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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왕명(王明): 신비한 최고지도자

by 중은우시 2022. 7. 3.

글: 호기조장(好奇組長)

 

이전에 학교에 다닐 때, 교과서에서 왕명을 언급할 때면 좌경착오와 우경투항주의착오를 저질렀다고 하여, 좌우로 모두 착오를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역사서에 이름이 오를 정도면 그는 아주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왕명은 거의 부호화된 인물로, 많은 사람들은 그의 기본적인 평생이력조차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왕명은 1904년 안휘(安徽) 육안(六安)에서 태어났고, 원래 이름은 진소우(陳紹禹)이다. 왕명은 그가 나중에 쓴 가명이다. 그때 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은 가명을 많이 썼다. 어떤 때는 가명이 원래 이름보다 사람들에게 더욱 널리 알려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박고(博古)같은 경우이다.

 

1925년, 왕명은 무창상과대학(武昌商科大學)에서 공부한다.(지금의 무한대학 경제관리학원의 전신임). 이 기간동안 상해 5.30운동의 학생시위활동을 지지하는데 참가하여, 무한의 학생운동계에서는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다. 얼마 후 왕명은 공청단(共靑團)에 가입하고, 다시 국민당(國民黨)에 가입한다. 당시는 국공합작으로 많은 사람은 국민당이면서 공산당이었다.

 

1925년 10월, 호북당조직은 왕명을 모스크바중산대학에 공부하도록 보낸다. 이때 왕명은 비로소 진정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왕명은 키가 작다. 겨우 150센티미터가량이다. 그는 언어에 재능이 뛰어났고, 러시아어를 잘 배웠으며 이론수준도 비교적 높았다. 왕명은 모스크바중산대학의 부교장 파벨 미프(Pavel Mif)에게 인정받는다. 당시 파벨 미프는 많은 중국유학생들 중에서 유독 왕명을 좋아했다고 한다.

 

1927년 왕명은 파벨 미프의 통역으로 소련대표단을 따라 중국을 방문하여, 이름을 날린다. 국내의 혁명가들은 바벨 미프의 곁에서 키작은 통역을 대단하게 보았다. 비록 당시 왕명은 단지 보통의 공청단유학생이었지만.

 

소련대표단이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벨 미프는 모스크바중산대학의 교장이 되고, 왕명도 같이 지위가 오른다. 모스크바중산대학의 중국유학생들은 속속 왕명에게 줄을 서고, 왕명은 이들의 지도자가 된다. 당시 "28인반볼세비키"라는 조직이 있는데, 모두 중국유학생으로 구성되었고, 지도자는 왕명이며, 구성원은 박고, 장문천(張聞天), 왕가상(王稼祥), 양상곤(楊尙昆)등이 있다.

 

1929년 중공 제6차대표대회가 모스크바의 교외 한 별장에서 개최된다. 왕명은 통역업무를 맡았고, 회의내용을 번역하여 소련사람에게 말해준다. 동시에 왕명은 임시로 스탈린의 통역도 맡았다. 스탈린과 이유한(李維漢), 구추백(瞿秋白), 주은래(周恩來)등의 대화도 모두 왕명이 통역했다.

 

1929년 왕명은 귀국하여, 주로 선전업무를 맡는다. 그러나 고위직은 아니었다. <홍기(紅旗)>잡지통신원, <노동>잡지편집등등. 1930년말이 되어, 왕명을 가장 인정하는 파벨 미프가 중국으로 온다. 이번에 그의 신분은 코민테른(공산국제) 동방부 부장이었다. 즉 극동지구의 혁명업무를 책임지는 위치이며, 코민테른이 중국에 파견한 태상황(太上皇)인 것이다.

 

파벨 미프의 말은 힘이 있었다. 아무런 혁명공작경험이 업는 왕명은 중앙정치국상위로 발탁되어 일거에 권력핵심에 들어간다.

 

나중에 고순장(顧順章), 향충발(向忠發)이 변절하자, 왕명은 더 이상 상해에 머물지 못하게 되어, 상해를 떠나 모스크바로 돌아가 중국공산당의 주코민테른대표를 맡는다.

 

왕명과 모스크바에서 같이 공부했던 박고가 중앙정치국의 업무를 주재했는데, 박고는 중요한 일은 모두 왕명의 지시에 따라 집행했다. 박고는 왕명의 대리인격이어다. 왕명은 모스크바에 있었지만, 여전히 국내의 혁명업무를 원격조종할 수 있었다. 왕명은 코민테른의 힘을 빌어 대단한 영향력을 가졌었다.

 

왕명은 코민테른에서 잘 나갔다. 계속 승진하여 코민테른 집행위원, 코민테른 노동자국제당단위원, 코민테른 라틴아메리카주 서기처 주임등등. 그러나 국내의 혁명형세는 갈수록 어려워졌고, 제5차포위소탕전에서 참패하며 공농홍군(工農紅軍)은 부득이 장정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준의회의에서 박고가 실각한다. 그리고 모택동의 군사지휘권이 회복된다. 그리하여 왕명은 더 이상 국내혁명을 원격조종할 수 없게 된다. 그후 왕명의 착오노선이 청산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는 기계적으로 소련의 혁명경험을 그대로 본받으려 했기 때문에, 대도시를 차지해야 했다. 그리하여 국민당과 정면으로 맞부닥쳤고, 모택동이 제기한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한다", "유격전"의 방침에 반대했다.

항전발발후 왕명은 귀국한다. 귀국후 그는 사람들이 모택동을 중심으로 단결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왕명도 대권을 빼앗으려고 시도하기는 했지만, 영향력에 한계가 있었다. 실사구시적으로 말해서, 모택동은 장정을 거친 후 지위가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왕명같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고생해보지 않은 사람은 불가피하게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연안정풍운동에서, 왕명은 주요 비판대상이 된다. 그때 왕명은 몸에 병도 얻어서, 심신이 모두 크게 타격을 입게 된다.

 

1945년, 중공제7차대표대회가 개최된다(제6차대표대회로부터 17년이후이다). 왕명은 중앙정치국위원에 낙선하고, 권력핵심에서 철저히 멀어진다. 그후 왕명의 업무는 비교적 주변화되고, 옛날 코민테른의 대표로 태상황의 지위에 있던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왕명은 주로 법원에서 일한다. 신중국 최초의 혼인법은 바로 왕명이 주재하여 제정한 것이다. 다만 얼마 후, 모택동은 왕명을 비판하기 시작하고, 왕명에게 잘못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성할 것을 요구한다. 왕명은 이에 모욕을 느낀 듯하다. 그래서 모스크바로 가서 요양하겠다고 말하고, 모택동도 동의한다.

 

1953년, 왕명은 다시 귀국한다.그러나 아무런 업무도 주어지지 않는다. 한편으로 잘못은 범한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왕명의 몸이 너무나 좋지 않아 일을 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1956년 왕명은 다시 모스크바로 병치료를 위해 떠난다. 그리고 다시는 중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문혁이 발발한 후, 왕명은 "대반도(大叛徒), 기회주의두목, 소련수정주의대리인"이 된다. 그 본인이 비판투쟁을 당했을 뿐아니라, 그의 국내 친척들도 연루되어 농촌으로 하방되어 노동개조를 당한다.

 

1971년 왕명의 몸은 갈수록 좋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다. 1974년 회고록을 완성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난다.

 

왕명이 사망한 후, 소련의 <프라우다>는 그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코민테른의 친구"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전사"라고 말하며 그는 "항일통일전선강령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고 한다.

 

중국내에서는 왕명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입장이 정립되어 있다. 소비에트구시기에 받든 것은 "좌경모험주의"로 군사상의 실패후에는 보수주의와 도피주의로 흘러, 혁명사업에 중대한 손실을 끼쳤다. 항전전기에는 다시 우경투항주의를 받들어 편면적으로 통일전선을 강조하고, 국만당에 대하여 연약하고 투쟁이 불충분했다.

 

왕명은 잘나갈 때 계속 모스크바에 있었고, 그는 국내의 잔혹한 혁명투쟁에 거의 참여한 적이 없다. 그는 계속하여 외국에 머물렀다. 아마도 왕명의 잘못은 그다지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공로는 거의 없다. 왕명이라는 사람은 비교적 강퍅자용(剛愎自用)하고 인간관계가 좋지 않았다. 1979년이후 당내외에서 그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