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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소면호(笑面虎)" 모인봉(毛人鳳)

by 중은우시 2022. 7. 18.

글: 심사기담(尋史奇談)

 

그는 일찌기 국민당 특무의 "1호인물"이었다. 그의 성공의 길에는 여자의 도움을 빼놓을 수 없다. 성공하기 전에 그는 은인자중하며 오랫동안 후덕하고 착실한 사람처런 행동하여, 모든 사람이 그에게 속았었다.

 

그가 고위직에 오르자 그는 칼을 빼들었고, 심지어 그를 여러해동안 따랐단 부하들조차도 액운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일생동안 명리를 추구하여, 적을 많이 만들었고, 심지어 '태자야'를 끌어내릴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말년은 한없이 처량했고, 모두가 그를 떠난다. 병이 위중했을 때 민간의 비방을 썼다가 목숨을 잃는다. 그가 누구인가? 그는 바로 국민당의 특무두목 "소면호" 모인봉이다.

 

모인봉의 성공에는 한 여자를 언급해야 한다. 그 여자는 바로 그의 처인 향영심(向影心)이다. 향영심은 간단한 여자가 아니다. 원래 서안의 한 시골 의원의 딸이다. 용모가 예쁜 것 외에는 별다른 가정배경이 없었다.

향영심

그러나 향영심은 눈이 높았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낭군을 맞아 자신이 나무 위에 올라앉는 봉황이 되기를 원했다. 여기저기서 그녀에게 구혼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녀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부친보다도 1살이 많은 호일발(胡逸發)에게 시집간다. 그것도 셋째 첩으로. 이 호일발이 누구인가? 그는 서북군 양호성(楊虎城)의 부하로 서북군 무한판사처의 주임이었다.

 

무한으로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향영심은 마작을 하다가 국민당 군통의 거물 대립(戴笠)을 알게 된다. 대립도 풍류남아였다. 자색이 뛰어난 향영심을 보자 침을 흘린다.

 

그리고, 향영심도 자연스레 고위직에 있는 대립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이렇게 하여 향영심은 호일발을 버리고, 대립의 품에 안긴다. 대립은 어쨌든 특무공작을 하는 사람이니 향영심을 자신의 애인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립은 동시에 향영심을 특무로 교육시킨다. 그리하여 여려번 미인계를 시전했고, 그녀는 대립의 믿을만한 심복이 된다.

 

야심이 충만한 향영심은 당연히 단순한 특무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큰 포부가 있었다. 그녀는 대립의 정식 부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관찰해본 결과, 향영심은 대립에게 자신을 부인으로 맞을 마음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대립은 비록 조강지처와 여러 해동안 별거하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여자들을 만나고 있었지만, 그런 여자들과 결혼할 생각은 없어던 것이다. 대립은 일찌기 결의형제를 맺은 호종남(胡宗南)에게 자신도 송미령같은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대립은 마음이 악랄했다. 이전에 여자특무인 주숙영(周叔英)이 대립에게 결혼을 강요하자, 결국 대립이 그녀를 감옥에 쳐넣고 만다.

 

어쩔 수 없이 향영심은 다른 차선책을 구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군통의 당시 '3호인물'인 모인봉을 선택한다. 모인봉은 비록 대립보다 1살이 어렸지만, 대립과 거의 비슷하게 특무바닥에서 굴렀다.

 

두 사람은 절강성 1중의 동창이다. 모인봉은 절강성 숭덕현에서 일개 과장으로 있을 때, 대립은 이미 특무두목으로 이름을 사방에 떨치고 있었다.

 

나중에 대립은 자신의 적계부대를 만들기 위하여 옛친구를 군통의 전신인 "부흥사(復興社)"에 들어오도록 청한다. 모인봉은 결단을 내려 과감하게 대립의 기요비서(機要秘書)가 된다.

 

대립의 곁에서 여러 해동안 있으면서 모인봉은 아직 혈혈단신이었다. 향영심의 출현으로 그는 독신을 면할 수 있었다. 대립도 두 사람이 짝을 이루도록 도와주었고, 군통요원은 연애할 수 없다는 전통도 깨버리고, 두 사람의 혼사를 특별히 허가한다.

 

향영심이라는 말잘하고 관계좋은 부인을 가지자, 모인봉의 관직은 수직상승한다. 향영심은 관료사회에서 여러 해동안 활약했고, 그녀의 뛰어난 용모과 남다른 말솜씨로 광범위한 인맥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많은 국민당내의 고관들은 그녀와 교류가 있었다. 그녀는 심지어 직접 송미령을 만나기도 했고, 군통의 적수인 진입부(陳立夫), 진과부(陳果夫)와도 잘 알고 지냈다.

 

그녀는 또한 장개석의 외조카로 하여금 양삼(楊森)의 셋째딸과 결혼하게 주선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장개석은 사천군벌을 자기의 편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이때부터 향영심과 모인봉은 양삼의 귀빈이 된다. 양삼이라는 배경을 확실하게 끌어안기 위하여 향영심의 노력으로 모인봉과 양삼도 사돈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양삼은 상장(上將)계급이고, 국민당의 봉강대리(封疆大吏, 지방장관)이라는 것이다. 모인봉은 당시 겨우 중교(中校, 중령)계급이었는데, 이런 결혼을 성공시켰다는 것은 그의 관료로서의 앞날에 크게 도움이 될 터였다.

 

1946년, 대립이 비행기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의 후계자가 될만한 사람은 두명이었다: 정개민(鄭介民)과 모인봉. 장개석은 고의로 모인봉에게 물어본다: "네 생각에 누가 후임을 맡으면 좋겠느냐?"

 

모인봉은 당연히 자신이 경력이나 지위에서 중장(中將)계급인 정개민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를 하는 심정으로 정개민의 이름을 거론한다. 이에 장개석은 아주 만족한다. 그리고 정개민을 군통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모인봉은 당연히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대립을 상대하는데는 그 스스로 자신이 없었지만, 정개민을 상대하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모인봉은 암중으로 부하를 시켜 정개민의 처가 뇌물을 수수한 증거를 수집한다. 그리고 정개민의 처가 북경, 상해등지에 사놓은 부동산과 골동품을 하나하나 모두 조사한다.

 

1947년, 모인봉은 정개민으로 하여금 50세 생일파티를 열도록 종용한다. 그날 정계요인들과 고관들이 속속 모여들었을 때, 근무중 사망한 특무의 가족들도 문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밀린 구휼금을 달라고 요구한다. 이는 확실히 모인봉이 기획한 것이다.

 

이 일로 도시가 시끄러워지고, 각 신문에서 속속 보도를 하자, 장개석은 분노한다. 모인봉은 때를 놓치지 않고 정개민이 뇌물수수한 조사보고서를 들이민다. 이 부저추신(釜底推薪)의 수법에 정개민은 하야한다. 2인자였던 모인봉이 자연스럽게 1인자에 오른다.

 

모인봉은 여러 해동안 고대했던 때를 맞이한다. 그는 정식으로 "국방부" 보밀국(군통후신)의 국장이 된다. 향영심도 바라던대로 국장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향영심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다. 원래 착실하고 성실하던 모인봉이 마침내 꼬리를 드러낸 것이다. 여러 해동안, 모인봉은 대립의 아래에서 꾹 참고,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호인이라고 여겼다.

 

대립은 성격이 불같았고, 걸핏하면 부하들에게 질책하고 주먹질과 발길질까지 서슴지 않았었다. 한번은 문서과의 곽자량(郭子良)이 문서제출을 조금 늦게 했다. 대립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방망이를 집어들고 때렸었다.

 

모인봉은 그것을 보고 즉시 곽자량을 용서해달라고 사정한다. 대립은 동창의 면을 봐서 곽자량을 용서해준다. 그후 곽자량은 모인봉에게 감지덕지한다.

 

누가 알았으랴. 이것이 바로 모인봉의 교활한 점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선으로 인심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집단을 결성한다.

 

현재, 모인봉은 마침내 국민당특무의 우두머리가 된다. 대권을 장악한 그는 더 이상 그런 것에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전의 조심스럽고 꼬리를 말고 얌전하게 행동하던 모습에서 일변하여 기고만장한 태도를 보이면서 특무부대에 대한 대숙청을 시작한다.

 

모인봉이 보기에 보밀국의 많은 사람은 대립의 부하이다. 그는 자신의 대오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진다. 그가 가장 먼저 칼을 들이댄 것은 바로 자신의 처였다.

 

1947년, 모인봉은 청도에 본부를 설치하면서, 향영심을 감기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는 이유로 완전봉쇄된 정신병원에 가두어버린다.

 

향영심은 정신병원 병동에 갇힌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남편의 계책에 속았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나는 미치지 않았다. 이건 음모다. 모함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끝났다. 모인봉은 이미 의사와 결탁했고, 그녀가 병원을 나올 수 없게 하였다.

 

모인봉이 자신의 조강지처에게 이렇게 독수를 쓴 것은 주로 그녀가 일찌기 대립의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모인봉은 비록 대립과 동창이지만, 여러 해동안 대립의 부하로 고개를 숙이고 그의 지시를 따랐다. 그러다보니 마음 속으로는 대립을 죽도록 미워했다.

 

그리고 향영심이 대립의 애인이었다는 것은 이미 공개된 비밀이었다. 이 일은 한때 모인봉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대립이 살아있을 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복수의 시간이 온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향영심은 이미 나이가 들어 젊을 때같지 않았다. 모인봉도 이 기회에 다시 젊고 예쁜 여자를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모인봉은 미신을 상당히 믿었다. 대립이 생전에 썼던 것은 모조리 버렸다. 대립의 호화주택, 자동차, 비행기 등등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린다.

 

자신의 처를 처리하고나서, 모인봉은 군통의 다른 부하들을 손보기 시작한다. 그의 잔혹한 정도는 대립을 훨씬 초과했다. 대립은 그저 욕하고 때리는 수준이었지만, 그는 걸핏하면 부하를 감옥에 집어넣고,  심지어 죽여버렸다.

 

그가 보밀국의 국장이 된 후, 즉시 중경지구에서는 인원이 대거 교체되게 된다. 거의 500명의 특무가 쫓겨난다. 말썽을 부리는 사람은 감옥에 집어넣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모두 그의 심복들 뿐이다.

 

1948년 겨울,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모인봉은 자신의 심복들만 대만으로 가게 했고, 남은 사람들은 강제로 대륙에 스파이로 남게 했다.

 

이들 특무들은 모두 손에 피를 묻혔었고, 그들은 모두 자신의 최후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인봉에게 자신도 데려가달라고 애걸했지만, 모인봉은 들은체 만체 하지 않았고, 오히려 죽음으로 그들을 위협했다.

 

동시에 철수하기 전에, 모인봉은 수용소에서 많은 공산당원과 진보인사들을 살해한다. 그렇게 다시 피빚을 진다. 국민당원들조차도 그를 "살인기기"라고 부를 정도였다.

 

대만에 도착한 후, 모인봉의 인생은 마침내 전환점을 맞이한다. 사실상, 장개석은 계속 모인봉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다. 심지어 정보공작의 실직이 그가 대륙에서 실패한 원인중 하나라고 여겼다.

 

모인봉의 개인적인 업무수준은 확실히 높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대륙에 남긴 '스파이'들도 금방 공안기관에 적발된다.

 

1949년 8월, 장개석은 또 다른 특무기구를 준비한다. "총통자료실"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장경국(蔣經國)을 책임자로 앉힌다. 모인봉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한다. 그래서 장경국을 제거할 음모까지 꾸민다.

 

1952년 모인봉은 "모방초사건(毛邦初事件)"의 조사보고서를 장개석에게 올린다. 모방초는 장경국 모친의 친조카이다. 군용물자를 구매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 그리고 모인봉은 이 보고서에서 장경국도 분명히 관련이 있다고 적는다.

 

모인봉은 장개석이 공무는 공무로 처리하여 장경국을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쨌든 친아들의 일이다. 장개석은 오히려 모인봉에 더욱 불만을 가지게 된다. 이 일은 장경국을 끌어내리지 못했을 뿐아니라, 나중에 장경국으로 하여금 모인봉을 더욱 미친듯이 탄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얼마 후, 모인봉은 허수아비가 된다. 그 혼자만 남게 된 것이다. 실세한 그는 세태의 염량을 느꼈다. 그가 암에 걸렸을 때, 아무도 그를 보러 오지 않았다. 심지어 이전의 사돈인 양삼조차도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1956년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본 모인봉은 민간의 비방을 선택한다. 강호랑중이 지은 약을 사서 먹은 후에 바로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