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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 삼국의 역사를 바꾼 인물들...

by 중은우시 2022. 1. 5.

글: 재하도장문(在下刀掌門)

 

교위는 중국역사상 중요한 무관이다. 진나라때 처음 설치하기 시작했고, 한나라는 교위의 전성시기이다. 지위는 장군(將軍)에 바로 다음간다. 다만 교위는 자신이 이끄는 부대가 있도, 장군은 반드시 자신이 이끄는 군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위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동한말기 한영제가 설치한 '서원팔교위'이다.

 

서원은 낙양의 궁원(宮苑)이다. 한영제의 직속 재정관련기구이다. 서원에 임직하는 관리를 "중사(中使)"라고 불렀고, 환관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를 위해 재물을 모은다. 관리로서 성공하려면 서원을 거치는 것이 지름길중 하나였다.

 

하황후(何皇后)를 뒷배경으로 하여 하진(何進)을 우두머리로 하는 하씨일족의 세력이 날고 강해지자, 한영제는 하씨형제들을 꺼려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서원이 군사기구를 설치한다. 188년 팔월에 설치한다. 한영제는 귀족자제들과 현역군인들 중에서 골라온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통할했다. 이렇게 일부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하진의 세력을 분산시키고자 했다.

 

189년 사월 한영제가 사망한다. 그후 천하는 대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이 조직은 1년도 존재하지 못했다. 다만, 서원팔교위는 하나하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상군교위(上軍校尉) 건석(蹇碩)

 

건석은 직접 한영제의 지휘를 받아, 각군을 통할했다.

 

건석은 십상시중 한명이다. 또한, 한영제가 가장 신임하는 환관이었다. 

 

한영제에게는 두 망의 황자가 있었다. 하나는 유변(劉辯), 다른 하나는 유협(劉協)이다. 한영제는 유변은 위엄이 없다고 생각하여, 황위를 유협에게 넘기고자 했다. 그러나 망설이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에 중병에 걸려 병석에 눕는다. 그리고 유협을 '서원팔교위'의 으뜸인 건석에게 부탁한다.

 

한영제가 죽은 후, 건석은 하황후의 오빠인 대장군 하진을 죽이고 유협을 황제에 앉힐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건석은 하진에게 논의할 일이 있으니 입궁하라고 통보한다. 하진은 수레를 타고 궁으로 갔다. 그런데 궁문앞에서 그가 심어둔 자로부터 암시를 받고 바로 도망쳐 군영으로 돌아온다. 병을 핑계로 다시는 궁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후 하진은 유변을 황제에 앉힌다. 그리고 유변의 모친 하황후를 황태후로 모신다. 이때부터 동한의 실권은 하진의 손아귀에 쥐어진다. 하진은 조정대권을 장악했고, 건석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건석도 하진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서 중상시 조충등과 연합하여 하진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고, 결국 하진에게 죽임을 당한다. 

 

중군교위(中軍校尉) 원소(袁紹)

 

원소(? - 202. 6. 28). 자는 본초(本初), 여남 여양 사람. 한말의 삼국군웅중 한명.

 

원소는 동한의 명문집안 출신이다. 그의 증조부부터 원씨집안은 4대에 5명이 삼공의 자리에 오른다. 그 자신도 삼공의 윗자리에 오른다. 그리하여 그의 가족은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고 불린다.

 

원소는 용모도 준수하고, 일찌기 조정의 부름을 여러번 거절하고 낙양에 은거했다. 은거기간동안 허유, 장막등과 사이좋게 지낸다. 하진이 황건군을 진압할 때 원소는 기회가 왔다고 보고 은거생활을 끝내고 하진의 심복이 된다. 

 

건석이 죽은 후, 원소는 하진에게 모든 환관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도록 건의한다. 그리고 병사를 이끌고 궁안으로 들어가 살륙을 벌인다. 그때 동탁의 군대가 궁으로 진입한다. 동탁은 유협을 황제로 앉히고자 했다. 원소는 급히 기주로 도망친다. 

 

원소는 기주를 점령하고, 청주, 병주의 2개주까지 탈취하고, 유주의 공손찬을 격패시켜 하북을 통일한다. 그의 세력은 이때 전성기에 이른다. 그러나 200년 유명한 관도지전에서 같은 '서원팔교위' 출신의 조조에게 패배하고, 2년후 사망한다.

 

하군교위(下軍校尉) 포홍(鮑鴻)

 

포홍(? - 189년), 동한말기의 장수.

 

포홍은 삼국시대에 비록 아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는 확실히 명장이다. 그가 우부풍(右扶風)을 맡고 있던 기간동안 서량(西凉)의 한수(韓遂)가 반란을 일으켜 쳐들어온다. 포홍은 부풍군을 이끌고 파로장군(破虜將軍) 동탁과 공동으로 한수의 서량반군을 대파한다. 이를 역사에는 '미양지전(美陽之戰)'이라 부른다. 중평5년(188년) 팔월, 한영제는 포홍을 서원팔교위중 하군교위로 임명한다. 그후 조정은 그를 파견하여 여남의 황건군을 토벌하게 한다. 포홍은 다시 황건군을 대파했다. 다만 그는 군수물자를 횡령했다는 고발을 받아 탄핵당하고 결국 감옥에서 죽음을 맞는다.

 

전군교위(典軍校尉) 조조(曹操)

 

조조(155-220.3.15). 자는 맹덕(孟德), 아명은 아만(阿瞞), 동한말기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 문학가. 삼국시대 조위정권의 기반을 닦은 인물.

 

중평5년(188년), 한영제는 외척인 대장군 하진을 견제하기 위해 '서원팔교위'를 설치하는데, 조조는 집안배경으로 팔교위중 전군교위에 임명된다. 조조는 비록 명문집안 출신이지만, 명문집안중에서는 '한족(寒族)'이었다. 조조는 병법에 정통하고, 시가에 능했다. 그의 시가는 강개비량(慷慨悲凉)하고 그의 병법은 신기막측했다. 조조는 원소와 동탁을 토벌한 후, 건안원년(196년) 한영제를 허도로 모셔가서 대장군, 무평후에 봉해진다. 이때부터 조조는 "천자를 끼고 제후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식으로 대권을 장악한다. 여포를 멸하고, 원소를 격파하고, 오환을 정벌하여 북방을 통일한다.

 

조군좌교위(助軍左校尉) 조융(趙融)

 

조융. 자는 치장(稚長). 동한말기 양주 한양군 사람. 

 

조융에 대한 역사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단지 그가 나중에 조조에 투신하며, 조조는 그가 옛날의 동료라는 점을 고려하여 '탕구장군(蕩寇將軍)'에 봉하고, 관직은 '광록대부(光祿大夫)'에 봉해진다. 그와 관련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예형(禰衡)의 그에 대한 평이다: "치장(조융)은 손님접대할 때 주방을 감독하게 할 만하다" 이를 보면 그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은 아닌 것같다.

 

조군우교위(助軍右校尉) 풍방(馮芳)

 

풍방. 형주 서릉 사람. 환관 조절(曹節)의 사위. 나중에 관직이 대사농(大司農)에 이른다.

 

그는 일찌기 상서랑을 지냈는데, 환빈(桓彬)은 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술마시는 것을 즐겼는데, 매번 풍방은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풍방은 화가 났고, 그들을 주당이라고 고발한다. 이를 보면 아주 재미있는 사람인 것같다.

 

<산양공재기>의 기록에 따르면, "소황문 건석을 상군교위로,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원소를 중군교위로, 둔기교위 포홍을 하군교위로, 의랑 조조를 전군교위로, 조융을 조군좌교위로, 풍방을 조군우교위로, 간의대부 하모를 좌교위로, 순우경을 우교위로 삼았다. 여덟명의 교위는 모두 건석의 지휘를 받았다."  

 

좌교위(左校尉) 하모(夏牟)

 

하모, 동한의 대신. 간의대부를 역임했고, 나중에 좌교위가 된다. 건석이 피살당한 후, 하모는 하진에 의탁한다. 하진이 피살당한 후, 하모는 허진의 옛부하들과 군량을 나누는 문제를 놓고 다투다가 피살당한다.

 

우교위(右校尉) 순우경(淳于瓊)

 

순우경(? - 200), 자는 중간(仲簡), 하남 우주 사람. 

 

기실 우교위 순우경은 크게 소개할만한 인물이다. 순우경은 나중에 원소를 따르고, 그 휘하의 대장이 된다. 장합, 고람등의 명장들과 나란히 이름을 떨친다. 관도지전이 대치상태일때 원소는 순우경을 군량미를 보관한 오소를 지키도록 보낸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조조의 오천정예병에 빼앗긴다. 그리고 그는 조조군에게 코를 베인다. 조조는 옛날의 동료가 이런 참혹한 모습인 것을 보자 "당신은 지금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무슨 이유때문인가?"라고 묻는다. 순우경은 "승부는 하늘이 정하는 것인데, 나에게 물어서 뭐하겠는가?"라고 대답한다. 조조는 원래 순우경의 목숨을 살려주고자 했으나, 허유가 옆에서 이렇게 권한다: "앞으로 그가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의 코가 베인 것을 보면 오늘의 치욕과 원한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조는 옛날의 동료 순우경을 죽여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