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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오대십국)

야율아보기는 어떤 길을 걸었는가?

by 중은우시 2019. 7. 11.

글: 만독역사(漫讀歷史)


당나라말기, 환관과 번진세력들이 창궐했고, 황제는 허수아비로 된다. 그리하여 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이런 상황하에서, 거란부락의 일대영웅 야율아보기는 그의 영웅의 길을 시작한다.


당나라 천복원년(901년), 거란부락의 연맹수령 흔덕근칸(痕德堇可汗) 요련흠덕(遙輦欽德)이 즉위한다. 야율아보기는 본부이리근(本部夷離堇)에 임명되어, 사방을 정벌하는 일을 책임진다.


야율아보기는 부대를 이끌고 실위(室韋), 우궐(于厥) 및 해(奚)의 우두머리 할랄가(轄剌哥)등의 부대를 무찌르고 많은 인구와 재물을 얻는다. 같은 해 10월, 야율아보기는 공로로 대질열부이리근(大迭烈府離堇)이 된다.


당나라 천복2년(902년) 칠월, 야율아보기는 40만을 이끌고, 하동(河東), 대북(代北)을 공격하여 성공적으로 구군(九郡)을 차지한다. 포로 9만5천명과 낙타, 말, 소, 양은 부지기수로 얻는다.


같은 해 구월, 야율아보기는 황하(潢河) 남안에 용화주성(龍化州城)을 건설한다. 포로로 잡은 한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개교사(開敎寺)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당나라 천복3년(903년) 야율아보기는 병력을 이끌고 여진부락을 공격하여 그들의 주둔지까지 쳐들어가서, 300호를 포로로 잡고, 구월에는 다시 하동, 회원등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너뜨린다. 십월에는 계북까지 공격하여 대량의 인구와 재물을 얻고 돌아온다.


이 전에, 야율아보기의 부친인 요뎍조(遼德祖) 야율살랄(耶律撒剌)은 일찌기 해(奚)족 7천호를 포로로 잡아, 그들을 요락(饒樂)의 청하(淸河)로 이주시켰는데, 이때 야율아보기는 해질랄부(奚迭剌部)를 만들어 13개 현으로 나눈다.


야율아보기의 혁혁한 전공으로 흔덕근칸은 그를 우월(于越), 총지군국사(總知軍國事)로 임명하여, 거란부족연맹 내에서 중요한 인물이 된다.


당나라 천복4년(904년) 삼월, 야율아보기는 용화주의 동성을 확장하고, 구월에는 부대를 이끌고 흑차자실위를 토벌한다. 당나라의 노룡군절도사(盧龍軍節度使) 유인공(劉仁恭)이 병력 수만을 보내어 실위를 지원한다. 그리고 양자 조패(趙覇)를 보내어 싸우게 한다.


조패의 병마가 무주(武州)에 도착했을 때, 야율아보기는 미리 그 정보를 얻고 있었다. 도산(桃山)의 아래에 정예병사를 매복시켜, 실위사람인 모리(牟里)를 보내 그들의 부락추장이 보낸 것처럼 가장하고, 조패의 병마와 평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조패는 아무런 의심없이, 병마를 이끌고 모리가 말한 곳으로 간다. 그 결과 야율아보기의 매복에 걸려, 사방에서 복병이 나타났고, 조패는 생포되고, 그의 병마는 전멸한다. 그리고 그 기세를 틈타 실위의 군대까지 격파한다.


당나라 천우2년(905년) 야율아보기는 다시 한번 측차자실위를 토벌한다. 당나라의 진왕(晋王), 하동절도사 이극용(李克用)이 통사 강영덕(康令德)을 보내 그와의 회맹을 요청한다.


같은 해 십월, 야율아보기는 칠만의 기병을 이끌고 이극용과 운주(雲州)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적지 않은 술을 마신 후, 이극용이 그의 병력을 빌어 유인공이 목과간(木瓜澗) 전투에서 창궐했던 것을 보복하고 싶다고 말한다. 야율아보기는 시원스럽게 동의한다. 두 사람은 의복과 전마를 교환하고 서로 형제의 의를 맺기로 한다.


이어서, 야율아보기는 병력을 이끌고 유인공을 공격하여 몇 개주를 함락시킨다. 이들 주의 백성들을 모조리 데려간다.


당나라 천우3년(906년) 이월, 야율아보기는 다시 유인공을 친다. 회군하는 도중에 산북의 해족을 친다. 그리고 승리를 거둔다.


당나라의 양왕(梁王) 주온(朱溫)은 황제위를 찬탈하고자 적극 도모한다. 그는 쓸데없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바다를 건나 야율아보기에게 글을 써서 보내며 돈, 의복, 허리띠, 보물등을 보내어 우호의 뜻을 전한다.


같은 해 십일월, 야율아보기는 부대를 파견하여 해(奚), 비(靅)의 부족을 친다. 그리고 동북여진중 아직 귀순하지 않은 부족도 쳐서 모조리 격파하고 항복을 받아낸다.


십이월, 흔덕근칸이 사망하면서, 여러 신하들은 유명을 받들어 야율아보기를 다음 칸으로 옹립한다. 야율갈로(耶律曷魯)등도 권한다. 야율아보기는 여러번 사양한 후에 결국 요청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거란부족연맹의 수령자리에 앉는다.


야율아보기의 즉위는 거란부족의 큰 사건일 뿐아니라, 금방 중원왕조에도 영향을 미치는 대사건이 된다. 또한 시대를 긋는 변화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