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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천리교(天理敎)의 난: 자금성까지 쳐들어가다.

by 중은우시 2022. 6. 20.

글: 호연문사(浩然文史)

 

청나라의 용상이 가경제(嘉慶帝)에게까지 전해졌을 때, 국세는 이미 강옹건(강희, 옹정, 건륭)시대처럼 대단하지는 않았다. 가경제때의 백련교(白蓮敎)의 난은 5개 성에 화가 미쳤고 8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동란에도 가경제를 비롯한 청나라조정에서는 그다지 큰 일로 인식하지 않았다. 다만 통상적인 농민반란으로 치부하며 처리했다. 그러나 몇년후인 가경18년(1813년) 천리교의 난이 발생하고, 이들은 자금성내까지 쳐들어와서 직도황룡(直搗黃龍)의 기세를 보이게 된다. 비록 천리교의 난도 몇달내에 평정되었지만, 청나라조정은 극도로 놀라서, 가경제는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는 조서)를 내리고, 청나라는 사교에 대한 단속을 전면적으로 강화하게 된다.

 

가경원년, 사천, 호북 등지에서 백련교의 난이 발발한다. 가경4년에 이르러, 건륭제가 사망하고, 가경제가 친정을 하며, 백련교문제는 전국최대의 문제가 된다. 가경제는 직접 조서를 내려 이를 "제일건대사(第一件大事)"라 칭한다. 백련교가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에 대하여 가경제의 말에 따르면 "관핍민반(官逼民反, 관청이 핍박해서 백성들이 어쩔 수 없이 반기를 든 것)"이라고 보았다. 이 점은 가경제의 <흠정초평삼성사비방략(欽定剿平三省邪匪方略)>에 분명하게 쓰여 있다. 그래서 가경제는 한편으로 화신(和珅)등을 죽여서, 백성들의 탐관오리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에 부응하며, 다른 한편으로 반란에 가담한 백련교도가 회개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말하게 된다.

 

가경제는 백련교에 대하여 극히 관대하게 처리했다. 투항한 백련교도에 대하여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을 뿐아니라, 심지어 백련교 자체를 승인하기까지 한다. "백련교의 이름은 유래가 오래 되었다...그러나 사람들을 선하게 살도록 권유할 뿐 위배되는 모습은 없었다." "지금 백련교를 믿는 자는 조용히 법을 지키는 양민이니, 지방관은 조사하여 체포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백련교의 난의 모든 책임은 백련교의 우두머리 유지협(劉之協)에게 뒤집어 씌웠다.

 

이를 보면, 백련교의 난이 발생한 원인이든 아니면 청군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이든 가경제는 '사교'의 위해성에 대하여 그다지 인식이 깊지 못했던 것같다. 그래서 사후처리과정에서 가경제는 관리들에게 백련교도들을 잘 예악으로 잘 교도하도록 당부했던 것이다.

 

천리교는 원래 백련교의 한 갈래이다. 천리교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마지막 교주인 임청때문이다.

 

임청은 무뢰배출신으고, 부친은 그를 약국에 보내어 점원으로 지내게 했다. 그러나 그는 계집질로 병에 걸린다. 나중에 관청의 서리(書吏)라는 하급공무원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공공재물을 훔치다가 관부에서 면직당한다. 게다가 그는 술먹고 도박하고 계집질하느라고 가산을 모조리 날려버린다. 살아가기가 힘들게 된 그는 천리교에 가입한다.

 

임청은 글을 알았고, 농민조직내에서는 비교적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의 운명이 비범하다는 심리를 갖게 된다. 그는 약간의 화학반응원리를 이용하여 교도들에게 기적을 일으킨다고 자랑하고, 자신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떠벌린다. 이렇게 하여 신도들에게 재물을 긁어모았으며, 나중에 신이 10배로 되돌려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런 "수적주(水滴籌)"의 재주를 가지고, 임청은 돈을 긁어모으고, 관청에 뇌물을 바치면서 많은 부를 쌓는다. 천리교는 북경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세력은 황궁에까지 스며든다. 자금성에서 일하는 몇몇 태감들도 그의 신도가 된다. 천리교는 이렇게 하여 조정에서 반승인한 공개종교가 되고, 임청은 종교대사(大師)가 된다.

 

임청은 일찌감치, 하남(河南), 산동(山東)등지의 천리교 우두머리들과 연락했고, 가경18년 구월 십오일에 세 곳에서 동시에 거병하기로 약속한다. 거사에 성공하면, 임청은 천황(天皇)이 되어 직예(直隸)에 할거하고, 산동천리교의 교주인 풍극(馮克)은 지황(地皇)이 되어 산동을 통치하며, 하남천리교의 교주인 이문성(李文成)은 인황(人皇)이 되어 하남을 주재하고, 세 곳이 서로 도와서 3곳을 핵심으로 외부로 확장하기로 한다.

 

3곳중에서 임청은 황제의 발아래 있으므로 특히 중요했다. 그는 '가경제'를 붙잡은 책임을 맡는다. 임청의 계획은 이러했다. 황궁내의 태감들의 호응을 받아, 자금성의 문을 열고, 자신이 신도를 이끌고 자금성내로 쳐들어가서 가경제를 생포하는 것이다. 그후 황궁을 통제하고, 나아가 경사를 지배하는 것이다.

 

공격하기 전에, 황궁안의 태감이 임청에게 보고한다. 황궁의 안은 협소하여 병력을 전개할 수 없고, 게다가 가경제는 열하(熱河)로 사냥을 가서 황궁은 비어 있다고. 그리하여, 임청은 200명을 보내어 황궁의 동화문과 서화문으로 공격해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구월 십오일 밤, 천리교는 미리 약속한대로 거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임청은 직접 전선에 나오지는 않았고, 그는 본부에 조용히 앉아서 첩보를 기다렸다. 

 

동화문을 치기로 한 천리교도들은 태감의 인도하에 순조롭게 동화문아래에 이른다. 그러나 우연찮게도 그들은 황궁에 목탄(木炭)을 운송하는 무리들과 서로 길을 비켜달라고 다투게 된다. 성격이 급한 천리교 신도가 무기를 꺼내보이며 마부들을 위협했고, 이 광경을 마침 동화문의 수비군이 보게 된다. 그리하여 수비군은 즉시 동화문을 걸어잠근다.

 

천리교도들은 성문밖에서 수비군과 전투를 시작했고, 일부 교도는 동화문 내로 들어갔지만, 일부 교도는 놀라서 창을 버리고 도망친다.

 

서화문을 치기로 한 천리교도들은 순조롭게 직접 서화문으로 진입한다. 황궁의 수비군은 아마도 황제가 사냥을 떠나면서 정예군사들을 데려가서인지, 아니면 청군의 군사력이 원래 낮아서인지, 100명의 천리교도들에 의해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다.

 

그러나, 자금성에 진입한 천리교도들은 황궁의 내부배치를 알지 못했고, 그저 태감들이 이끌어주는대로 가야 했다. 다만 태감들은 복수심리가 작용하여, 중요한 중추로 안내하거나 황후, 황비들의 거처로 안내하여 이들을 볼모로 잡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소에 그들을 못살게 굴던 태감상사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여 보복을 한다. 그리하여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이때 황궁내의 황장자(皇長子) 면녕(綿寧), 즉 나중의 도광제(道光帝)는 천리교도들이 태감우두머리들에게 보복하는 틈을 타서 금군을 소집하여 반격을 개시한다. 면녕은 직접 총을 들고 나서서 사기를 북돋운다. 양심전 앞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천리교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진다. 청군은 천리교도들이 내궁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경사 화기영등 주둔군들이 지원을 오고, 국면은 안정된다. 며칠간의 수색소탕을 거쳐 자금성은  평안을 되찾는다. 청군은 포로로 잡은 천리교도들의 입을 통하여 반란의 막후조종자는 직예의 종교대사 임청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구월 이십삼일, 임청은 여전히 본부에서 첩보를 기다리고, 산동, 하남의 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청군은 천리교도로 변장하고 들어가 성공적으로 임청을 체포한다. 그리고 그를 능치처사(凌遲處死)한다. 십이월 십일, 직예관부는 천리교의 난이 완전히 평정되었다고 보고한다.

 

백련교의 난을 처리했던 때와는 달리 이번에 가경제는 정말 '사교'의 위협을 깨달은 것같다. 그래서 이전에 스스로 투항하였던 교도들까지도 모조리 죽여버린다.

 

반란과 반란의 우두머리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여파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번 사건에 가경제는 크게 놀라고, 변란을 맞자 가장 정예병인 팔기금군의 전투력이 너무 약했던 것에 가경제는 또 놀란다. 궁마(弓馬)로 천하를 얻은 만주족 왕공들이 위기에 닥치자 삶을 탐하고 죽음을 겁내어 조상들의 기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경제는 통심질수하여 <죄기조>를 내린다: "이번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모두 짐의 덕이 부족해서이다." "한,당,송,명에도 없었던 일이다." "당금의 큰 폐해는 인순태완(因循怠玩)의 네 글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대신들에게 고한다: "절대로 시록보위(屍祿保位)하여 짐의 죄를 더 하게 만들지 말아달라!" 

 

천리교의 난을 평정한 후, 청나라는 호적보갑제도를 강화한다. 그리고 사교에 대한 처벌제도를 제정, 강화하고, 금서에 대한 단속역량도 강화한다. 이번 변란의 최대 수익자는 면녕이다. 면녕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적절히 지휘하고 위기에 잘 대처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았고, 이것이 아마 그가 나중에 황제에 오르게된 가장 주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