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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고구려(高勾麗)가 멸망한 후, 고구려유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by 중은우시 2020. 11. 28.

글: 대사자(大獅子)

 

고구려는 고대 동북아에서 확실히 영향력이 있었던 대국이다. 만주와 한반도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여인과 예맥인으로 구성된 국가였다. 기원전37년에 건국하여, 668년에 멸망한다. 전후로 700여년간 존속했다. 4-6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한반도남부의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으로 불리웠다. 수나라때, 수양제는 일찌기 3차례에 걸쳐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한 바 있으나, "사자상침(死者相枕), 취예영로(臭穢盈路), 천하소동(天下騷動)"(죽은 자가 서로 겹쳐 있고, 시체썩은 악취가 길에 가득하며, 천하에 소란이 일어난다). 백성들은 전쟁으로 고통이 컸고, 대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결국 고구려는 존속하나, 수왕조는 붕괴된다.

 

당나라에 이르러, 고구려는 남방의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는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태종은 어가친정하여, 고구려에 중대한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물자조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당군은 어쩔 수 없이 철수한다. 야사에 따르면,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는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당군이 회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태종은 붕어한다.

 

당고종이 즉위한 후, 계속 고구려를 공격한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일본지원군을 물리친다. 총장원년(668년) 구월, 당군이 진격하여, 고구려왕 고장(高藏)을 생포한다. 이렇게 동북아강국 고구려는 멸망하게 된다.

 

고구려라는 역사가 유구하고, 영토가 광활한 대국, 인구가 백만이 넘는 나라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멸망한 후, 백만유민은 어디로 갔을까?

 

당나라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한 후, 대량의 고구려인을 노략하여 중원으로 간다. <당회요> 권95 <고구려>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무릇 요주, 개주, 암주의 3개주의 호구를 내지로 옮기게 하니, 전후로 7만여명이다." <구당서. 방현령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달이 지나기 전에, 요동을 함락시키고, 전후로 포획한 사람이 수십만이다. 여러 주에 나누어 보내니, 불만이 있는 곳이 없었다."

 

당고종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인들이 나라를 부흥시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대규모의 민족이주정책을 실시한다. 동북과 한반도의 고구려인을 내지로 이주시킨다. <구당서.고종본기>에는 이렇게 적었다: "총장2년, 오월 경자, 고구려의 이만팔천이백호, 수레 천팔십승, 소 삼천삼백두, 말 이천구백필, 낙타 육십두를 내지로 옮긴다. 내주(萊州), 거주(莒州)의 2개주로 차례로 보냈다. 많은 수를 강(江)으로 보낸다." <신당서.고구려전>에는 "총장2년, 고구려백성 삼만을 강회(江淮)로 이주시켰다.", <삼국사기.신라본기권6>, "그리하여 영공(英公)은 왕 보장(寶藏), 왕자 복남(福男), 덕남(德南), 대신등 10여만명과 당으로 돌아갔다."

 

서로 다른 사료에서 시간과 인구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당고종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인 2-3만호, 10여만명을 내지로 이주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지로 이주한 고구려인들 중에는 고구려의 왕공귀족에 대하여는 우대해주었다. 당에 투항한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고장(高藏)은 "사평태상백(思平太常伯)"이 되고, 권신 천남산(泉男産)은 사재소경(司宰少卿)을 받고, 반란을 일으켜 투항했던 천남생(泉男生)은 "사지절(使持節), 요동대도독(遼東大都督), 상주국(上柱國), 현도군개국공(玄菟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를 받는다. 오직 죽어라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투항했던 천남건(泉男建)등은 유배를 간다.

 

일반적인 평민포로들은 그다지 운이 좋지 못했다. 대부분은 끌려가서 노비가 된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그중 당군에 항거한 자들은 노비로 만들어 1만4천명을 먼저 유주로 보내고, 다시 여러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고종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에도 같은 원칙에 의해 장병, 공신들에게 노비로 주었을 것이다. 운이 좋은 경우라면 자유민신분이겠지만, 어쨌든 고향을 꺼나서 황무지를 개간해야했을 것이다.

 

망국이후에 스스로 생계를 찾아서 중원으로 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봉의2년(677), 당나라는 고장을 고구려옛땅으로 돌려보낸다. "고장을 요동도독에 임명하여,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안정시켰다." 그후 고장은 말갈과 결탁하여, 복국을 꾀한다. 그 결과, "일이 발각되어, 불러들여서 공주(邛州)로 유배를 보낸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고장을 따르던 일부 고구려인을 "하남, 농우의 여러 주로 나누어 보냈다."

 

장안, 낙양에서, 20세기이래, 연이어 고구려유민의 묘장이 발견된다. 고자(高慈), 고성문(高性文) 부자묘, 이타인묘(李他仁墓), 이은지묘(李隱之墓)등. 묘지명을 살펴보면, 제1대의 고구려유민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었다. 제2대, 제3대에 이르러서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옅어지고, 그들의 후손은 중국에 융합되어버린다.

 

대당을 위하여 서역을 지킨 저명한 장군 고선지(高仙芝)는 바로 고구려의 후예이다. 그의 부친인 고사계(高舍鷄)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중원으로 이주한 사람이며 무관이 되었다. 고선지는 어려서부터 군영에서 자랐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고, 병법을 잘 알았다. 

 

신라

 

한반도 남부의 신라정권은 고구려정권과 장기간 대치하여 왔다. 고구려인중 반란을 일으켜 도망쳐 신라로 가거나, 신라에 포로로 잡혀 신라에 입적한 경우도 있었다.

 

신라와 당이 손을 잡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신라는 원래 고구려에 속했던 대량의 영토를 차지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가 점령한 군현은 160여개이다. 이들 군현의 주민은 자연히 신라인으로 변신한다.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당군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때, "고구려인 칠천을 포로로 잡았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가족을 이끌고, 속민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당나라 건봉원년(666년), 고구려인 천연정토(泉淵凈土)는 "성20개, 호 칠백육십삼, 구 삼천오백사십삼명을 데리고 투항해왔다." 총장2년(669) 봄, 고장의 서자인 고안승(高安勝)이 "사천여호를 이끌고 산라에 투항했다."

 

봉의2년(677), 고장이 고구려로 돌아간 후, 복국을 기도하다가 진압된 후, 적지 않은 고구려인이 신라로 도망친다.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의 옆에 있는 옛성에 남았다.왕왕 신라로 도망쳤다."

 

당나라 개원22년(734) 당나라는 패강(浿江, 지금의 대동강?)이남의 5개주의 토지를 신라에 넘겨준다. 이 지방의 고구려인은 약 3만여호였고, 이들은 신라인이 된다.

 

신라는 9세기이후 쇠락하고, 국가가 분열된다. 한반도는 후삼국시대에 접어든다. 최후에 왕씨고려가 한반도를 다시 통일한다. 원말명초, 신라 사공(司空) 이한(李翰)의 후손인 이성계(李成桂)가 이씨조선을 건립한다. 이씨조선은 현재 북한, 남한의 전신이다. 

 

발해국

 

698년, 대조영은 동북에서 발해국을 건립한다. 그때는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이 지난 때였다. 발해국의 많은 영토는 옛고구려의 땅이다. 당나라는 일부 고구려인을 이주시켰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은 남아 있었다. 발해국이 성립된 후, 그 땅의 고구려인들은 발해국인이 된다. <구당서.발해말갈전>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고구려의 남은 사람은 모조리 발해에 귀속된다."

 

돌궐

 

돌궐은 당나라초기의 강대한 세력이다. "돌궐족이 강성하여, 동으로는 거란, 실위, 서로는 토곡혼, 고창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속국(臣屬國)이 된다. 병력이 백여만에 이르러, 북적(北狄)중 사상유례없이 강성했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돌궐칸국은 당나라에 계속 타격을 받아 와해되었다. 그러나 돌궐의 각부는 여전히 북방초원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나중에 후돌궐칸국으로 합치는데, 고구려유민중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가담한다. <구당서.고려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옛 호(戶)들 중 안동(安東)에 기재된 자들이 점점 줄어들었는데, 각각 돌궐과 말갈에 나누어 갔다." <구당서.돌궐전>에는 개원연간, 돌궐부에서 중용된 고구려의 망명귀족으로 고문간(高文簡), 고공의(高拱毅)등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고구려는 일찌감치 일본과 내왕했다. 일본의 초기이민중 "도래인(渡來人)"의 대다수는 한반도에서 왔다. 그중 고구려에서 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승려 혜변(惠便), 혜자(惠慈), 승륭(僧隆), 운총(雲聰), 담징(曇徵), 법정(法定)등이 일본으로 가서 불법을 전한다. 승려들 중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속인들은 더욱 많을 것이다. 일본의 민속문화, 벼심기기술, 도기제작은 모두 고구려의 영향을 받는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인 1799명이 무장국(武藏國)으로 이주했다." 684년, 신라에 투항한 고구려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신라조정은 사람을 보내 진압했고, 적지 않은 고구려인들은 다시 신라에서 일본으로 도망쳤다. 686년, 일본은 상륙국(常陸國)에 이들 난민을 안치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