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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중국과 북한의 국경선획정 비화: 백두산과 압록강

by 중은우시 2022. 2. 16.

작자: 일명(佚名)

 

백두산(장백산)은 지금까지 만주족이 기원한 '용맥(龍脈)'으로 여겨져 왔다. 장백산에 들어가서 산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청나라조정은 이런 활동이 용맥을 끊을 수 있다는 우려를 해서, 동북지방에 대하여 200여년에 걸친 봉금정책(封禁政策)을 실시하여, 장백산(백두산)지구, 압록강, 토문강등 중국-조선변경지역을 '봉금'의 핵심지구로 삼아 진입을 엄금했다. 나중에 오랫동안의 봉금정책으로 동북변방지역은 사는 사람이 드물어져서 국경방어가 느슨해진다. 그리하여 심각한 국방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특히 청나라 도광이후 제정러시아등 열강의 침략확장으로 이 위기는 갈수록 심각해진다. 그리하여 조선의 변방주민들이 불법월경하는 사례가 늘어나게 된다.

 

나중에 1860년부터 1870년까지, 조선의 북부지역은 여러해동안의 자연재해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된다. 많은 조선인들은 생계를 위하여, 불법적으로 압록강, 도문강을 건너 월경하고, 건너편의 중국 봉천, 길림등의 황무지를 개간한다. 사람수가 점점 많아지게 되고, 개간토지도 갈수록 늘어난다. 이는 청나라에 여러가지 정치,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나중에 청나라조정은 1867년 이민실변정책(移民實邊政策)을 실시하여, 한인들이 동북으로 이주하는 것을 허용한다. 나중에 조선에서의 이민에 대한 정책도 완화되어 그들이 "역복치발(易服雉髮)"하게 하고, 허가서를 받아 세금을 납부하며, 청나라의 국적을 취득한다는 전제하에서 동북에 남을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 문서를 조선조정에 통보한다. 1882년 팔월, 조선국왕은 청나라정부에 중국에서 불법개간하여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송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고, 청나라조정은 조선조정의 이런 요청을 허락한다.

 

다만 나중에 조선조정은 변방의 월경주민을 송환해가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목극등(穆克登)의 비를 근거로 하여, 1883년 칠월 토문(土門), 두만(豆滿)은 "일강지명(一江之名)" 즉 같은 강의 두 이름이 아니라, "이위양강(而爲兩江)" 두 개의 서로 다른 강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중국연변지역의 해란강을 토문강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렇게 주장함에 따라 원래 불법월경했다는 주민들을 송환할 필요가 없게 될 뿐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조선의 월경주민들이 나타나게 만들었다. 이 조치는 나중의 '간도'문제의 발단이 된다. 1885년 육월, 조선은 청나라조정에 글을 보내 다시 한번 토문, 두만은 서로 다른 두 강이라고 주장하면서 해란강의 남쪽인 연변지구는 원래 조선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쌍방의 국경선을 명확히 하자고 주장하게 된다. 1885년 9월 30일부터 11월 29일까지, 청나라와 조선의 양국은 사신을 파견하여 공동으로 국경선을 획정하는 협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쌍방의 의견차이가 너무나 컸다. 첫째, 강의 이름에 관하여, 중국은 토문(土門), 두만, 토문(土們)은 모두 하나의 강의 서로 다른 한자표기라고 주장하고, 조선은 토문과 두만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강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정원(正源)에 관하여 중국측은 홍단수(紅丹水)를 토문강의 정원이라고 주장하며 이 강을 가지고 국경선을 획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조선측에서는 홍토산수(紅土山水)를 토문강의 정원이라고 주장하며 이 강을 가지고 국경선을 획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후 1950년대후반, 중국에 대기근이 발생하며 국가의 재정능력이 부족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북한에 대한 원조도 줄어들었다. 북한은 여러번 중국에 사람을 보내어 압록강을 중국과 북한이 동시에 보유하는 경계선인 강으로 하자고 주장한다. 이유는 북한의 북부변경지역도 발전시켜야 하며, 전력보장이 없으면 안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압록강의 수력발전을 발전시키고자 했다(이때 중국은 이미 압록강 상류의 집안(集安)에 운봉발전소(雲峰發電站)를 만들고 있었다. 당시 중국과 북한의 우의와 강을 가로지르는 댐의 한쪽 끝은 북한의 국토와 맞닿아 있게 되므로, 중국은 이 발전소에서 나오는 발전량의 절반을 북한에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었다). 당시 중국정부와 북한의 김씨정권은 '밀월기'였다. 그리하여, '동음일강수(同飮一江水)' 같은 강의 물을 마시는 관계인 압록강을 중국북한 양국의 국경선으로 하자는 요구에 중국이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는 북한이 득촌진척(得寸進尺)하게 된다. 압록강의 발원지가 백두산 천지라는 것을 이유로 1960년대 초기, 다시 중국정부에 백두산을 둘로 나누어, 중국과 북한의 쌍방이 각각 절반씩 점유하자고 요구하게 된다. 중국정부를 설득하기 위하여, 북한은 양국이 모두 사회주의진영의 형제국가라는 것을 이유로 들며 백두산은 일찌기 북한의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장국의 혁명사업발원지라는 것도 내세웠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의 항일연군에 가입하면서 목숨을 내걸고 중국인민을 위해 일본군과 싸웠다는 것을 강조했다. 지금 김일성은 북한의 수상이고, 그가 백두산에 남긴 '혁명성지'는 북한인민들이 대대로 숭상하는 곳이다. 그래서 중국정부와 인민이 북한정부와 인민의 자신의 지도자에 대한 심후한 무산계급감정을 이해해주면 좋겠다는 등등의 말까지 했다.

 

그리하여, 1962년 모택동은 주은래로 하여금 북한을 방문하게 한다. 그리고 김일성과 <중조변계조약(中條邊界條約)>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모두 5개 조문인데, 제1조는 주로 양국국경선을 나누는 기준이고, 제2조는 경계선인 강의 섬과 사주(沙洲)의 귀속은 모두 수면의 너비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고, 제3조는 경계인 강물의 수역은 양국이 공동관리, 공동사용하며, 여기에는 항행, 어렵(漁獵)과 강물사용등을 포함한다. 압록강입구밖의 수역획정원칙도 규정했다. 제4조는 주로 조약체결후에 양국의 국경선공동검증위원회를 성립하여 공동검증한다는 것이고, 제5조는 문서교환방식이다.

 

비록 조약에서 백두산의 경계구분 비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압록강의 원두(源頭)인 백두산 천지는 본 조약의 "경계선인 강의 수역은 양국이 공동관리한다"는 획정원칙의 범위내에 들어갔다. 그후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중조변계조약>의 서명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백두산천지는 둘로 나뉘어진다. 중국이 48%를 점유하고, 북한이 52%를 점유하는 것으로(일설에는 북한이 53%라고도 한다). 동시에 압록강의 원두인 천지의 분수령의 동쪽의 3개 봉우리도 북한에 귀속된다. 백두산 천지는 백두산의 정상에 있다. 화산폭발로 만들어진 9개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는데, 가장 높은 봉우리는 백두봉(병사봉)이다. 이 백두봉은 북한이 귀속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백두봉을 장군봉으로 개칭한다.

 

압록강에는 크고 작은 백개이상의 섬이 있다. 어떤 것은 중국쪽으로 치우쳐 있어, 물이 적을 때는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양빈(楊斌)이 개발하려고 계획했던 위화도(威化島)와 압록강입구의 최대의 섬인 신도(薪島)는 현재 북한에 귀속되어 있다. 현재 북한에 속하는 그 섬들은 이전에 중국에 속했었다. 신도는 썰물때는 완전히 중국의 해안선과 연결된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1950년대에 북한에 넘겨주었다. 신도를 북한에 넘겨준 것은 주항도(主航道)와 출해구(出海口)를 북한에 넘겨준 셈이 되었다. 양국 관계가 나쁠 때 북한이 봉쇄하면 중국은 아주 곤란해지게 된 것이다. 손실이 가장 큰 쪽은 당연히 단둥시와 랴오닝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