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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오대십국)

발정전(拔釘錢): 오대시기 후진(後晋)의 기발한 잡세

by 중은우시 2018. 10. 18.

글: 포강객(浦江客)


대당(大唐)이 태평성세는 세계에 빛났다. 그러나 전성기가 지나면서 대당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성세(盛世)는 쇠세(衰世)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쇠세는 난세(亂世)로 발전한다. 그후 당왕조를 이어 오대십국(五代十國)이 들어서고 더욱 엉망진창이 된다. 난세때, 탐관오리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백성들을 수탈했고, 가혹한 잡세가 우모(牛毛)처럼 많았다. 어떤 징수항목은 '기발'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양수(歐陽脩)는 <신오대사.조재례전>에서 후진의 탐관오리 조재례(趙在禮)가 "발정전"이라는 기발한 잡세를 거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조재례는 자가 간신(干臣)이고, 오대때 탁주(涿州) 사람이다. 그는 전후로 후당(後唐), 후진(後晋) 두 왕조에서 업도유수(鄴都留守), 흥당윤(興唐尹)을 지낸다. 그후 태녕(泰寧)등 번진의 절도사를 지낸다. 그가 가는 곳마다 저점(邸店, 가게)을 개설하고 거액의 돈을 긁어모았다. 진출제(晋出帝, 942-946)때, 조재례를 북면행영마보도우후(北面行營馬步都虞侯)에 봉하여, 군대를 이끌고 거란을 정벌하게 한다. 그러나 전공을 세우지 못하여 송주(宋州)로 좌천되어 간다. 조재례가 송주에 있을 때 백성들은 고통이 극심했다. 그가 다른 곳으로 전근된다는 소식을 듣자, 송주의 사람들은 기뻐서 서로 축하하며 이렇게 말했다: "눈에서 못을 뽑아낸 것처럼 기쁘다!" 얼마후 조재례는 원직으로 복귀하여 송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미친듯이 보복한다. 모든 백성들에게 일천(一千)의 돈을 받아내며 스스로 "발정전"이라고 이름붙인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안중정(眼中釘, 눈의 못. 우리나라의 눈엣가시라는 뜻임)"'이라는 말의 어원은 바로 이 "발정전"에 관한 고사에서 나왔고, 가장 미운 사람이나 사물을 뜻하게 된다. 후당(後唐)의 풍지(馮贄)가 쓴 <운선잡기.발정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조재례가 송주에 있을 때 불법을 저질러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다. 어느 날 조정에서 조서가 내려와 조재례를 영흥으로 전근보냈다. 백성들은 기뻐하며 서로 축하했다: '이 자가 만일 간다면, 눈에서 못을 뽑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통쾌하다1' 조재례가 그 말을 듣고 노해서, '발정'이라고 자신을 욕한 것에 보복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조정에 상소를 올려 송주에 1년 더 머물도록 청한다. 당시 조정은 한심한 훈구대신들은 그렇게 하도록 윤허한다. 조재례는 그리하여 부하관리를 시켜 관내의 호적을 조사하도록 해서, 주객을 따지지 않고 1사람당 1천의 돈을 내도록 하며, '발정전'이라고 불렀다. 납부를 독촉하며 만일 납부하지 않으면 채찍으로 때렸다."


조재례라는 자는 역사상 잡세를 거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구오대사>의 기록에 따르면, "재럐는 십여개의 진에서 돈을 불리는데 뛰어나서 거액의 재물을 모았다. 양경과 그가 재직한 번진에는 모두 저점(邸店)이 늘어서 있었다.....무릇 끌어모은 재물은 권세가 호족들에게 바치고 부처에게 바칠 뿐이었다." 조재례는 비록 군인출신이지만 경제적인 두뇌가 있었다. 그는 장사를 잘 했다. 그리하여 양경(兩京)과 그가 재직했던 번진에 부동산과 점포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거액의 재물을 모은다. 그는 긁어모은 재물로 하나는 권력귀족과 호족들에게 뇌물로 바치는데 썼다. 이는 유형의 '보호막'을 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문에 바쳤다. 이는 무형의 '보호막'을 친 것이다.


또 다른 야사기록에 따르면, 조재례는 권력으로 돈을 모았고, 가렴주구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원성이 자자했는데, 그가 이임할 때, 지역백성들이 아문에 이런 대련을 붙여서 '환송'했다고 한다: 


조거일천천유안(早去一天天有眼)

지거차지지무피(遲去此地地無皮) 

하루라도 먼저 보내버린다면 하늘에 눈이 있는 것이고,

이곳에서 늦게 보내게 된다면 땅에는 껍질도 남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만 봐도 백성들이 그를 얼마나 원망하고 미워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더이상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같다.


당연히 오대시기에 '기발'한 잡세를 거둔 것은 '발정전'뿌난이 아니다. '거이전(渠伊錢)'이라는 것도 있고, '날수전(捋鬚錢)'이라는 잡세도 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남당의 여주(廬州)관찰사 장숭(張崇)은 관할지역 도,주,현의 관리들 실적을 평가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나중에는 사건처리도 겸직하여, 권력이 아주 컸다. 그는 욕심이 많아서, 부하인 부윤, 현령등에게 뇌물을 거두었을 뿐아니라, 갖은 방법으로 백성들에게서 돈을 갈취해서 재물을 모았다. 그는 매년 강도(江都)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는데, 매번 많은 기진이보를 가지고 가서, 황제의 환심을 샀다. 이렇게 하여 전후로 20여년간, 그는 관운이 형통했고, 여주의 백성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한 해는 여주의 누군가 이런 소문을 듣는다: "황제가 장숭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한다. 조금 있으면 그가 여주를 떠날 것이다." 이 소식은 금방 여주 경내에 퍼져간다. 여주의 백성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 소식을 서로 전했다: "거이(渠伊, 그 자)는 다시 오지 못할 것이다!"


그후 장숭이 여주로 돌아온 후 이 소문을 듣는다. 그리고는 명을 내려 호적에 있는 여주의 백성들에게 1인당 천전(千錢)의 '거이전'을 거둔다. 중추절 전에 반드시 납입하라고 한다. 다음 해에 여주 사람들은 다시 장숭이 파면되거나 자사가 되어 다른 지역으로 간다는 소문이 돈다. 모두 만나기만 하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捋鬚) 축하했다. 그런데 장숭이 이 사실을 알고는 다시 고시를 내건다: 거이전의 예에 따라 '날수전'을 거두겠다고. 여주의 백성들은 여전히 힘들게 살아야 했다.


오대십국시대에 조재례, 장숭같은 류의 탐관오리는 맹호와 같고, 독사와 같았다. 백성들을 착취하여 골수를 빨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러가지 명목을 교묘히 만들어서, 잡세를 거두는 것은 백성들을 착취하기 위하여 잘 써먹는 일종의 수단이다. 과세명목은 각양각색이다. 어떤 명목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일 때도 있다. 이런 사회현상은 시대배경을 잘 반영해준다.


오대십국시기에 어떤 나라의 부역징수는 상당히 과중했다. 당시는 당나라제도를 승계하여, 여름과 가을에 두 번 거두었다. 각 나라에서는 농민의 개간경지를 조사해서, 세수액을 확정한다. 관리와 지주들은 왕왕 상호 결탁하여, 세금을 부자와 가난뱅이들이 균등하게 부담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당나라와 비교하면, 추가적인 세수의 명목이 과다하게 많았다. 후당때, 관청에서 규정한 세수는 두(斗)당 1승(升)이었다. 즉 1말의 곡식에 1되의 곡식을 세금으로 내는 것이었다. 후한때는 2승으로 늘어난다. 그런데 어떤 관청은 들어올 때는 대두(大斗)로 계산하고, 나갈 때는 소두(小斗)로 계산하여, 1석을 세금으로 부담하는 경우 실제로 1석8두를 내야 했다.


관청은 심지어 농민들에게 여름,가을 세금을 '미리 거두기도' 했다. 청나라때 진전(陳鱣)의 <속당서>에 따르면, 동광3년 가을, 황하, 회하가 홍수로 범람한다. 도망간 백성들이 곳곳에 보였다. 도성인 낙양에서 징수하는 각종 부세는 이미 각 지방의 지출을 감당하기에 부족하게 되었다. 육군의 장병 중에서는 굶어서 죽는 자까지 나타난다. 그리하여 조정은 백성들에게 다음 해 여름과 가을에 납부하여할 각종 세금을 미리 납부하도록 명한다. 이렇게 하여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는 것이다. 백성들은 세금을 납부하지 못해서 고통을 겪었고, 할 수 없이 외지로 도망치게 된다. 길거리에는 곡성이 곳곳에서 들렸다. 이때 후당의 장종과 유황후는 여전히 사냥을 즐기고 교외에서 놀고 있었다.


오대시기, 관청은 법정 세금외에 백성들에게 재물을 거두는데 한도가 없었다. 백성등의 원성이 거리에 자자했다. 두 가지 세금 이외에 인두에 따라 거두는 정구전(丁口錢)도 있고, 염전(鹽錢), 농기전(農器錢), 우피세(牛皮稅)등이 있었다; 그리고 염철세(鹽鐵稅), 차세(茶稅), 옥세(屋稅), 혜전(鞋錢)등 잡세가 있었다. 주,군의 관리들은 자주 세금을 올려서 거두었고, 현리(縣吏)는 이서(里胥)에게 많이 거두고, 이서는 백성에게 많이 부과했다. 명목도 다양했고, 세율도 갈수록 높아졌다.


청나라때 조익(趙翼)의 <이십사사찰기>의 기록에 따르면, 염세는 소금 1말에 백미1.5말을 내야 했다. 후진때부터는 염세를 돈으로 거두었는데, 매 호당 일천 내지 이천문을 거두었다. 염호들은 과중한 세금에 시달렸다. 그리고 주국세(酒麯稅)를 납부하는데, 매년 가을 누룩과 술을 만드는 농민에게 무당 주국세 오문씩을 거두었다. 세금을 내지 않고 술을 만들면 사형에 처했다.


조익은 이렇게 평술했다. ' 이 두 가지만으로도 법을 만들어 이익을 독점했으니, 백성들은 이미 살 수가 없었다." 하물며, "부역이 번중하고, 옷갖 명목의 세금을 거두어 갔다." 게다가 번진절도사는 관부에서 거두는 명목 외에 추가로 자신의 잡세를 거두었다. 예를 들어, "조재례의 발정전은 호당 1천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