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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오대십국)

전촉(前蜀): 양자(養子)로 흥하고, 양자로 망하다.

by 중은우시 2023. 2. 24.

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

 

당나라말기, 왕건(王建)은 촉(蜀)지방에 할거하면서 전촉정권을 건립한다. 왕건이 강산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그는 120여명의 양자를 거둔다. 이들은 모두 그를 위해 선봉에 서서 적진을 돌파하고, 계책을 내어, 왕건이 황제의 보좌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왕건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강산을 이들 양자들 때문에 잃게 될 줄은. 925년, 후당(後唐)의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이 병력을 파견하여 결국 전촉을 멸망시킨다. 그렇다면, 전촉의 흥망과 양자들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1. 전쟁터를 누비다.

 

안사의 난(安史之亂)이후 당나라는 전성기를 지나 쇠망의 길로 들어선다. 지방에는 강력한 번진들과 장수들이 존재하고, 조정에는 환관들이 힘을 얻는다. 이들은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앞다투어 양자들을 거두는데, 그중 왕건의 양자가 수량이 가장 많았다. 왕건은 하남(河南) 무양(舞陽) 사람이며,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일찌기 "소를 잡고, 나귀를 훔치며, 소금을 밀매하는 일"을 하였다. 나중에 왕건은 군대에 들어가, 당나라 금군(禁軍)의 주요장수가 된다. 이와 동시에 환관 전령자(田令孜)는 왕건을 양자로 삼는다. 이로 인하여 그는 이주자사(利州刺史)의 직을 얻어 외지로 부임한다.

 

왕건이 사천을 얻는 과정에서 그의 주변에 전투에 능한 장수들이 모이게 된다. 이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그는 양자로 거두는 방식을 취한다. 이들 양자는 전촉정권의 건립, 발전에 큰 공을 세운다. 예를 들어, 왕종척(王宗滌)은 "팔힘이 셌다" 그는 왕건을 도와 동천, 서천을 차지하도록 하고, 다시 병력을 이끌고 산남서도를 점령하며 관직이 절도사에 이른다. 사서의 말에 따르면 "패업을 이루는데 여러 양자들의 공이 컸다."

 

2. 전촉의 내란

 

왕건이 칭제를 했을 때 나이가 이미 60여세였다. 양자들과 비교하면 그의 친아들은 보편적으로 나이가 어렸고, 정치경험도 부족했다. 그리하여 왕건의 일부 양자들이 야심을 품으면서, 전촉의 내란이 발생하게 된다. 왕종길(王宗佶)은 본래 성이 감(甘)씨였고 양자들중 서열이 1위였다. 그리고 공로도 아주 컸으며, 관직이 재상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일당이 많아지면서 자신이 황제에 오르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왕종길은 심지어 왕건에게 "총판육군(總判六軍)"을 요구하다가, 결국 왕건에게 그 자리에서 처결당한다.

 

그후 왕건은 둘째아들 왕종의(王宗懿)를 태자로 책봉한다. 다만 왕종의는 성격이 거칠어 '구신들을 능욕하고 포악하게 굴었다.' 그리하여 공신인 당도습(唐道襲)과 충돌이 일어난다. 왕건은 급히 3명의 양자를 보내어 병력을 이끌고 진압하도록 하나, 혼전중에 태자 왕종의가 피살된다. 왕건은 양자 왕종한(王宗翰)이 고의로 태자를 죽인 것이라 의심하며, 크게 가슴아파한다. 그후 왕건은 후계자문제로 골치를 앓는다. 결국 양자 왕종필(王宗弼)의 영향하에 놀기만 좋아하는 열한째아들 왕종연(王宗衍)을 선택한다.  

 

3. 양자들이 나라를 어지럽히다.

 

왕건의 양자들은 대부분 밑바닥출신으로 자질이 높지 못했다. 그들은 장군, 재상에 오른 후,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예를 들어, 왕종훈(王宗訓)은 '탐폭불법(貪暴不法)'했고, 왕종유(王宗裕)는 '탐모재화(貪冒財貨)'했으며, 왕종신(王宗信)은 "성격이 잔혹하고 악독하며,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왕종한(王宗翰)은 "성격이 잔학하며 인색했다." 이들은 전촉에서 모두 고위관직에 있었으며, 이는 전촉의 쇠퇴를 가속화시킨다. 더욱 중요한 점은 전촉정권의 권력을 장악한 왕종필이 패류(敗類)라는 것이다.

 

왕종필의 원래 성은 위(魏)씨로 이름은 홍부(弘夫)였다. 그는 전촉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918년, 왕건이 병사한 후, 임종전에 왕종필을 보정(輔政)에 앉힌다. 왕종필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여, 전촉정권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925년 후당이 병력을 파견하여 전촉을 토벌할 때, 정권을 담당하고 있던 왕종필은 일찌감치 투항할 생각을 한다. 그는 저항을 포기하고 군대를 이끌고 퇴각한다. 그후 왕종위(王宗威), 왕종수(王宗壽)가 차례로 투항한다. 왕종필은 성도(成都)로 물러났다가 나중에 후당에 투항한다. 그러나 그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후당은 왕종필, 왕종훈(王宗勛), 왕종엄(王宗儼)을 처형한다. 기록에 따르면, "촉의 사람들은 종필의 살을 앞다투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