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명청시기의 중국과 서방
명청시기의 중국대외정책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16-19세기 세계역사발전과정중에서 살펴보아야 하고, 중국과 서방을 비교하는 거시적인 시야 속에서 관찰해야 한다. 두 가지 기본사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하나는 비록 중국이 16세기부터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전환하는 추세가 나타났고, 자본주의의 맹아가 조용히 싹을 키워 완만하게 발전하고 있었지만, 봉건전통의 뿌리는 여전히 강대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국은 여전히 봉건국가였다. 다른 하나는 서방자본주의의 흥기 및 전세계에 걸친 식민지확장이다. 이 두 가지 기본사실은 16-19세기 중국과 서방간에 사회형태의 차이와 문화충돌의 일면이 존재하면서, 더더욱 침략과 반침략, 식민과 반식민의 일면도 존재한다.
서방식민세력을 보면, 명말과 청초의 통치자들이 최대의 역사변화국면에 직면한다. 세계자본주의발전사는 폭력과 피비린내가 충만한 식민확장사이다. 이는 자본의 성격에서 결정된다. 과거이건 현재이건, 모두 바뀔 수 없다. 마르크스의 관찰에 근거하면, 16세기 자본주의시대가 강림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역사'가 시작된다. 활력이 충만한 유럽의 자산계급은 세계각지를 돌아다니며, 함포로, 상품으로, 성경으로, 피비린내나는 폭력방식으로 다른 나라와 민족의 자연적인 역사발전을 중단시키고, 전세계적인 범위에서 식민정복, 약탈과 통치를 시작한다. 그후 수백년간, "밀림규칙"은 서방자산계급이 극치로 발휘시킨다. 다른 나라, 기타 민족은 거의 하나의 예외도 없이 서방이 주도하는 글로벌화의 물결 속에 빨려들어간다. 자본은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배신, 뇌물, 학살과 비열한 행위의 절묘한 한폭의 그림을 전시"했다.
최초로 중국에 온 서방식민주의국가는 포르투갈이다. 명나라 정덕6년(1511년), 포르투갈인이 말라카를 점령한다. 그후 중국동남연해에서 침략활동을 전개한다. 그들은 인신매매를 하고, 광동연해를 습격한다. 가정제때, 포르투갈인은 지방관리에 뇌물을 주고, 마카오를 식민거점으로 삼는다. 그후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등 서방세력이 차례로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온다.
1566년, 네덜란드부르조아혁명이 발발한다. 네덜란드는 금방 식민확장의 길에 나선다. 1622년, 네덜란드는 마카오를 점령하고자 하나 실패한다. 이어서 팽호열도에 성을 쌓고 주둔한다. 1624년, 명군에 격퇴당한 후, 네덜란드인들은 대만으로 물러난다. 네덜란드식민자는 대만민중을 유괴하여 자바에 노예로 파는 인신매매까지 하여, 식민통치는 아주 잔혹했다. 1740년, 네덜란드식민당국은 '홍계참안(紅溪慘案)'을 만들어 자카르타의 화교들을 미친 듯이 도살한다.
일찌기 부르조아혁명이 발발하기 전에, 영국은 적극적으로 해외로 식민확장을 진행한다.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인도와 중국에 대한 무역독점권을 부여한다. 이를 기초로 인도식민제국을 건설하고, 나아가 해외시장과 원재료산지를 쟁탈하는 중요기지로 삼는다. 그후 4차례의 영국-네덜란드전쟁을 통해, 영국이 네덜란드를 대체하여 해상무역주도권을 장악하고, 일약 세계식민체계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다.
17세기이후, 러시아는 점점 중국의 동북지구로 침입한다. 1643년, 포야르코프가 이끄는 '원정대'가 모피징수, 광산자원탐사를 핑계로, 흑룡강유역에 들어왔다가, 현지주민의 무장저항에 부닥친다. 1650년, 하바로프가 이끄는 코사크인들이 다오르족의 거주지를 침입하고, 현지주민을 노예로 삼는다. 1653년, 스테파노프 일생이 송화강유역을 침입하여 양식을 약탈한다. 순치말기, 청나라조정은 기본적으로 흑룡강중하류의 러시아침략군을 물리친다. 그후 한동안, 러시아는 청나라조정의 군사투쟁중점이 화남지역으로 옮겨간 것을 기화로, 다시 흑룡강유역에 침입하며, 대거 식민거점을 건설한다. 청나라조정은 두 차례의 알바진(중국명 야크사)전투를 통해, 러시아의 침입을 막아내고, 네르친스크조약(니부추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가 흑룡강유역에서 확장하는 기세를 막아내고, 중국과 러시아간의 국경선을 확정한다.
명청교체기에 식민확장과 더불어, 예수회선교사들이 속속 중국으로 건너와, 서학동점(西學東漸)이 시작된다. 비록 선교사들이 서방의 천문학, 수학, 의학등 과학지식을 가져왔지만, 그들중 일부는 중국정치에 참여한다. 일부 선교사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중국내정에 간섭했고, 중국황제가 천주교에 귀의하여, 중국을 천주교국가로 만들고자 시도한다. 포르투갈국적의 신부 목경원(穆景遠, João Mourão 1681-1726)은 선교이익의 최대화를 얻어내기 위하여, 심지어 강희말년의 후계자다툼에도 가담했다가 나중에 옹정제에게 죽임을 당한다. 중국러시아간의 담판기간에 프랑스 선교사 도미니크 파르냉(巴多明)은 청나라조정의 러시아사무를 관장하고 내무부 '서리총관사'였던 대학사 마제(馬齊)를 매수하여 러시아를 위하여 일하게 만든다. 마제는 러시아특사의 '현임비밀고문'이 되어 러시아에 '큰 도움을 준다'
중국집권자는 동으로 오는 서방식민세력에 경계심을 가졌다. 포르투갈인들이 말라카를 점령한 후, 말라카국왕은 편지를 명나라조정에 보낸다. 포르투갈인들을 '강도'라고 하면서, 그들이 말라카의 사방에서 약탈과 살륙을 벌인다고 명나라조정에 알린 것이다. 특히 17,18세기, 서방은 글로벌확장의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청나라통치자는 식민폭력에 더욱 경각심을 나타내서 일련의 제한적인 조치를 취해 그 세력을 막고자 했고,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강희55년(1716년), 강희제는 해방(海防)에 대하여 토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천하의 일이라는 것은 모두 작았다가 커지는 것이다. 작다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크면 더더욱 유의해야 한다....해방이 오늘날의 중요한 일이다. 짐이 수시로 확인하겠다." 그리고 예언한다: "바다를 통해 나가는 사람이 아주 많다. 지금은 그다지 문제될 게 아니지만, 천년백년후에 중국은 반드시 그 해를 입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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