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무측천과 모친의 관계

중은우시 2018. 12. 1. 19:26

글: 일득재주(一得齎主)


<전당시>에는 무측천의 시 한 수가 수록되어 있다. 제목은 <종가행소림사(從駕行小林寺)>이고 전문은 다음과 같다:


陪銮游禁苑,侍赏出兰闱。云偃攒峰盖,霞低插浪


日宫疏涧户,月殿启岩扉。金轮转金地,香阁曳香衣。


铎吟轻吹发,幡摇薄雾霏。昔遇焚芝火,山红连野飞。


花台无半影,莲塔有全辉。实赖能仁力,攸资善世威。


慈缘兴福绪,于此罄归依。风枝不可静,泣血竟何追。



이 시는 않은 책에서 그저 보통의 여행시로 소개한다. 무측천이 쓴 <유구륭담>등의 시와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실 그렇지 않다. 이 시는 일반적은 여행시가 아니다. 앞뒤로 적지 않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전당시>에는 이 시의 앞에 서문을 써놓았다: "선비(先妃)가 지은 곳을 보니 더욱 감상에 젖어 처량해졌다. 이를 주제로 시를 써서 비회(悲懷)한 마음을 읊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비'는 수나라나 당나라의 비빈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녀들이라면 무측천이 더욱 감상에 젖을일이 없다. 이 '선비'는 바로 무측천의 모친 양씨(楊氏)를 가리킨다. 양씨가 죽은 후, 무측천은 황제로 하여금 부친 무사확(武士彟)을 태원왕(太原王)에 봉하게 한다. 그래서 그녀의 모친은 '태원왕비(太原王妃)'가 된 것이다.


무측천의 모친 양씨와 부친 무사확은 중간에 만나 부부가 되었다. 무사확의 원부인은 상리씨(相里氏)로 무원경(武元慶)과 무원상(武元爽)의 두 아들을 낳았다. 양씨는 43살의 나이로 무사확에게 시집을 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양씨가 이전에 이미 결혼했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사서에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조혼하던 시기에 43살까지 노처녀로 남아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무측천의 모친은 이미 나이가 많았지만, 자식을 낳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짧은 몇년동안 연이어 3명의 딸을 낳는다. 그중 둘째딸이 바로 무측천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측천이 태어났을 때, 양씨는 분명히 실망이 컸을 것이다. 왜냐하면 연이어 딸만 낳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필요했다. 그래야 자신이 믿고 의지할 수 있다. 누가 알았으랴 이 어린 여자아이가 나중에 전체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가 될 줄은. 비록 그녀는 그 날을 보지 못했지만, 양씨는 생전에 영국부인(榮國夫人)에 봉해지는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녀는 아마도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무측천의 부친 무사확은 비교적 일찍 죽었다. 그의 전처의 두 아들인 무원경, 무원상은 당시에 이미 성인이 되어 있었고, 양씨라는 계모와 무측천 자매에 대하여 아주 악독하게 대한다. 무측천이 황후에 오른 후, 오빠 두 명도 그 덕을 본다. 비록 큰 관직은 아니지만, 중간쯤 되는 관직을 얻는다. 하나는 사위소경(司衛少卿), 다른 하나는 종정소경(宗正少卿), 모두 4품이다.


한번은 양씨가 주연을 열어 두 오빠도 부른다. 양씨는 옛날 일을 떠올리며, 참지못하고 약간 비웃는 끼가 담긴 말을 해버린다: "아직도 옛날의 일들을 기억하는가? 지금 너희는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어떻게생각하는가?" 


기실 이런 말은 소진이 성공한 후 그이 형수에게 물어본 바 있다: "당초에 그렇게 오만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공손합니까?" 소진의 형수는 바로 땅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땅바닥에 붙이고 말한다: "지금은 작은 도련님이 지위도 높고 돈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측천의 이 두 오빠는 고집이 있었다. 자신들이 어떤 처지인지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이렇게 큰소리친다: "우리가 관직에 나간 것은 공신자제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황후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양씨는 그 말을 닫고 화를 낸다. 그 결과는 심각했다. 그녀는 즉시 무측천에게 이야기한다.


무측천도 마음이 아주 독하다. 소위 '한끼밥의 은혜라도 반드시 갚고, 한번 째려본 원한도 반드시 갚는다." 하늘높은 줄 모르던 두 오빠는 그녀의 철완을 맛보게 된다. 바로 조서가 내려가서 두 오빠는 멀리 유배를 간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유배지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 둘을 죽여버리고 만다. 무측천과 그녀의 모친은 수십년 묵혀두었던 마음 속의 원한을 비로소 풒었다. 그리고 무측천의 이 조치는 일거양득이었다. 당고종의 앞에서 신임을 얻게 된다. 황후가 정사를 어지럽히는 것은 왕왕 자신의 친정사람들을 임명하면서 시작된다. 외척이 권력을 잡는 것은 조정이 극히 꺼리는 것이다. 무측천이 직접 자신의 '오빠들'을 제거해버리니, 다른 사람이야 그들 사이의 은원을 알 리가 없다. 모두 무측천이 '대의멸친'했다고 여긴다. 아주 공정하고 현명하다고 칭찬을 듣는다. 그리하여 당고종으로부터 더욱 총애를 받는다.


그러나, 나중에 이어진 일은 무측천의 모친 양씨를 계속 기분좋게 하지 못했다. 무측천의 언니는 한국부인(韓國夫人)에 봉해졌는데, 일찌기 하란월석(賀蘭越石)에게 시집가서 1남1녀를 낳았다. 아들은 아주 잘생긴 미남 하란민지(賀蘭敏之)이고, 딸은 위국부인(魏國夫人)에 봉해진다. 한국부인은 일찌감치 남편이 죽어서, 풍류과부가 된다. 그녀의 언니는 성숙한 과부이고 언니의 딸은 갓피어난 꽃같은 어린 나이이다. 둘은 자주 궁중을 출입하며 금방 당고종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어찌 자신의 침대 위에서 다른 사람이 코골며 자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자신의 친언니라 해도 무측천은 용서할 수 없었다. 금방 한국부인은 이유도 모르게 죽어버리고, 위국부인도 금방 독이 든 육탕을 먹고 칠교에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무측천은 또 한번 '일거양득'의 장면을 연출한다. 그 책임을 자신의 사촌오빠들인 무유량(武惟良)과 무회운(武懷運)에게 떠넘긴 것이다.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무유량을 죽이는 건 별 게 아니었다. 어쨌든 무씨집안 사람들은 양씨를 무시했으니까. 그러나 큰 딸 한국부인과 외손녀 위국부인을 죽여버린 것에 대하여는 양씨가 분명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때의 모녀관계는 예전처럼 좋지 못했다.


이때 양씨의 가족중에서 무측천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한국부인이 남긴 아들 하란민지 뿐이었다. 과거 평서에 항상 말한다: "큰아들, 큰손자는 할머니의 목숨줄이다." 하란민지는 양씨의 첫번째 외손이다. 그러니 자연히 더욱 총애하게 된다. 당연히 이치상으로 따지면, 양씨의 외손은 하란민지만이 아니다. 무측천이 낳은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현(李顯), 이단(李旦)도 모두 그녀의 외손이다. 그러나 이 4명은 황실의 자손들이고 궁궐안에 있어서, 양씨가 보고싶어도 보기가 어렵다. 게다가 하란민지는 부친이 일찍 죽어서 양씨는 그를 더욱 아낀다.


하란민지는 무씨집안의 미모의 유전인자를 이어받아, 아주 잘생겼다. 무측천은 자신의 모친의 체면을 봐서 처음에는 그를 가만히 놔두고 잘 보살펴준다. 그리고 그에게 무(武)씨성을 주어, 주국공(周國公)의 작위를 세습하게 하고 홍문관 수사로 들어가게 해준다. 그는 무씨집안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러나 그는 전형적인 "유낭생(有娘生), 몰다교(沒爹敎)"의 인물이다. 일찌기 부친을 잃고 아무런 가르침을 받지 못한다. 게다가 양씨가 너무 편애하는 바람이 성격이 광망하고 괴이해진다. 그래서 곳곳을 다니면서 말썽을 피운다.


하란민지는 모친과 여동생이 모두 무측천의 손에 죽었다. 그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자치통감>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당고종이 일지기 그에게 여동생 위국부인이 급사한 일을 얘기했는데, 하란민지는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비록 무측천이 했다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무측천은 일찌기 그에 대하여 경계심을 갖는다. 그녀는 '얘는 나를 의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란민지는 마음 속으로 원한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나이가 어리고 유치했다. 그가 취한 일련의 보복행동은 그저 개구장이의 장난같다. 주로 한 가지 목적이다. 무측천이 화나게 만드는 것이다.


당연히, 개구장이의 장난같다고 했지만, 하란민지가 한 짓은 절대로 유리 몇 장을 깨는 수준이 아니었다. 먼저, 무측천의 장남 이홍은 이미 양사검(楊思儉)의 딸과 정혼했다. 양사검의 딸은 고귀한 가문 출신에, 미모도 출중했다. 경상에서 유명한 미인이었다. 바로 그녀가 태자비가 되려고 할 때, 하란민지는 기회를 잡아 그녀를 강간한다. 비록 아직 혼인까지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홍으로서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부득이 배씨(裴氏)의 딸로 새로 뽑아서 태자비로 삼는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하란민지는 심지어 무측천이 아끼는 딸인 태평공주에게까지 손을 뻗는다. 사후에 무측천이 공표한 죄상에는 그가 '태평공주의 궁녀를 간음했다'라고 적었지만, 조금만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저 완곡한 표현이다. 만일 정말 태평공주의 궁녀를 강간했다면, 그 시대에 그게 무슨 큰 죄인가. 그래서 하란민지가 한 가장 큰 죄는 당시 겨우 8살된 태평공주를 간음한 것이다.


이제 무측천도 더 이상 참지 못한다. 그녀는 분노하여 하란민지의 5대죄상을 선포한다. 위의 두 가지 이외에 3건이 더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하나, 무측천이 궁에서 비단을 주어서 하란민지로 하여금 불상을 만들어 양씨의 복을 빌게 했는데, 하란민지는 팔아서 자기가 마음대로 써버렸다.

둘, 양씨 장례기간동안 하란민지는 상복을 입지 않고 기생과 놀며 음악을 들었다.

셋, 자신의 외조모인 양씨와 간음했다.


지금 보자면 앞의 두 가지는 무슨 대죄가 아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장례와 효도를 중시했고 '위법'한 일이다. 당연히 가장 놀라운 죄는 하란민지가 자신의 외할머니와 간음했다는 죄상이다. 이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무측천은 더욱 이를 갈았다.


양씨는 사망할 때 93세였다. 80여세의 고령으로 어린 외손자와 관계를 맺다니 노익장도 그런 노익장이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무측천도 7,8십살때 여전히 장역지, 장종창 형제와 침상에서 끌어안고 놀았다. 무측천과 그녀의 모친은 이 방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통상사람을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일은 무측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무측천이 절대 고의로 그런 일을 날조해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을 얘기하는 것은 그녀의 모친 그리고 그녀 자신의 명성에도 모두 나쁜 녕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추악한 일을 모조리 털어놓은 것은 한가지 해석밖에 나오지 않는다. 무측천이 당시에 너무 화가 났었다는 것이다. 반드시 하란민지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하란민지는 언니인 한국부인의 유일한 아들이다. 한국부인은 당고종과도 관계를 맺었다. 만일 죄행이 부족하면, 당고종이 분명 옛 정을 떠올려서, 하란민지를 살려주라고 할 수가 있다. 게다가 여러 신하들이 계속 말리거나, 양씨의 이름을 들고 나올 수도 있다. 그러면, 하란민지는 분명히 사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측천은 그의 모든 악행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자신의 외조모에게 근본적으로 불효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무측천이 이렇게 결심을 내렸으면, 하란민지의 최후는 이미 정해졌다. 금방 광동으로 유배가고, 소주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이미 밀지를 받은 사람이 말고삐로 목을 졸라 죽인다. 이때는 함형2년 육월의 일이다. 양씨가 사망한 때로부터 1년이 지나지 않았을 대이다.


함형3년(672년), 당고종과 무측천은 소림사로 간다. 시에서 쓴 것과 같이, 무측천이 이곳에 온 것은 단순히 놀러온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돌아가신 모친 양씨가 이곳에 탑을 하나 세웠다는 것이다. 이 탑은 원래 10층으로 만들려고 했고, 하생미륵불납(下生彌勒佛塔)이라고 이름붙였다. 이런 말이 있다. "사람 목숨을 하나 구해주는 것이 칠층석탑을 쌓는 것보다 공덕이 크다." 이는 불가에서 탑을 짓는 것이 아주 큰 공덕으로 본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측천이 가보니 탑이 아직 완공되지 못했다. 모친이 생전에 해주었던 일들을 생각하니, 비통한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시의 마지막 문구인 "풍지불가정(風枝不可靜), 읍혈경하추(泣血竟何追)"는 바로 한나라 한영의 <한시외전>의 전고에서 따온 것이다: "나무는 조용히 있으려고 하나 바람이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 아들은 모시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나가면 쫓아갈 수가 없다. 그것은 세월이다. 떠나가면 볼 수가 없다. 그것은 부모이다."


아마도 생전에 무측천과 모친 양씨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서로 좋지 않은 일도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양씨가 죽고 나니 그녀가 생전에 가장 아끼던 하란민지도 무측천이 죽여버렸다. 비록 하란민지의 악행이 엄청나지만 무측천은 내심으로 분명 돌아가신 모친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무측천은 마음이 항상 철석과 같았지만, 자신의 모친에 대하여는 그녀의 마음도 세상의 모든 딸들 처럼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