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청말(淸末) 혁명당은 왜 암살에 열중했을까...?

by 중은우시 2022. 9. 7.

글: 역사D학당(歷史D學堂)

 

청나라말기, 손중산(孫中山)을 우두머리로 하는 혁명당은 낡아빠진 청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번 무장의거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진남관기의(鎭南關起義), 황화강기의(黃花崗起義)부터 마지막에 성공을 거둔 무창기의(武昌起義)까지. 다만 이들 반란보다 더욱 빈번했던 것은 확실히 청나라조정의 종실, 고관대작을 상대로 한 암살행위였다. 그 횟수가 많고, 범위가 넓은 점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했다고 할 수 있다.

 

불원전한 통계에 따르면, 청말 혁명당원들이 진행한 기록된 암살행동은 수십건에 달한다. 많은 암살사건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만복화(1865-1919, 자는 소무(紹武), 안휘 합비 사람

예를 들어, 1904년 혁명당인 만복화(萬福華)는 상해에서 전 광서순무(廣西巡撫) 왕지춘(王之春)을 암살했고, 소리높여 "매국노, 나는 사억의 동포를 대신하여 너를 죽인다"라고 외친다. 왕지춘은 열강의 병력을 동원해서 혁명을 진압하려 한 바 있다. 아쉽게도 만복화의 총은 제대로 발사되지 못했고, 감옥에 갇힌다(나중에 석방된다).

 

1907년, 서석린(徐錫麟)은 안휘 안경(安慶)에서 '만인오호(滿人五虎)" 중 한명으로 불리던 안휘순무(安徽巡撫) 은명(恩銘)을 암살하고 체포된 후 사형당한다. 만인오호는 청나라조정의 다섯명의 만주족 고관을 가리키는데, 아래에 언급하는 단방(端方), 양필(良弼)이 모두 포함된다. 


1910년 오월(吳樾)은 베이징에서 단방(端方)등 "출양오대신(出洋五大臣, 서태후의 명을 받아 출국하여 해외를 시찰한 다섯 명의 조정대신)"을 암살하고자 했고, 그중 2명이 부상을 입고, 그 자신은 그 자리에서 죽는다. 

 

같은 해, 손중산의 중요한 조수인 왕정위(汪精衛)는 암살대상을 당시의 섭정왕 재풍(載灃, 마지막황제 부의의 생부)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실패후 감옥에 갇혀 "음도성일쾌(飮刀成一快), 불부소년두(不負少年頭)"라는 싯귀를 남겨, 일시에 혁명우상으로 떠오른다(당연히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이때의 풍운인물이 30년후에는 최대의 매국노가 될 줄은. 정말 세상 일은 모르는 것이다).

 

1911년, 온생재(溫生才)는 광주에서 광주장군(장군은 청나라때 종1품의 무관관직임) 부기(孚琦)를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1912년 무창의거가 발발한 후, 팽가진(彭家珍)은 폭탄으로 진압을 극력 주장하던 종사당(宗社黨)의 우두머리이자, 금위군통령(禁衛軍統領) 양필을 암살하고, 팽가진 본인도 그 자리에서 죽는다.

 

암살행위가 여기저기서 일어나, 청나라말기의 역사에서 색다른 풍경선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요소때문에 혁명당인들은 속속 암살수단을 활용한 것일까?

팽가진(1888-1912), 자는 석유(席儒), 사천 금당 사람

무장의거는 심후하고 믿을만한 군중기반과 세밀하고 장기적인 계획, 그리고 상당한 규모의 무장인원 및 많은 수량의 무기장비가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은 당시의 혁명당인들에게 확실히 갖추는 것이 어려웠다. 혁명당인들은 계급속성과 인식등의 문제로 인하여 민중들과는 유리되어 있었고, 군중기초는 없었다. 예를 들어, 노신(魯迅)은 그의 소설 <약(藥)>에서 혁명당인 하유(夏瑜, 秋瑾이 원형임)가 희생당한 후, 민중들은 그녀에 대하여 조롱하고 풍자했을 뿐아니라, 그 선혈로 인혈만주를 만들어 폐결핵을 치료하는데 쓴다. 생생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군중들을 동원하지 않고, 자신의 많지 않은 병력만으로 거사를 하게 되니, 결국 청군의 잔혹한 진압을 당하고,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연전연패하는 상황하에서, 많은 혁명당인들은 전망에 대하여 비관하고 실망하여, 다른 길을 찾게 된다. 일종의 '짧고 간단하며 빠른" 방식을 찾는 것이다. 이런 비통상적인 수법으로 신속히 승리를 거두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행할 수 있고 비용도 적게 드는 암살행동을 혁명당인들이 주목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오월은 이런 말을 했다: "암살은 배록 개인이 할 수 있지만, 혁명은 집단이 아니면 효과가 없다. 오늘날의 시대는 혁명의 시대가 아니라 암살의 시대이다." 혁명당인들은 보편적으로 암살을 단순히 "폭탄 하나, 총 한자루, 비수 한자루"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군대혁명이 필요한 것이 많고, 준비가 번잡하고, 비밀유지가되지 않고 적확하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마란히 말할 수 없다." 이것은 그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일찌기 암살수단을 멸시했으며, '어린아이의 견해'라고 무시했던 왕정위도 나중에 암살을 크게 찬양하며, 태도를 바꾸게 된다. "암살의 일은 독부민적(獨夫民賊)의 육체로 그의 잘못을 징치하는 것이니, 어찌 아주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행동에 옮긴다. 이를 보면 당시 혁명당의 내부에서는 보편적으로 암살행위가 승리의 첩경이라고 여겼던 것같고, 무장의거보다 훨씬 간단하다고 여겼던 것같다.

 

봉건사회는 비록 조정에서 자객이나 유협(遊俠)같은 류에 대하여 일관되게 진압하고 적대시하는 태도였지만, 그 영향은 민간에서 계속 전해지고 있었다. 멀리 보면 "풍소소혜역수한, 장사일거혜불부반"의 형가는 '자객권의 으뜸"으로 오랫동안 명성이 전해져 내려오고, 청나라만 하더라도, 여협 여사낭(呂四娘)이 자금성을 쳐들어가 옹정제를 암살했다는 전설이 널리 유전되고 있었다(비록 야사전설에 불과하지만). 내무부의 주방장 진덕(陳德)은 일자리를 쫓겨난 후 가경제에 대한 암살을 시도한다(실패후 능지처참당한다). 그리고 장문상(張文祥)은 양강총독 마신이(馬新貽)를 암살했는데 이제 겨우 수십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객, 유협같은 류의 사적은 혁명당인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예를 들어, 오월은 스스로에게 이런 외호를 짓는다: "맹협(孟俠)". 그리고 여성혁명가 추근은 아예 스스로를 "감호여협(鑒湖女俠)"이라 칭한다. 호기가 가득차다고 할 수 있다. 동맹회의 기관보 <민보(民報)>는 글을 써서 "상모설극(霜矛雪戟), 웅검보도(雄劍寶刀), 절지지창(折枝之槍), 개화지탄(開花之彈), 전제섭정형가무양지륜(專諸聶政荊軻舞陽之倫)". 이렇게 형가등 자객을 본받아 암살행동에 나설 것을 고취시켰다.

추근(1875-1907), 여, 자는 경웅(競雄), 호는 감호여협, 절강 소흥 사람.

 전통문화외에, 당시의 러시아혁명가들도 큰 영향을 끼친다. 1825년부터 제정러시아의 일부 진보사상을 가진 귀족장교조직은 짜르에 반대하는 '데카브리스트(12월당)의 난'에서 실패한 후, 제정러시아혁명조직은 무정부주의사조가 성행하게 되고, 제정러시아의 고위층에 대한 여러번의 암살을 진행한다. 심지어 1881년에는 당시의 짜르 알렉산드르 2세를 성공적으로 암살하기까지 한다.  

 

혁명당인들은 이를 상당히 숭상했고, 장태염(章太炎)은 "금일 무정부혁명을 행하고자 하려면 반드시 암살을 첫째임무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보면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사조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알 수있다.

 

역대 혁명당인들의 암살대상은 황족종실뿐아니라, 고관대작도 있었다. 모두 청나라조정에서 정치적영향력이 큰 인물들이다. 혁명당인들은 이들을 '타겟으로 하여 제거하면' 통치계급을 겁줄 수 있어, 영향력이 비교적 크다고 보았다. 고위층에 대하여 겁을 주는 작용도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서석린이 안휘순무 은명을 암할한 후, 당시 양강총독이던 단방은 두려워하면서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같은 사람들은 편안히 잠잘 수가 없겠구나!" 이를 보면 청나라조정의 고위관료들이 많이 흔들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양필이 암살당해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긴다: "나를 죽인 자는 영웅이다. 내가 죽으면, 대청이 망할 것이다." 이 말은 확실히 들어맞는 참어였다. 양필이 죽고나서, 청나라조정의 강경파들은 핵심인물을 잃었고, 그 결과 십여일후, 부의는 퇴위를 선포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들 암살활동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청나라말기 혁명당인들은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리면서 상당한 수량의 지사들이 청나라조정의 칼날아래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하여 혁명당인들은 청나라조정의 고관들을 도살자로 보았고, 죽여야 마음이 시원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 여러번 혁명을 진압한 청나라조정의 광동수사제독(廣東水師提督) 이준(李準)은 혁명당인들에게 여러번 암살당하고, 두번은 중상을 입는다(그러나 그는 나중에 혁명쪽으로 돌아섰고, 또한 청나라의 장령들에게 투항할 것을 권했다). 단방은 1911년 사천에서 대거 '보로운동(保路運動)'을 진압했는데, 결국 혁명당인의 총에 목숨을 잃고, 그의 수급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전시된다. 이를 보면 당시 혁명당인의 그에 대한 원한의 깊이를 알 수 있다고 할 것이다.

 

청나라조정은 비록 1912년 정식으로 멸망했지만, 암살풍조는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심해진다. 손중산의 수중에서 대총통의 자리를 가져간 원세개는 자객에게 지시하여 이미 국민당의 중요한 지도자가 된 송교인을 암살하도록 했고, 시검교(施劍翹)는 부친의 복수를 위해 대군벌 손전방(孫傳芳)을 암살한다.

 

장개석이 취임한 후, 더더욱 대립(戴笠)을 우두머리로 하는 군통국에 지시하여, 정적과 반대파들에 대한 부지기수의 암살을 저지른다. 장개석을 우두머리로 하는 국민당고위층은 다시 상해 '부두방(斧頭幇)의 우두머리이자, '암살대왕'으로 불린 왕아초(王亞樵)의 암살대상이 된다. 민국무대에서 계속하여 벌어진 암살극은 당시 혁명당인들이 부지불식간에 남긴 "유산'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