다.

 

<방범이상규조(防範夷商規條)>등 조례는 서양상인은 획정된 십삼항구(十三行區)에만 머물 수 있고, 청나라병사가 엄밀하게 지키며,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다. 그리고 겨울에는 떠나야 한다.서양인은 마음대로 중국인과 교류할 수 없고, 가족을 데려올 수 없고, 중국어를 학습할 수 없으며, 공을 찰 수도 없다. 서양상인은 또한 각급관리에게 선물과 뇌물을 주어야만 항구에 배를 댈 수 있었다. 

 

이런 제한조치에 대하여 이글의 해석은 이러하다: "경제적으로 대외무역구역을 제한하여, 유효하게 관할할 수 있게 하였다." "외국상선과 상인의 불법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아예 외국인을 오지 못하게 하는게 낫지 않겠는가.

 

제4단은 이렇게 말한다. "명나라때의 해금정책은 본국인민을 겨냥한 것이고, 목적은 적대세력이 대륙에서 물자보급 및 정보를 획득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다. 해외각국을 겨냥한 것은 아니며, 더더욱 의식적으로 폐관쇄국한 것은 아니다." 이건 자체적으로 모순이다. 해금의 목적이 백성이 침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면, 왜 적을 막는 것처럼 본국인민을 방비하는 것인가? 

 

이 글은 "한관은 자주적행위이다. 그 동기는 국토안전, 문화안전을 보호하고, 외부의 침입에 직면하여, 특히 서방식민침략위협에 직면하여, 방어적 자아보호책략을 취한 것이다." 다만 '폐관'이건 '한관'이건, 목적이 도대체 국가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가, 애신각라일가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것인가. 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청나라조정은 "한족에 대한 방비를 오랑캐에 대한 방비보다 심하게 했다(防漢甚於防夷)" 청나라조정은 온갖 방법으로 중국인이 서방과 교류하는 것을 막았다. 그것은 서방의 사상, 종교, 과학기술문화가 국내로 전파되어, 중국인의 시야를 넓히고, 자유사상이 나타나서, 반항정서가 생겨날 것이 겁났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이 발발했을 때, 청나라조정은 비록 80만상비군이 있어, 세계최대규모였지만, 영국군의 해군까지 해서 불과 2만명이었다. 다만 청나라의 군대는 대부분 본국백성을 방비하고, 감시하고, 겁주는데 사용되었다. 청나라조정은 감히 대량의 병력을 뽑아내어 영국군과 전투를 벌이지를 못한다.

 

병력이 부족한 청나라조정은 할 수 없이 임시로 향용(鄕勇)을 모집하여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임시로 모집한 향용이 어떻게 장비가 선진적인 영국군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 향용에 대하여 도광제든 더욱 겁냈다는 것이다. 오늘은 네가 무기를 들고 영국침략자를 물리치지만, 내일은 네가 그 무기를 들고 만주족통치자를 몰아내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영국군이 물러나면 도광제의 첫번째 명령은 향용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나라는 백성이 있는줄 모르고, 백성은 나라가 있는지 모른다." 청나라조정의 폐관쇄국으로 유지보호하려던 것은 애신각라와 만주족권력귀족의 이익이었다. 이런 결과는 바로 백성은 근본적으로 청나라조정을 보호할 생각이 없었다. 듣기에 아주 황당무계한 사례는 영국군이 강소,절강을 침범했을 때, 어떤 지방의 향신은 무장자위대를 조직하였는데, 목적은 영국군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군대가 지나가는 길에 강탈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청나라조정은 그들에게 안전, 권리와 존엄을 주지 못했을 뿐아니라, 반대로 무궁한 착취와 압박을 가했다. 이런 청나라조정이었으니 실패는 어떻게 폐관쇄국하더라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