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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무측천(武則天) 사후, 무씨일족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by 중은우시 2022. 8. 29.

글: 심근배조(尋根拜祖)

 

무씨일족은 원래 후손이 번성한 부유한 상인가족이었다. 무측천이 황후에 오른 후, 무씨일족은 계견승천(鷄犬昇天)한다. 무측천이 사망하면서(705년), 무씨일족은 모래사장에서 벌거벗고 수영하는 사람들처럼 '바닷물의 엄호를 잃은 그들은 즉시 사람들의 표적이 된다'

 

한때 무씨일족은 작점짐소(雀占鴆巢)하여 이당(李唐)강산을 찬탈한다. 그후 십여년에 걸친 '용상보위전'에서 이당종실을 포함하여 수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렇다면, 죄괴화수(罪魁禍首)인 무씨일족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씨가족의 족보도를 보면, 무측천의 부친대는 형제가 4명이다. 즉 무사릉(武士棱), 무사일(武士逸), 무사양(武士讓), 무사확(武士彠)이다. 그중 무사확이 무측천의 부친이다.

 

우리는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몇몇 대표인물들 및 그 후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태조(太祖) 무사확의 후손

 

무씨일족의 성공은 무사확이 이연(李淵)을 쫓아 태원에서 거병하는데 참가하면서부터이다. 먼저 '진양원모공신방' 17명중 한명이 되어, 무씨일족은 상인에서 일약 사족집단에 들어간다.

 

무사확의 적처(嫡妻) 상리씨(相里氏)는 두 아들을 낳는다: 무원경(武元慶), 무원상(武元爽). 상리씨가 죽은 후, 이연의 딸이 중매를 서고, 이연이 직접 하사하여 무사확은 홍농양씨(弘農楊氏)를 계처(繼妻)로 맞이한다. 그리고 그녀와의 사이에 무측천 삼자매가 태어난다.

 

무원경과 무원상은 불효자로 부친이 죽은 후, 그들은 당형제들과 연합하여 무측천모녀들을 괴롭혀, 모녀 네 명은 낙양의 양씨집안에 의탁하여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무측천이 성공한 후 오빠 둘에게 독수를 쓴 원인이다.

 

다만, 나중에 무측천은 유배중이던 조카들은 불러들이고, 그들의 역량으로 무씨일족의 정치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위왕(魏王) 무승사(武承嗣) (무측천의 친조카)

 

무승사는 무원상의 장남이다. 이 자는 이씨일가가 가장 미워하는 자이다. 그의 손에 죽은 이당종실의 자제와 대신들이 부지기수이다.

 

무승사는 무주(武周)의 태자 자리를 노렸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적인걸(狄仁傑)등 대신들의 반대로 무측천은 최종적으로 아들을 태자로 세우게 된다. 환상이 깨져버린 무승사는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몇년 후 병사한다. 무측천보다 일찍 죽었다(698년).

 

무승사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장남 무연기(武延基)가 위왕의 작위를 계승한다. 그리고 당중종(唐中宗) 이현(李顯)의 딸 영태공주(永泰公主) 이선혜(李仙蕙)를 처로 맞이한다. 

 

대족(大足)원년, 무측천의 남총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형제가 무연기, 이선혜가 사적으로 무측천의 사생활을 의론했다고 고발한다. 무측천은 대노하여, 아무런 망설임없이 조카손자와 임신한 손녀를 죽여버린다(701년).

 

여섯째아들 무연수(武延秀)는 당형 무숭훈(武崇訓)의 뒤를 이어받아 당중종의 딸 안락공주(安樂公主)를 처로 맞이한다. 이 안락공주는 "황태녀(皇太女)"를 꿈꾸었던 여인이다. 그리고 모친 위후(韋后)와 함께 부친을 독살한 야심가이다.

 

당륭(唐隆)원년(710년), 태평공주는 이융기(李隆基, 나중의 당현종)이 연합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위후, 안락공주, 무연수를 주살한다.

 

양왕(梁王) 무삼사(武三思)(무측천의 친조카)

 

무삼사는 무원경의 아들이다. 무조때 무승사와 함께 '낭패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삼사는 비록 야심이 컸지만, 더욱 악독한 무승사의 앞에서는 조금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었다.

 

무승사가 죽은 후에는 이현이 이미 태자에 올라 있었다. 그리하여 교활한 그는 즉시 방향을 돌려, 이현에 빌붙는다.

 

안락공주의 첫째남편인 무숭훈(武崇訓)은 바로 무삼사의 아들이다. 그래서 무삼사는 일약 변신하여 이현의 사돈이 된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무삼사가 사돈인 위후와 관계가 아주 가까웠다는 것이다. 얼마나 가까웠는가? 침대에 같이 올라갈 정도였다.

 

사서에 따르면 이현은 이들 둘의 관계를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고 한다. 비록 정사에 기록된 내용이기는 하지만 신뢰도는 높지 않은 것같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무삼사는 투기꾼이다. 그는 이현과 이단(李旦), 태평공주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굳건하게 이현, 위후집단을 옹호함으로써 자신의 집안의 장기적인 이익을 도모한 것이다.

 

경룡원년(707년), 태자 이중준(李重俊)은 위후, 안락공주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경룡정변'을 일으킨다. 이번 정변에서 무삼사와 무숭훈 부자는 둘 다 피살당한다.

 

이단(당예종)이 복위한 후, 조정대신들은 무삼사의 무덤을 파헤쳐 개관육시하게 된다.

 

초왕(楚王) 무사양(武士讓)의 후예 

 

무사양의 일맥은 무측천과의 관계가 가장 친밀했다.

 

무유기(무측천의 당질, 사위)

 

무유기(武攸曁)는 무회도(武懷道)의 아들이고, 무사양의 손자이다. 또한 무측천의 사위이다.

당시 태평공주는 처음에 사촌오빠인 설소(薛紹)에게 시집을 간다. 나중에 설소와 형 설의(薛顗)가 모반사건에 연루된다. 악독한 무측천은 딸 태평공주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설소를 굶겨죽여버린다.

설소가 죽은 후, 무측천은 다시 무유기의 적처를 죽이고, 태평공주와 결혼하도록 명한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무숭민(武崇敏), 무숭행(武崇行)을 낳는다.

무유기는 기실 진퇴를 아는 겸손한 군자였다. 아쉽게도 황실의 혼인은 도덕을 따지지 않는다. '선천정변'후 태평공주가 피살되면서 무숭민, 무숭행도 모두 피살당한다(713년). 이미 사망한 무유기의 묘로 파헤쳐진다.

 

무유서(武攸緖)(무측천의 당질)

 

무유서는 지명도가 낮다. 그러나 그도 언급해야한다. 무주가 건립된 후, 무유서는 성평왕(成平王), 전중감(殿中監), 양주대도독부장사(揚州大都督府長史), 홍려소경(鴻臚少卿), 천우위장군(千牛衛將軍)에 봉해진다.

 

다만 무씨일가의 득세도 무유서에게는 영광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그는 무씨일가의 재난이 다가온다는 것을 민감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관직과 작위를 사양하고 숭산(嵩山)에 은거한다.

 

그 기간동안 그는 일체의 하사품도 사양한다. "동거모초(冬居茅椒), 하거석실(夏居石室), 일여산림지사(一如山林之士)" 겨울에는 띠집에 살고 여름에는 석실에 살았다. 산림거사와 같았다. 그는 고관대작들과 교류하지 않고, 자주 가명을 써서 길거리로 나가 점을 쳐주면서 살아갔다.

 

과연 무측천이 퇴위한 후, 당나라는 7년간 4번의 정변을 겪고, 매번 무씨일족들이 죽어나간다. 유독 무유서만이 당현종 이융기의 존경을 받아, 주변지방관리들에게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명령한다. 그는 개원11년까지 살았고, 69세의 나이로 편안히 죽음을 맞이한다.

 

무혜비(武惠妃)(무측천의 당손녀)

 

양귀비 이전에, 무혜비는 당현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 무혜비는 바로 무사양의 증손녀이고, 무회운(武懷運)의 손녀이다. 무회운은 바로 무원상, 무원경과 함께 무측천모녀를 괴롭혔던 '흉수' 중 한 명이다. 나중에 무측천이 함정을 파서 죽여버린다.

 

무회운이 피살되고, 무혜비의 부친 무유지(武攸止)도 요절한다. 그래서 무혜비는 어려서부터 궁안에서 길러진다. 이로 인하여 당현종의 눈에 띄게 된다. 

 

나중의 이야기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혜비는 자신의 아들 이모(李瑁, 양귀비의 첫남편)를 태자로 앉히기 위해, 이임보(李林甫)와 결탁하고, 다시 이융기를 종용하여 '일일살삼자(一日殺三子)"의 참안을 일으키게 된다.

 

사람이 하는 일을 하늘은 보고 있다. 무혜비가 태자 3형제를 죽인 후, 자신도 놀라서 병이 들고 얼마 후 죽어버린다.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의 시신이 식기도 전에 자신의 며느리(양귀비)를 남편이 빼앗아갈 줄.

 

안륙현공(安陸縣公) 무사일(武士逸)

 

하내군왕(河內郡王) 무의종(武懿宗) (무측천의 당질)

 

무의종은 무승사, 무삼사를 제외하고 무주때 무씨자제들 중에서 3인자였다.

 

이자는 키가 작고 얼굴도 못생겼지만, 마음이 악독하고, 수법도 악랄했다. 거란의 침입을 막을 때, 노략된 하북의 백성들에게 아주 잔혹하게 대하고 일찌기 하북사람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나중에 그는 다시 '유사례(劉思禮)모반사건'을 이용하여 크게 사건을 확대하여 수천명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신룡2년(706년), 즉 무측천이 황위를 넘겨준 다음 해에 무의종은 병사한다.

 

무원형(武元衡) (무측천의 당현손)

 

무원형은 당덕종때의 재상이다. 무사일의 내손(來孫, 玄孫의 아들)이자, 영천왕(潁川王) 무재덕(武載德)의 증손이다. 그는 무씨일족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무원형은 시사에 능하여, 유명한 시인재상(詩人宰相)이다. 200수에 가까운 시를 남겼다. 그의 영향으로, 그의 아들 무상황(武翔黃)은 진사과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다.

 

무원형에게는 '정적(情敵)'이 한 명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백거이(白居易)이다. 당초 무원형이 서천절도사로 있을 때, 유명한 미녀시인 설도(薛濤)와 사귄다. 두 사람은 시문으로 화답하며 애정이 깊었다. 이에 백거이의 질투가 폭발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이야기거리가 된다.

 

당연히, 무원형에게 가장 뛰어난 점은 정치적 재능이었다. 그는 삭번(削藩)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철혈재상'으로 불린다. 이로 인하여 번진세력에 미움을 사게 되고, 평로치청절도사 이사도(李師道)가 파견한 자객에게 암살당한다.

 

무원형이후, 무씨일족은 철저히 쇠락한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무측천이 죽은 후 7년간, 무씨일족은 차례로 숙청을 당한다. 다만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비한다면 그다지 참혹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무측천이 미리 준비를 해둔 탓일 것이다. 그는 황위를 이현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하기 전에, 이씨집안과 무씨집안의 정략결혼을 통하여 이씨집안과 무씨집안을 융합시켜놓았다. 이것이 무씨일가의 보호막이 된다.

 

가장 전형적ㅇ니 것은 이현과 무삼사, 태평공주와 무숭훈등이다. 여기에 이현과 이단, 태평공주의 갈등이 격화하면서, '이무구원(李武舊怨)'은 완화된다. 그리하여 무씨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