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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오대십국)

후주(後周)의 개국황제 곽위(郭威)는 왜 시영(柴榮)에게 황위를 넘겨주었을까?

by 중은우시 2022. 8. 22.

글: 격와랍(格瓦拉)

곽위

중국의 기나긴 역사의 강물에서, 존속기간이 아주 짧은 왕조가 출현한 바 있다(왕조는 정통을 대표한다. 모든 정권을 왕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특히 오대십국시기의 후한(後漢)이 심했다. 더욱 불가사의한 점은 후한이 가장 단명한 왕조로서 비록 존속기간이 4년밖에 되지 않는데, 그 기간동안 2.5명의 황제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후한은 왜 이렇게 단명했을까? 바꾸어 말하면, 후한의 신속한 멸망을 촉진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 모든 것은 개국황제인 유지원의 출세부터 시작해야 한다.

 

 유지원은 당나라말기에 출생했고, 본인은 사타족(沙陀族)으로 한족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신분이 하천한 마노(馬奴)였다. 나중에 하동의 대장 석경당(石敬瑭)과 인연을 맺어 발탁된 후, 나중에는 후진에서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북평왕(北平王)이라는 높은 직위에 오른다. 무인으로서, 유지원은 원래 황제의 운명이 아니었다. 그가 등극하게 된 원인은 완전히 거란인들 덕분이었다.

 

947년, 거란이 남하하여 후진을 멸망시킨 후 중원지역에서 온갖 행패를 부린다. 그리하여 중원의 군민들이 저항을 해서 그들을 쫓아낸다. 거란군이 황급히 북으로 도망치자, 유지원은 그 기회를 틈타 "하산적도(下山摘桃, 산에서 내려와 복숭아를 따다)"한 것이다. 한편으로 배후에서 거란군을 추격하며, 한편으로 태원(太原)에서 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한다. 연말에는 다시 개봉으로 진격하여 정식으로 중원의 황제가 된다.

 

그러나, 유지원은 개국황제이지만, 성공, 치국은 모두 폭력에 의존했다. 자신은 천하인들의 마음을 얻을 덕행이나 인후함이 없었다. 그래서 천하의 번진, 군민들 중에는 그에 불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유지원의 큰아들 유지훈(劉知訓)은 26살에 요절했다. 어쩔 수 없이 유지원은 둘째아들 유승우(劉承佑)를 개봉부윤(開封府尹, 태자)에 앉힌다. 아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비라는 말이 있듯이, 유지원도 유승우가 능력있는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임종전에 보정대신(輔政大臣)을 임명하는데, 대부분 소인들이었다. 그래서 유승우가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하는 혼란에 빠진다.

 

원래, 유지원이 붕어하기 전인 948년초에 유조를 내려 재상 양빈(楊邠), 사홍조(史弘肇), 소봉길(蘇逢吉)을 보정대신으로 삼아 어린 황제를 보좌하게 한다. 그리고 대장 곽위(郭威)에게는 반역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긴다. 그러나, 소봉길은 사람됨이 음험했고, 양빈, 사홍조는 공로를 내세워 교만했고, 처음부터 보정대신들간에 마음이 맞지 않았다. 세 사람중 특히 양빈의 지위가 가장 높았는데, 행위는 가장 창광(猖狂)하여 어린 황제를 눈아래 두지 않고 무시했다.

 

한번은, 양빈이 동삼사사(同三司使) 왕장(王章)과 조정에서 논의를 하고 있는데, 유승우가 자신의 생각을 한 마디 말하자, 양빈은 크게 불만을 갖는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입을 닥치고, 정무에 끼어들지 말라고 요구한다. 이는 유승우의 입장은 난처하게 만들었고, 분노하게 된다. 

 

젊은이는 왕왕 충동적이다. 결과를 신경쓰지 않고 일을 벌인다. 제왕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유승우는 양빈에게 수모를 당한 후, 마음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고, 기회를 틈타 양빈을 죽이려고 마음먹는다. 얼마 후, 양빈이 다시 유승우에게 그가 총애하던 비(妃) 경씨(耿氏)를 황후의 예로 장례치르려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언사도 격렬했다. 이는 철저히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행동이었다. 건우3년(950년) 십일월, 더 이상 참지못한 유승우는 조당(朝堂)에서 양빈을 주살한다. 같은 날 왕장, 사홍조도 함께 죽여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겉으로 공손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악독한 소봉길 뿐이었다.

 

피를 본 유승우는 더욱 미치광이가 되어버린다. 유승우가 등극하는 그 해에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 이수정(李守貞), 영흥절도사(永興節度使) 조사관(趙思綰), 봉상절도사(鳳翔節度使) 왕경숭(王景崇)이 차례로 반란을 일으켜, 후한을 전복시키려 한다. 유승우는 곽위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서 평정하도록 명한다. 곽위는 병력을 이끌고 하중으로 가서 이수정을 토벌한다. 곽위는 전투에 능했고, 병법의 대가였다. 이수정은 패배하여 스스로 불에 타 죽는다. 영흥절도사 조사관, 봉상절도사 왕경숭은 차례로 항복한다. 그후 곽위는 거란을 북벌한다. 이런 전공으로 업도유수(鄴都留守), 천웅군절도사(天雄軍節度使), 겸 추밀사가 된다. 하북 여러 주는 실제적으로 곽위의 통제하에 들어온다.

 

곽위가 외지에 머무러는 동안, 변경에서 중대한 변고가 발생한 것이다.  곽위는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고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곽위는 가짜 조서를 만들어 유승우가 곽위에게 여러 장수들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여, 여러 장수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여러 장수들은 곽위를 황제로 추대한다. 이것이 최초의 "황포가신(黃袍加身)"이다. 이 일은 당시 일개 군관이던 조광윤(趙匡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곽위는 백전노장이었다. 명성에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막으라고 보낸 장수들은 모두 형편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곽위의 반군이 개봉으로 진격하게 된다. 유승우는 이때 마음 속으로 후회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용기를 짜내어 친정을 한다. 그러나, 칠리파(七里坡)에서 곽위의 반군에 궤멸당하고, 도망가던 도중에 시위대장 곽윤명(郭允明)에게 참살당한다. 당시 나이 21살이었다. 유승우가 죽자, 개봉의 수비군은 성문을 열고 곽위에 투항한다. 곽위는 개봉으로 들어가 국면을 통제한다.

 

유승우가 피살된 후, 곽위는 원래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나라안의 국면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으로 태후 이삼낭(李三娘)에게 청하여 수렴청정을 부탁하고, 유승우의 당형이자 무녕절도사(武寧節度使)인 유윤(劉贇)을 황제로 세운다(이때 그는 서주에 있었다). 그러나 곽위는 유윤이 정말 황제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후 북상하여 거란을 방어해야한다는 핑계를 대고 전주(澶州)로 간 후, 부하들을 시켜 자신을 황제로 옹립하게 한다. 그리고 다시 군대를 돌려 개봉으로 와 이태후를 핍박하여 승인하게 한다.

 

이태후는 스스로 자신이 되돌이킬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윤을 폐출시키고, 곽위를 감국(監國)으로 임명한다. 이때 유윤은 이제 겨우 송주(宋州)에 도착했을 때였고, 개봉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곽위는 감국의 지위에서 며칠간 있다가 951년 정월 황제를 칭하고 후주를 건국한다. 이때 폐출된 '준'황제 유윤은 송주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곽위는 이 심복지환을 제거하기 위해, 송주절도사 이홍의(李洪義)를 시켜 그를 독살한다. 유윤은 비록 '준'황제였지만, 단 하루도 용상에 앉은 적이 없다. 그래서 절반의 황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곽위가 황제에 오른다. 그런데, 유승우는 곽위가 변경으로 밀려오자, 곽위의 변경에 있는 가족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는 곽위가족 전부를 형장으로 끌고가서 죽이게 하는데, 거기에는 곽위의 성년이 된 2명의 아들과 3명의 딸, 심지어 아직 강보에 쌓인 아들까지 있었다. 시영의 성년이 된 세 아들도 이때 함께 죽는다. 

 

곽위는 아들이 모두 죽고, 조카도 없었으므로, 시영을 양자로 거두고, 시영을 개봉부윤(태자)에 앉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