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패악곤(老牌惡棍)
1840년 7월 5일, 자금성(紫禁城)은 다른 날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 날, 상처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도광제(道光帝)는 조제가법(祖制家法)에 따라 기춘원(綺春園)으로 가서 황태후에게 문안을 드렸고, 그후 몇 건의 일상적인 공문을 처리했다.
이 근검절약하기로 유명한 황제는 이때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천리 밖의 절강(浙江) 정해(定海)에서 중국에 “천년동안 없었던 대변국(千年未有之大變局)”의 전쟁이 소리없이 개시되고 있었다는 것을.
이때의 청나라는 역대왕조와 마찬가지로, 그저 “천하”만 알았지, “세계”는 몰랐다. 도광제도 역대제왕들과 마찬가지로 화이(華夷)만 알았지, 중외(中外)는 몰랐던 것이다.
비록 부친과 조부인 가경제(嘉慶帝)와 건륭제(乾隆帝)떄, 전후로 매카트니와 암허스트의 중국방문이 있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여러가지 원인으로 쌍방의 무역협상은 달성되지 않았다. 황제들은 이들 “역이(逆夷)”와의 상호교역은 별게 아니라고 여겼다. 더더구나 그들이 가져온 각종 기기, 기구 및 가장 선진적인 전함모형들 대량의 예물에 대하여도 “기기음교(奇技淫巧)”라고 여긴 것이다.
이런 “천조(天朝)”의 분위기에서, 중국의 외부에 대한 인식은 거의 제로였다. 심지어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 즉 영국)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수천년동안의 경험은 그들에게 중국황제만이 영원한 천하의 공주(共主)이고, 마땅히 만방내조(萬邦來朝)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도광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 “화외만이(化外蠻夷)”를 눈아래 두지 않았다. 설사 영국군이 침범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소소한 무리’들은 금방 토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설사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면서도 한번도 자아반성을 해본 적은 없었다. 결국 성하지맹(城下之盟)을 체결해야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천조”는 강대한 무기와 우수한 전장문물을 지니고 있는데, 어찌 이들 “이성견양(夷性犬羊)”들에게 연패하는지.
그리하여, 그는 모든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긴다. 임칙서(林則徐), 기선(琦善), 우감(牛鑒), 혁산(奕山)등을 포함한 여러 전선의 고관들과 총사령관들은 모조리 문책을 당해야 했다.
당시 양강총독(兩江總督)인 이성원(李星沅)이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능향(愣香, 程庭桂)의 글에, 황제를 접견할 때, 영이(英夷, 영국오랑캐)의 일을 얘기했는데 ‘용인불명(用人不明)했다고 깊이 스스로 회한하며, 주먹을 쥐고 가슴을 쳤다(握拳槌心)”
비록 후회하면서 가슴을 주먹으로 쳤지만, 그는 그저 자신이 “사람을 잘못 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연히 황권전제시대에 황제가 스스로 반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첫째는 알지 못해서이고, 둘째는 그럴 수 없어서이다. 왜냐하면 집권의 합법성은 자신의 법통외에 권위에서 나온다. 그래서 스스로 반성하는 행위는 천자의 위엄에 큰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광제가 이처럼 멍청했던 원인은 모두 그의 책임이라 할 수는 없다. 부하인 관료사대부들도 그 책임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국인의 침범에, 당시의 조야 상하는 모두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천조”통치자의 “역이”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다. 나중에 ‘한간(漢奸” “매국노”로 치부되는 기선도 마찬가지였다.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은 만주 정황기(正黃旗) 출신으로 도광제가 아편금지결정을 내린 후 그는 이를 적극지지하는 대신중 한명이었다. 정해가 함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직예총독이었던 기선은 황제로부터 “더욱 신경써서 엄히 방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하여 천진에서 구체적인 방어조치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영국인들에게 보내는 문서에서 득의양양하여 스스로를 “본대신작각부당(本大臣爵閣部堂)”이라고 칭하며 영국인을 “이성견양”이라고 멸시하던 청나라의 최고관리인 그는 직접 영국군대의 “선견포리(船堅砲利, 배는 튼튼하고 대포는 날카롭다)”를 직접 목격한 후 슬쩍 마음을 바꾸게 된다. 심지어 황제에 올린 상소에서 상세하게 영국군의 전함과 윤선의 모양을 묘사하면서 극력 그리고 대담하게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고 암시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기선은 심혈을 기울여 영국측과 화의하려 한다. ‘천조’의 용어로는 영이(英夷)를 취무(就撫)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정전합의를 달성하고, 영국군이 물러나 북방의 위기를 해소시켰음에도 기선은 5개월후, 마음대로 영토를 할양했다는 이유로 족쇄에 채워져 북경으로 압송되고 만다.
동시에 삭탈관직되고 문책을 당한 사람은 절강순무(浙江巡撫) 오이공액(烏爾恭額)이 있다. 그의 죄명은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이서(夷書)”의 접수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원래는 황상의 뜻을 받들어 ‘천조상국’의 존엄을 지키는 행위인데 이때는 중죄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이공액은 명실상부한 속죄양이다.
그러나, 더욱 재미있는 일은 그 이후에 발생한다.
기선의 “의지불견(意志不堅)”의 전철이 있으므로 대신들은 황상의 뜻에 영합하기 위하여, 더욱 급진적이 되어 매번 상소를 올릴 때마다 목소리를 더욱 높인다. 당연히 이러한 ‘천조’의 위엄에 빠져서 전선의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전쟁터에 나가보면 그들은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상황은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천양지차라는 것을. 황제가 바라는 것처럼 “위로는 국가의 체면을 욕되게 하지 않고, 아래로는 변방의 전투는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영이’의 압박하에 국가체면을 욕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변방에서 전투를 벌여야 하고, 영국군의 사상유례없는 엄청난 포화를 견뎌야 하지만, 결국 변방에서의 전투결과는 국가의 체면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전선의 장수들은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던 육전에서도 영국군에게 완전히 압도당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기선이후, 흠차대신 이리포(伊里布)이건, 과용후(果勇侯) 양용(楊勇)이건, 아니면 정역장군(靖逆將軍) 혁산(奕山)등이건 이들은 모두 한때 의분강개하여 ‘오랑캐토벌’을 외쳤고, 속속 기선이 업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탄핵했었지만, 하나하나 기선의 갔던 길을 따르게 된다.
이는 아이러니한 일막을 낳게 만든다: 황제의 앞에서는 첩보가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전선에서는 참패가 이어지고 있다. 첩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황제의 기대는 더욱 커지고, 재촉은 더욱 심해진다.
이때의 대신들은 감히 사실대로 영국군이 너무 강대하여 이길 수 없다고 보고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기선처럼 ‘청의(淸議)’에 의해 한간 매국노로 몰릴 판이었다. 그래서 감히 패배했다고 말을 하지도 못한다. 만일 그렇게 말했다가는 중죄를 면키 어렵다. 그리하여 영국군과 황제의 사이에 끼어 위를 속이고 아래를 속이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짓말이 커질수록, 분식은 더욱 과장된다.
이런 중국근대의 가장 황당한 짓거리는 <남경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이때가 되어도 ‘천조’는 여전히 실패의 원인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황권에 기대어 사는 관료사대부들과 지식분자들은 대청이 이렇게 상권욕국(喪權辱國)당한 것은 열심히 전심전력을 다한 사람, 충신현량(忠臣賢良)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렇게 단정한다: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임칙서를 기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임칙서가 지닌 “역이와 불공대천”한다는 정신은 조야 상하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다른 패전한 자들이 나타내는 기미(羈縻) 타협적인 자세는 크게 멸시당해야 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마음만 먹으면 일은 이룰 수 있다.
다행히 나중에 임칙서는 다시 진정으로 기용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의 영웅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는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죄책을 남에게 떠넘겨버린 도광제는 영명신무(英明神武)함에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신하들이 감히 책임을 황제에게 떠넘기지 못하면서 아부영합한 덕분이라기 보다는 전제체제속에서의 관성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조약이 체결되고, 영국군이 물러났으며 2년간 지속되던 전쟁이 끝난다. 근검절약하는 도광제는 마침내 더 이상 엄청난 군비 때문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시 명을 내려 연해각성에 군대를 해산시키게 하여, 비용을 줄이고자 한다.
이때의 경성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거의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은 듯, 혹은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은 척하고 있었다. 임칙서의 <연진사희(軟塵私議)>에는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의화(議和)이후, 도성에서는 원래의 나태함으로 되돌아갔다. 마치 비가 지나간 후에 천둥을 잊어버린 것같았다. 해안의 일은 금기가 되어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고, 찻집이나 술집에서도 “면담시사(免談時事, 시사이야기는 금지)”라는 네 글자를 크게 써붙여셔, 시서를 논하는 것을 금지했다.”
황제가 말하지 못하게 하니, 자연히 모두 입을 다문다.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정상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성부근의 상황에서 당시 전체 중국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전후와 전전에 거의 다른 모습이 없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원래의 궤도로 돌아갔고, 모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전쟁은 잊어버렸다. 그리고 오늘날의 사람들에 의해 “열린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 최초의 사람”이라는 임칙서 조차도 죽을 때까지 여하한 진보적인 건의를 올리지 않았다.
상층이 이러하니, 보통백성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의 대청국의 백성들은 근대에 생활했지만, 실제로는 역대왕조의 백성들과 차이가 없었다. 모두 조정이 자원을 취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국가와 그들은 이익으로 묶여있지 않았다. 더더구나 그들에게 책임은 없었다. 왕조교체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다지 큰 차이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단지 가족과 고향만 알 뿐, 민족이나 국가는 알지 못했다. 소위 나라는 그저 천자의 집안일 뿐이다. 비록 삼원리항영사건, 광주반입성사건이 있지만, 기껏해야 그것은 고향을 지키는 활동이었을 뿐이다. 전쟁때 조정에서 여러 번 언급된 매국노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영국군에 물자를 운송해주고 약간의 대가를 받은 백성들인 것이다.
그들은 당시의 중국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 줄 수 없었다. 설사 요란했던 태평천국이 청왕조를 무너뜨렸다면, 그저 또 하나의 청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후세에서처럼 군민동심으로 외적을 방어한다는 것은 천방야담(千方夜譚)일 뿐이다.
그래서, 당시 청나라의 곤경은 시스템적이고, 제도적이다. 천년이래 뿌리깊은 관성이 있었다. 이런 관성이 사상유례없는 대변국을 맞이했을 때, 제때 브레이크를 밟지 못했다. 군신이 멍청하고, 백성들이 마비되었던 것은 바로 그런 표상중 하나일 뿐이다.
당시 사람들은 곤경에 빠졌지만,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도덕적판단으로 선악과 충간을 구분했고, 화이로 서방제국을 대했다. 조상의 법도로 내외의 사무를 처리했고, 다시 이를 가지고 모든 것을 해석했다. 이걸 가지고 질책해서는 안된다. 다만 오늘날의 우리는 교훈을 받아들이고, 다시는 그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시의 모습이 지금도 계속하여 재현되고 있다. 비록 두 발은 이미 현대에 딛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상이나 세계에 대한 인식수준은 여전히 2세기이전에 머물러 있다. 그들이 역사에서 배운 것은 흑이 아니면 백이라는 일원적사고이고, “낙후되면 두들겨맞는다”는 간단한 추론이며, 우승열태(優勝劣汰)의 ‘밀림법칙’이다. 마치 이것이 무슨 사람과 일을 판단하는 비밀스러운 무기이고, 세계운행의 궁극적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가 생활하는 사회를 둘러싸고 있다.
부득이 이런 말을 해야 할 것같다. 이처럼 진실성, 복잡성, 다원성을 돌보지 않고, 반성과 자성을 모르는 조류는 날이갈수록 심해지는 민족배외(民族排外)와 맹목자대(盲目自大)하는 정서는 실로 사람들이 대청시대로 되돌아간 것처럼 느껴진다.
이상은 필자가 모해건(茅海建) 선생의 <천조의 붕괴: 아편전쟁재연구>를 읽은 후의 독후감이다. 그래서, 그 후기의 말을 이용하여 결말을 장식하기로 한다:
150년이 지났다.
19세기는 중국인의 굴욕의 세기이다. 20세기는 중국인이 세상의 온갖 고난을 다 겪은 세기이다. 21세기는?
사람들은 말한다. 19세기는 영국인의 세기이고, 20세기는 미국인의 세기라고. 그럼 21세기는?
또 일부 검은 머리 노란피부의 사람들은 21세기를 중국인의 세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중국인들이 어떤 자세로 21세기를 맞이해야할 것이냐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어떻게 해야 중국인의 세기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냐는 것이다.
역사가 어떤 선택을 하든, 필자는 아편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최우선적인 과제는 바로 중국대륙과 서방의 차이가 150년전의 아편전쟁때와 비교하여 더 확대되었는가? 아니면 축소되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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