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소사맹(江蘇思孟)
동치원년, 섬서(陝西)의 회민(回民) 인구가 증가되고, 역량도 강화된다. 그리하여 독립된 이슬람국가를 설립하려는 구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일부 회민의 우두머리 예를 들어 백언호(白彦虎), 마화룡(馬化龍)등은 암중으로 회민들에게 '전첩살인(傳帖殺人)'하게 한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섬서의 청군이 떠난 틈을 타서, 섬서의 한인(漢人)을 모조리 죽여버리려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황하 서쪽에 순수한 무슬림국가를 건립하려 했다. 거사전에 그들은 비밀리체 철장인에게 부탁하여 칼같은 무기를 만들었고, 그후에 철장인을 죽여서 비밀이 누설되는 것을 막았다. 길거리에서 죽간등을 모조리 구매하여 무기로 썼다. 그후 전혀 예상못한 시점에 폭란을 일으킨다. 한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저항할 힘도 없었다. 위하(渭河)의 양안에 있는 전체 마을의 30만 한인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한다. 오직 임동지현(臨潼知縣)이 미리 상황을 눈치채고, 긴급히 성문을 닫아걸어 일부 한인을 지켜낼 수 있었다.
당시 서안성(西安城)의 섬서순무(陝西巡撫)가 내놓은 정책은 회민을 잘 보살펴주는 것이었다. 성안에서 회민은 한명도 죽이지 않았다. 긴급히 성문을 걸어닫아 성밖의 회민들이 성안으로 쳐들어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성내의 회민이 성을 나가 가담하는 것도 막았다. 그리고 다시 섬서단련사 장불(張芾)을 보내 다독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회민거사의 대수령 임무(任武)는 장불을 죽여버린다. 또 다른 수령 백언호는 가장 심하게 사람을 죽였다. 그는 황제릉(黃帝陵)을 파헤치고자 했으나, 다행히 한인 수령 동복상(董福祥)에게 격퇴당한다.
당시 무슬림무장분자는 30만명에 달했다. "섬회십팔영(陝回十八營)"이라 불렸다. 몇달내에 관중평원에서 한인 오백만을 죽인다. 1년동안 관중의 한인 현장은 모조리 회민들에게 살해당한다. 오직 일부 현성안에 있던 한인과 여산으로 도망쳐 들어간 한인들만이 목숨을 건졌다.
섬감(陝甘, 섬서,감숙)의 회란으로 한족에 대한 대도살이 아주 심각했고, 가장 심하게 당한 섬서성에서 한인 약 7백만명이 피살당했다.
1863년 좌종당(左宗棠)이 위기에 명을 받아, 섬감총독이 된다. 상군(湘軍)을 이끌고 진압을 개시한다. 섬서회민은 청군엑게 진압당해 감숙으로 도망친 후, 다시 감숙의 한인들을 도살하기 시작한다.
감숙회민도 폭란에 가담한다. 그러나 가장 잔혹한 것은 섬서회민들이었다. 가장 악독하게 사람들을 죽였다. 백언호를 포함해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사람을 많이 죽여서 지도자에 오른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모조리 칼로 쳐서 죽이고, 불로 태워죽여서, 종족말살의 대도살을 벌인다. 돈을 뺴앗기 위한 것도 아니고, 땅을 빼앗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살인을 위해 살인했다. 당시 감숙에는 이런 정원민요(靖遠民謠)가 있었다:
동치오년삼월간(同治五年三月間)
살기미만천(殺氣彌漫天)
십여만인일조진(十餘萬人一朝盡)
문수불심산(問誰不心酸)
동치오년 삼월에
살기가 하늘이 가득했다.
십여만명이 하루아침에 죽었다.
물어보라 가슴아프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감숙중부지역의 한인은 거의 모조리 피살당한다. <중국인구사>의 통계에 따르면, 회란전인 함풍11년(1861년) 감숙(감숙성, 청해성, 영하자치구전부)의 인구는 1,945.9만명이다. 전후 광서6년(1880년)에 인구는 겨우 495.5만명이 남는다. 인구손실이 1,455.5만명에 이른다. 손실비율이 74.5%에 달한다. 회민은 한꺼번에 10만명이상씩 죽이는 대도살을 여러번 벌였다. 많은 현에서는 한인들이 모조리 죽는다.
섬서,감숙 두 성에 살고 있던 한인은 2천만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한인들이 왜 200만도 되지 않는 회민들을 당해내지 못했을까? 깊이 생각해보아야할 문제이다.
한인들이 이렇게 대거 죽임을 당한 이유는 첫째, 한인은 전통적으로 무기를 보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제가 터져도 쓸 무기가 없었다. 당시 회족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회민은 기병이 있는데, 한인은 없었다. 승부는 명약관화했다. 셋째, 회족이 집결한 후(아마도 최소 수십만은 되었을 것이다), 먼저 도시를 공격하지 않고, 수백배의 병력으로 각각의 고립된 마을들을 소탕하기 시작한다. 마을은 인구도 적어서, 전체 마을이 전멸당한다. 중국 당시에 농촌인구는 전체성인구의 90%를 점했다. 또 다른 한가지는 도살이 너무나 돌연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각 농촌에서 조직을 만들어 방어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내에 섬서는 수백만의 농촌인구가 피살되고 만 것이다.
좌종당이 상군을 이끌고 도착한 후, 처음에는 폭란에 참가한 회민은 모조리 죽였다. 섬서회민의 수령인 마화룡은 양식도 끊어지고 지원도 끊어져서, 좌종당의 군영을 찾아가 투항한다. 그는 자신이 죽을테니 다른 사람은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마화룡과 그의 아들 마요방(馬耀邦)은 청군에 각종 화포 56문, 각종 총기 천여점을 바친다. 그리고 왕가탄장(王家疃莊)의 회민들에게도 서신을 보내 투항할 것을 권유한다. 좌종당은 마화룡이 반복무상하고 무고한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인 것을 한스러워했다. 그의 손에 죽은 백성이 십수만이었다. 실로 죄대악극(罪大惡極)이라 할 만했다. 동치10년(1871년) 정월 십삼일, 마화룡과 가족 그리고 반청수령 합계 1,800여명이 처형당한다. 청나라조정은 그들의 수급을 전국각지로 보내어 10년간 걸어둔다. 그의 자손은 모조리 죽여버린다. 섬서의 수백만 회민들도 죽일 사람은 죽이고, 쫓아낼 사람은 쫓아냈고,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한족으로 민족을 바꿀 사람은 바꾸었다. 또 다른 수령인 백언호는 신강으로 도망친다. 나중에 코칸트칸국의 야쿱 벡에게 의탁한다. 나중에 좌종당이 신강을 수복하고, 백언호는 다시 중앙아시아로 도망친다. 지금의 둥간족(東干族)의 조상이다. 나중에 중화민국시절 마가군(馬家軍)의 마점오(馬占鰲), 마해연(馬海宴), 마천령(馬千齡)은 바로 감숙 하주(河洲)폭동때의 회민들이다. 다만 좌종당이 그들의 투항을 받아주었고, 마가군은 이렇게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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