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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오대십국)

후한(後漢): 오대십국시대 최단명왕조, 멸망원인은?

by 중은우시 2019. 9. 30.

글: 장저(張姐)


오대십국의 후반기에 중원에는 한족정권이 하나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오대십국중 하나인 후한왕조이다. 후한왕조는 비록 중원정통왕조중 하나이지만, 존속기간은 겨우 4년에 불과했다. 그 멸망원인을 따져보면 모두 살륙이 지나쳤다는 것에 있다.


후한왕조의 개국황제는 유지원(劉知遠)이다. 그는 원래 후진(後晋)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였다. 946년 거란의 야율덕광(耶律德光)이 대군을 이끌고 중원을 침입한다. 후진의 마지막 황제인 석중귀(石重貴)는 거란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결국 거란에 멸망당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후진의 하동절도사였던 유지원은 기회를 틈타 굴기한다. 그는 신속히 후진의 잔여세력을 결집한 후, 금방 거란세력을 중원에서 축출한다. 유지원이 중원을 구한 행위로 인하여 그는 한 때 중원백성들의 마음속에 영웅으로 자리잡는다. 947년 유지원은 변경에서 즉위하고 후한을 건립한다.


유지원은 무장출신으로 일찌기 석경당(石敬瑭)을 따라 남정북전할 때, 살륙을 좋아하는 습성을 가지게 된다. 그는 인재를 회유하여 끌어들이는데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잔혹한 군주이다. 즉위후, 유지원은 혹리 소봉길(蕭逢吉)과 사홍조(史弘肇)를 기용하여 후한의 대신들은 모두 볼얀에 떨게 된다.


유지원의 재위기간은 1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살인을 좋아해서 그의 재위기간동안 기본적으로 그에 반항하는 모든 후진의 잔여세력들을 제거한다. 이전에 그와 함꼐 조정에서 신하로 있었던 옛친구들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그가 하동절도사로 있을 때, 소봉길로 하여금 군법을 장악하게 한다. 소봉길은 원래 음험한 소인배이다. 그에게는 군자의 풍모라곤 전혀 없었다. 태원에 있을 때, 소봉길은 여러번 무고한 백성을 도살한다. 심지어 잔인한 형법으로 군대의 장병들을 죽여버렸다. 후한이 건립된 후, 소봉길은 후한의 형옥(刑獄)을 장악한다. 그는 유지원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행동한다. 유지원의 통치시기에, 소봉길이 심리한 사건은 수도 업이 많은데,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소봉길 이외에, 사홍조도 유지원이 중용한 대신이다. 사홍조는 일찌기 유지원과 함께 석경당 휘하의 장수였다. 후당이 멸망하기 전에, 그들은 공동으로 석경당을 옹립해서 황제에 앉힌다. 이치대로라면, 유지원과 사홍조는 같은 배분이다. 그러나 유지원은 사홍조보다 운이 좋았다. 후진이 건립된 후, 유지원은 석경당의 뒤를 이어 하동절도사에 오른다. 유지원은 사홍조가 용맹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그를 심복으로 거둔다. 바로 이때부터 사홍조는 유지원 수하의 대장이 된다.


사홍조는 후한의 명장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겼다. 그는 군대를 엄격하게 다스렸고, 사람됨이 지나치게 흉악했다. 장병들이 조그마한 잘못만 저질러도, 그에게 채찍질을 당하곤 했다. 사홍조는 무장출신으로 성격이 거칠고 술마시기를 즐겼다. 술에 취하고 나면 자주 사병들을 학대했다. 사홍조는 유지원의 총애를 믿고 재물을 대거 긁어모은다.


유지원이 이런 두 명의 소인을 중용했으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지원의 통치시기에는 사홍조와 소봉길이 어느 정도 자제했다. 그러나 유지원이 죽고나자 그들의 야심은 그대로 드러난다. 유지원의 통치시기 소봉길과 사홍조는 그저 재물만 긁어모았지만, 관직까지는 마음대로 사고팔지 못했다. 그러나 유지원이 죽고 나자 두 사람은 발호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유지원이 죽기 전에, 사홍조와 소볼길을 탁고대신(託孤大臣)으로 삼는다. 이 두 명의 문신 무신의 우두머리는 원래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혼자서 권력을 독점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은제(隱帝)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소봉길과 사홍조는 조정을 장악하고자 한다. 그들 두 사람은 서로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각각 자신의 당파를 만들고 서로 상대방을 배척한다. 은제의 재위시기에 소봉길은 계속하여 은제에게 사홍조를 죽이라고 권한다. 그를 사지로 몰아 넣기 위하여 심지어 직접 자객을 보내 사홍조를 암살하도록 하기도 했다. 소봉길의 계속된 종용하에, 사홍조는 마침내 은제의 명으로 멸문당하고 가산을 몰수당하고 참형을 당한다.


원래 이 일은 이렇게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봉길은 살인을 좋아하는 본성을 버리지 못한다. 사홍조가 죽은 후, 소봉길은 칼끝을 금군병사들에게 돌린다. 당시 후한의 대장 곽위(郭威)가 외지로 나가 반란을 평정하고 있었는데, 소봉길은 곽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겁내서 은제를 종용하여 곽위를 주살하도록 한다. 950년, 병력을 이끌고 있던 곽위는 심복의 밀보를 받는다. 장병들의 옹립하에, 곽위는 결국 거병한다. 이 해에 곽위의 반군이 변경을 쳐들어가고, 은제는 도망중에 불행히 난군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후한은 이렇게 멸망한다.


후한왕조는 두 황제만에 급속히 멸망한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역시 너무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이다. 만일 은제가 간신의 의견만을 듣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후한왕조는 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다. 후한은 간신이 나라를 망쳤다고 하기 보다, 군주가 멍청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