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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당나라때 사람들은 "무측천시대"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보았는가?

by 중은우시 2019. 5. 28.

글: 독사품생활(讀史品生活)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무측천의 인생궤적은 여러 중요한 시간들이 있었다. 638년 입궁하고, 649년 감업사로 출가하였으며, 655년 황후에 오르고, 674년 천후(天后)에 올랐으며, 다시 683년 임조칭제(臨朝稱制)하고, 690년에는 처음으로 황제를 칭한다....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매 시각은 모두 무측천시대의 도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그렇다면, 무측천시대의 시작과 끝의 구체적인 시간은 언제일까? 무측천시대의 시간범위는 어떻게 정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역대학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당나라때 사람들은 스스로 어떻게 보았는지에 주목하는 사람은 적었다. 즉, 당나라사람들의 생각에 무측천시대는 있었는가? 있었다면 출발점과 종점은 어디였을까?


무측천시대는 구체적으로 언제 도래했다고 봐야할까? 그리고 무슨 사건이 이를 나타낸다고 봐야할까? 당나라사람들도 여러 견해가 있었고,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관련문헌을 정리해보면, 대체로, 무측천시대의 시작점에 대하여 대체로 무황후조(武皇后朝), 무태후조(武太后朝), 무황제조(武皇帝朝)의 3개의 시간대로 나눌 수 있다. 구체적인 대응시간으로 보자면 각각 649년-683년, 683년-690년, 690년-705년이다.


첫째, 무측천시대의 시작점을 무황후조로 보는 견해이다. 즉 649년-683년에 이미 도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대표인물은 주로 유숙(劉肅), 이용(李冗)등이다. 그들은 이렇게 본다. 당고종은 재위기간동안 자주 풍진과 두통을 앓고 몸이 약해고 병이 많아 무측천의 정치적야심을 자극했고, 무측천의 참정에 합리적인 기반을 제공했다. 전체 당고종기간동안, 무측천의 정치권력은 점차 제고되고, 개인의 지위도 신속히 올라가서, 상원(上元)연간에 이미 "이성(二聖)"이라는 칭호가 나왔다는 것이 그 명확한 증거이다. 여러가지 정황은 당고종 재위기간에 무측천시대가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숙은 당고종 인덕(麟德)연간에 상관의(上官儀) 사건이 발발하는데, 이것이 바로 무측천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최종 표지라고 본다. 그후 "정귀무후(政歸武后), 천자공수이이(天子拱手而已), 경이귀정언(竟移龜鼎焉)" 이 견해는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의 기재내용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두 사람은 모두 상관의사건이 당고종과 무측천간 정치권력분배의 분수령으로 본다. 즉 무측천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시작점이라는 것이다.


이용은 <독이지(獨異誌)>에서 이렇게 썼다: "당나라 천후조때 처사 손사막은 숭산에 기거하며 도를 수행하고 있었다. 당시 큰 가뭄이 들어 낙양에서 덕행이 높은 승려 수천백명을 천궁사로 모셔서 인왕경을 읊으며 기우제를 지냈다....무측천은 사람을 숭양으로 보내어, 손사막을 내전으롭 불러들였고, 그날 저녁에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용이 '천후조'라는 칭호의 앞에 '당(唐)'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무측천시대는 직접 대당왕조의 역사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씨정권에 대하여 특수한 역사적지윌르 부여하지 않는단 말이다. 유사한 기재내용은 아주 많다.


작자는 무측천정권의 정치영향력과 행정흔적을 가급적 가볍게 언급하고, 통일적으로 전체 대당왕조의 역사발전 속에 넣으려 한다. 이를 통해 대당왕조의 정치생명의 연속성과 정통성을 표시하려 한다. 당나라때 사람들은 대당정권에 대한 강렬한 국가동질감을 글로 표현했다. 상대적으로 전통사회에서 여자가 정권을 좌우한 것을 배척하고 부정하려는 경향도 보인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많은 당나라때의 묘지명과 비석자료가 발견되었다. 여기에서도 무측천시대의 시작과 끝에 관한 역사적 수수께끼를 푸는데 중요한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 비지(碑誌)인 <대당고임천군장공주묘지명병서>는 우리에게 당시 궁중내부의 진실된 정치권력분배상황을 알려준다. 묘지명의 해석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무측천시대의 시작점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비지자료와 <신당서>의 기재내용을 대비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임천공주(臨川公主)는 영순(永淳)연간에 죽었다. 당시는 당고종시기이다. 무후는 아직 신생정권을 건립하기 전이다. 통상적인 이치대로라면, 비지의 내용은 당고종 본인의 사적을 많이 적어야 하고, 황후인 무측천의 사적을 많이 적어야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비지재료에는 당고종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무측천의 사적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장의 내용도 대거 찬양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추리해볼 수 있다. 당고종 영순연간이전에, 당고종의 정치적 이세는 이미 명존실망(名存實亡)했고, 무측천이 대권을 장악했으며, 실질적인 조정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둘째, 무측천시대의 시작점을 무태후때로 보는 것이다. 즉 683-690년으로 보는 것이다. 즉 당고종이 사망하기 전부터 대주(大周)가 건립되기 전의 7년기간때로 본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는 비교적 많다. 그러나 모두 그 시간대에 발생한 사정을 설명할 뿐, 무측천시대의 시작점이 어느 때인지를 명확히 얘기하지는 않는다. 주요대표인물은 봉연(封演), 장작(張鷟), 유속(劉餗)등이다. 그들이 쓴 일련의 소설, 필기등 전통문헌자료에서는 이 풍운이 변환하는 동탕의 시대를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기록은 대부분 무측천본인의 관련 칭호와 연호가 추가되기 전에, 직접 당고종과 관련된 칭호와 연호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작자는 글에서 묘사한 역사사건이 모두 무측천시대에 발생했다고 설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고종 시대가 아니라. 이 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렇게 확정할 수 있다. 무측천시대의 시작점은 수공(垂拱)말년 이전이다.


위의 작자들은 모두 이렇게 본다. 무측천시대의 시간범위는 대주정권의 존속기간과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광범위하고 풍부한 시간대와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홍도(弘道)원년 당고종이 사망한 후, 무측천은 황태후의 신분으로 임조칭제한다. 이때부터 조정정권을 장악하고, 일체의 정무는 그녀에게서 나온다. 무측천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비록 표면적인 의미에서 정권존재형식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이는 실질적인 의미에서 정치권력의 존재방식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출토된 당나라때 묘지명자료도 우리의 역사연구에 더욱 세밀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보태준다. 예를 들어, 수공연간의 한 묘지명이 유력한 증거가 딘다. 묘지명에서는 죽은 사람의 성이 서씨(徐氏)인데, 나중에 "황운조흥(皇運肇興)"으로 다시 대거 무후의 집정을 보좌하고, "사이국성(賜以國姓)"하고 최종적으로 "편관제향(編貫帝鄕)"하는 영광을 누리니 실로 만고의 행운이다라고 적었다. 글에서 여러번 "황운", "성모신황(聖母神皇)", "제향"등 제왕의 용어를 쓴다. 신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는 수공연간에 무측천은 일의 조치를 통해 자신의 통치를 강화하는데, 거기에는 존호를 추가하는 등의 활동이 포함된다. 이를 보면 수공연간에 무측천은 이미 지고무상의 권력을 지녔다. 대당정권은 이미 명존실망했고, 무측천시대가 이미 도래한 것이다.


셋째, 무측천시대의 시작점을 대주정권의 건립으로 보는 것이다. 즉 천수혁명(天授)혁명이 발발하고, 무측천이 황태후에서 일약 황제로 변신한 때로부터이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의 수가 가장 많다. 어쨌든 그들이 보기에 신정권의 건립, 구정권의 멸망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애서의 구시대의 종결과 신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견해도 다르고 논점도 달라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권51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무씨가 나라를 찬찰한 십오여년(十五餘年), 효화가 검을 들고 일어나 다시 당나라를 부활시키고, 정통과 복색을 회복한다. 모두 정관때를 따른다. 이는 큰 공을 천하에 세운 것이다." 두우의 견해로 보면, 무측천시대의 시간범위는 천수원년에서 신룡원년까지이다. 즉 대주정권이 존재한 시간범위로 모두 합쳐서 십오여년이다. 다만, 두 우는 무측천시대의 구체적인 시작점과 종점에 대하여 우리에게 개략적인 시간대만 제공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측천시대가 끝나는 종점은 언제일까? 그 종점이 도래한 대표적인 사건은 또 무엇일까? 신룡정변(神龍政變)일까? 중종복국(中宗復國)일까? 혹은 무후사망일까? 선천정변(先天政變)일까? 무측천시대가 끝나는 구체적인 시간에 대하여 역대이래로 견해가 달랐고, 관점도 많았다.


그중 신룡년간에 슨 묘지명이 우리에게 의문을 해소시키는 중대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대주상주국회주하내현경복부교위이수기묘지명병서(大周上柱國懷州河內縣景福府校尉李修己墓誌銘幷序)의 기록에 따르면, "군의 이름은 수기(修己)이고, 자는 현방(玄方)이다. 회주 하내 사람이다...대당 신룡원년 구월 사일, 병으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이 묘비의 개문(蓋文)은 <대당고이부군묘지명(大唐故李府君墓誌銘)>이고, 지문(誌文)은 <대주상주국회주하내현경복부교위이수기며지명병서>이다. 비지의 내용을 기록한 일자는 "대당신룡원년구월사일"이다. 비지에 기록된 일자를 기준으로 추산해보면, 신룡원년구월은 바로 중종복국후의 대당정권시기이다. 중종복국은 대주정권의 멸망을 의미하고, 그 역사적 의미는 무측천의 사망보다 훨씬 크다.


그외에, 당나라때 돈황문헌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영장돈황사회역사문헌석록>에는 "무측천이 경룡원년 11월 다시 내시장군 설간을 잠계능선사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당나라 역사연호의 순서로 보면, 우리는 경룡원년은 당중종의 연호임을 알 수 있다. 즉 707년이다. 이때는 당중종시대이고, 무측천은 이미 신룡원년 십일월에 사망했다. 그런데 왜 다시 무측천이 지시한다는 내용이 나온단 말인가?


자세히 추리해보면, 주요원인은 서부변방인 돈황, 서주등지는 수도 장안과 거리가 멀어서, 관방칙서가 적시에 도달하지 못했고, 그래서 여전히 무측천 본인의 옛 이름을 쓴 것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러가지 주관 객관적인 원인으로, 국가의 일부지역 특히 제국의 변방등 교통이 불편한 지방에서는 무측천시대가 끝난지 모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무측천 자신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이다.


무측천은 중국역사상 정치적 지위가 아주 특수한 여황제이다. 그녀는 자신의 정치적 부호를 가진 대주정권을 건립했고, 당시 가장 권력이 큰 여인이 된다. 권력이 집중된 정치상황하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무측천이 내심으로 강렬한 죄의식을 품고 있었는지이다. 죄의식이라는 것은 주로 전통문화의 영향이고, 그중 가장 큰 것은 군권세습의 남존여비사상이다.


비록 당나라는 개방적이고 활달하며 겸용병축(兼容幷蓄)의 사회분위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중국전통사회의 군권세습, 남존여비의 고유사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회의 영향도 아주 컸다. 무측천의 정치궤적을 고찰해보면, 우리는 그녀의 내심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강렬한 죄의식을 알 수 있고, 그녀의 정치시대의 종결점의 인식과 판단도 분석해볼 수 있다.


영휘6년 황후가 되어 정치에 간여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신룡원년 정변으로 퇴위할 때까지, 무측천의 정치생애를 살펴보면, 모두 이런 강렬한 죄의식에 뒤덮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도원년 당고종이 병사하고, 유조로 이현을 황제에 세운다. 결정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천후의 처분을 따르라고 되어 있다. 비록 이현이 당나라의 황제이지만, 권력은 크지 못했고 발언권도 약했다. 조정을 좌우할 수 없었다. 국가의 실제권력은 무측천의 수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


그후, 대당의 정치중심은 실제도성이 서북의 장안에서 중원이 낙양으로 옮겨간다. 왜 낙양에 오래 머무르는 것을 선택하고 장안을 택하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학술계에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그중 마량회(馬良悔) 선생의 논술은 증거가 충분하고, 추리도 타당하여 참고가치가 크다. 그는 서경 장안은 대당정권의 정치중심이었고, 당고조, 당태종, 당고종등 선제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 모든 것은 권력탈취를 꿈꾸는 무측천에게 있어서 무언의 침중한 정신적 압력이 된다. 그들의 앞에 서면 무측천은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을 직접 대면할 용기가 없어, 멀리 장안을 떠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무측천의 죄의식은 완화될 수 있고, 정신적인 압력도 감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무측천은 계속하여 연호를 바꾼다. 당고종의 사망부터 신룡정변까지 모두 18개의 연호를 사용한다. 계속 연호를 바꿈으로써, 자신의 내심에 있는 죄책감을 덜고자 했다. 불경, 상서(祥瑞)등 일련의 수단으로 대거 선전하면서, 무측천은 이당정권을 철저히 버리고, 자신의 새 정권을 건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구월 구일 임오(壬午), 당나라를 끝내고, 국호를 주로 한다. 연호는 천수로 하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을유, 존호를 올려 성신황제(聖神皇帝)라 한다. 황제는 황사(皇嗣, 황태자)로 격하시킨다. 병술, 처음 무씨칠묘(武氏七廟)를 신도에 건립한다."


설사 전체 대주기간동안 무측천은 계속 불교의 역량을 빌어 자신의 통치합법성을 획득하고자 했고, 동시에 계속 자신에게 "성신황제", "금륜성신황제", "월고금륜성신황제(越古金輪聖神皇帝)"등 칭호를 붙였다. 무측천은 계속 연호를 바꾸고 칭호를 추가함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제고하고자 하고, 더 많은 심리적 안정을 얻으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심의 죄책감을 덜고자 했다.


만년의 무측천은 죄책감이 더욱 강렬해진다. 후게자를 선택하는 문제에서, 대신 적인걸의 의견을 받아들여, 여릉왕 이현을 멀리 떨어진 방주(房州)에서 신도 낙양으로 데려와 황태자로 세운다. 이때부터 이당왕조로의 회귀가 정식 시작되는 것이다. 성력3년 오월 계축, 무측천은 연호를 "구시(久視)"로 한다. 그리고 '천책금륜대성(天冊金輪大聖)"의 칭호를 없앤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정삭으로 돌아간다.


중국 고대의 정치생활에서 정삭(正朔)을 바꾸는 것은 의미가 아주 중대하다. 국가정권교체의 중요한 표지이다. 성력3년의 일련의 정치활동은 무측천 심리상황의 중요한 체현이다. 즉 무측천이 이당왕조로 회귀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다음 해, 무측천은 정치중심을 신도 낙양에서 고도 장안으로 돌아간다. 연호는 '장안'으로 한다. 이는 무측천의 내심에서 이당정권으로 철저히 회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후 장안2년, 무측천은 대사면령을 내리고, 내준신(來俊臣)등 혹리들이 만들어낸 억울한 사건들을 정리한다.


신령원년 십이월 임인, 무측천은 상양궁에서 붕어한다. 향년 82세이다. "유제(遺制): 거제호(去帝號), 칭측천대성황후(稱則天大聖皇后), 왕소이족급저수량한원친속개사지(王蕭二族及褚遂良韓瑗親屬皆赦之)" 무측천은 스스로 황제 칭호를 버리고, 황후로 불러달라고 한다. 그리고 왕황후, 소숙비의 일족과 저수량, 한원등 대신들의 죄명을 사면해준다. 주로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일 것이다.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죄신을 사면한 것은 무측천 내면의 이당정권으로 회귀하는 마지막 한 걸음이었다. 그리고 당고종과 건릉에 합장하는 것을 이루는 관건적인 한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