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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도시

형주(荊州): 초(楚)나라 4백년 도읍지

by 중은우시 2022. 4. 20.

글: 정수영(程遂營)

 

삼국시대 유비(劉備)가 형주를 빌리고(借荊州), 주유(周瑜)가 형주를 빼앗고, 관우(關羽)가 형주를 잃는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이백(李白)의 시에 나오는 "천리강릉일일환(千里江陵一日還)'의 '강릉'은 바로 오늘날의 형주를 가리킨다. 역사상 형주가 휘황했던 시기는 삼국시대도 아니고 당나라때도 아니다. 일찌기 2000여년전의 춘추전국시대이다.

 

초나라는 형주를 400년간 도읍지로 삼았다.

 

형주라는 명칭은 예로부터 있었다. 하(夏)나라초기 대우(大禹)가 구주(九州)를 설치하면서, 장강중류를 형주로 하였다. 동시에 선진(先秦)의 여러 사적들 예를 들면 <좌전> <국어> <전국책>등에서는 형(荊)과 초(楚)는 왕왕 같은 뜻으로 쓰였다. 초국(楚國)을 형국(荊國)이라고도 불렀다. 오늘날 초문화는 형초문화(荊楚文化)라 부를 수도 있다.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형'과 '초'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초(楚), 총목(叢木), 일명형야(一名荊也)". 즉 형이라는 것은 초본식물(덩쿨식물)로 같은 물건을 가리키는 두 가지 이름이다. 일종의 유연성이 비교적 좋은 덩쿨나무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우가 구주를 나눌 때, 아마도 형주일대에는 '형'이 많아서, 이곳을 형주라고 이름붙였을 것이다.

 

형주의 범위는 아주 넓다. '형'이 가장 많은 곳은 형산(荊山)이다. 이 형산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이곳은 형초문화의 발원지이고, 형초의 선주민들은 형산을 초나라의 성산(聖山)으로 보았다.

 

<사기. 초세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초나라의 선조 웅역(熊繹)이 형산을 개발하였다. 이는 초나라의 선주민들이 힘들게 창업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초나라 최초의 선조는 육웅(鬻熊)이다. 그는 황제(黃帝)의 후손으로, 지모가 뛰어났다. 일찌기 주문왕(周文王)과 긴밀하게 교류했으며, 주문왕으로부터 중시받았다. 주나라가 건립된 후, 제후를 분봉할 때, 육웅의 증손 웅역은 자작(子爵)의 작위를 받아, 초자(楚子)라 불린다. 이것이 바로 초기의 초자국(楚子國)이다. 초국 혹은 형국이라고도 부른다.

 

춘추전국시대에, '춘추오패'가 있었다. 제환공, 진문공, 진목공, 송양공과 초장왕(楚莊王)이다. 전국칠웅에는 한,위,조,제,진,연,초가 있다. 오패와 칠웅에 모두 초(楚)가 들어간다. 그리고 초나라는 장강유역의 유일한 대제후국이었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초나라는 봉국된 후 진나라게 멸망할 때까지 800여년간 존속했다. 황하유역의 중원문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장강유역의 초문화를 형성한다.

 

이 기나긴 세월에서 초나라의 도성은 개략 6,7곳이 된다. 그중 도성으로 가장 오래 있었고, 영향력이 가장 큰 곳이 바로 지금의 형주 소재지인 영도(郢都, 오늘날의 형주시 형주구의 기남성)이다. 초나라는 이곳을 400년간이나 도읍지로 삼았다. 오패와 칠웅시절의 도읍지가 바로 이곳이다.

 

고대제왕은 도성의 위치선정을 아주 중시했다. 왜 초나라의 국군은 형주를 굳이 고집했을까? 이는 형주의 풍부한 자원환경과 관련이 있다. 형산일대는 삼림이 무성하여 대량의 산진조수(山珍鳥獸)가 있어 풍부한 자원을 제공한다. 이곳은 일찌기 화씨벽(和氏璧)의 고사가 탄생한 곳이다. 이는 형산에는 좋은 옥(玉)이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강과 운몽택(雲夢澤)은 풍부한 수산자원을 제공한다. 많은 수원은 초기의 농업발전의 기초가 된다. 그리하여 이곳은 장강유역의 어미지향(魚米之鄕)이 된다.

 

초문왕 원년(일설에는 초무왕재위시절)인 기원전689년, 초나라는 도성을 단양(丹陽)에서 형산에 가까운 영(郢)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그후 초나라는 영을 400여년간 도읍지로 삼는다. 형주시의 발전에서 최전성기라 할 수 있다.

 

기남성(紀南城)은 면적이 베이징고궁과 맞먹는다.

 

영도였던 형주는 당시 남중국 정치, 경제, 문화 및 외교의 중심이었다. 적지 않은 쟁패의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그리고 무수한 역사전고가 탄생했다. 에를 들어, 일명경인(一鳴驚人), 문정중원(問鼎中原)은 모두 초장왕재위시기에 나온 고사들이다. 그리고 명열전모(名列前茅)의 최초내력도 초나라의 특산인 더 이상 평범할 수 없는 모초(茅草, 띠풀)와 관련이 있다.

 

명열전모의 '모'는 속칭 띠풀, 백모(白茅)이다. 고서에는 포모(苞茅), 모절(茅蕝), 청모(菁茅)등으로 기재되어 있고, 장강유역과 황하유역에 모두 자란다. 특히 형산 산록에서 많이 자랐다. 초나라가 세워진 후, 주나라천자에게 조공으로 바치는 공품에 바로 이 띠풀이 있었다. 이를 가지고 술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데 썼다. 누룩과 익은 속미(粟米)를 섞어 발효시켜 술을 만든 후, 띠풀을 가지고 여과하여 지게미를 만든다. 그래서 띠풀은 영모(靈茅)로 높이 받들어지고 신성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초나라의 띠풀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용도를 지녔다. <좌전.선공십이년>의 기록에 따르면, 손숙오(孫叔敖)가 초나라에서 군사개혁을 실시하는데, 그중 하나가 '전모여무(前茅慮無)'이다. 그 뜻은 행군때 전문적으로 정찰인원을 내보내서, 대오의 가장 앞을 전진하게 하여, 만일 적군을 만나면 그들은 띠풀을 들어 중군과 후군에 경고를 보낸다. 이 선두부대의 명칭이 바로 '전모(前茅)'이다. 직책은 바로 '여무(慮無)'이다. 정찰하여 전방에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중에 원래 초나라에서 군사정보를 전하는데 쓰이든 띠풀이 점차 '명열전모'로 변화되어 서열이 앞선다는 것을 나타내는 용도로 쓰이게 된다.

 

띠풀이 얼마나 진귀하든간에 이는 한 가지 사실을 설명한다. 초나라와 영도의 경제는 당시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초나라의 생산력은 중원의 여러 나라들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공물로 바칠 수 있는 것이 그저 저급한 토산품 뿐이었다. 초나라가 강대해지면서 이런 상황도 바뀌게 된다.

 

춘추시대 초장왕은 일명경인하여 심지어 문정중원한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초나라는 날로 강대해진다. 어떤 데이타를 보면, 초나라 800년 역사상 모두 60여개의 제후국을 병합하여 영토를 5천리까지 확장했다고 한다. 장강중하류의 거의 모든 지역이 포함된다. 장강이남의 거의 절반의 땅을 차지한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시대에 영토가 가장 넓은 제후국이 되었다.

 

영도는 사상유례없이 발전한다. 환담(桓譚)의 <신론.견비>에 따르면, "초나라의 영도는 수레바퀴와 수레바퀴가 부딛치고, 사람과 사람의 어깨가 서로 부딛치며, 시장안은 자주 막혀서, 아침에 새 옷을 입고 나가면 저녁에 들어올 때면 헌옷이 된다고 했다." 당연히 이는 과장된 것일 것이다. 다만 많은 사료에 당시 초나라의 영도, 위나라의 대량(大梁), 진나라이 함양(咸陽)등은 모두 번화한 대도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0,80년대 고고학자들은 영도 기남성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을 시도한다. 실제측량결과에 따르면, 기남성의 궁전면적은 72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해, 북경고궁(자금성)과 면적이 비슷하다. 추측에 따르면, 한창 때의 영도인구는 아마도 30만명가량이었을 것이다. 당시 장강상류의 성도(成都), 하류의 양주(揚州), 소주(蘇州)는 도시로서 비록 발전하였지만, 그래도 영도와 비교하면 손색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봉조(鳳鳥)를 숭배하고, 우리는 낭만적인 시를 쓴다.

 

장강의 물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한다. 도시의 발전에도 상승과 하락이 있다. 초나라가 강대해지면서, 초나라의 초기 군왕들이 남긴 간고창업의 정신은 점점 쇠퇴된다. 초나라의 군주는 맹목적으로 자만심을 갖고 정치는 점점 부패한다. 굴원같은 충신은 배척당하고, 백리해, 오자서같은 정치, 군사인재들도 중용받지 못해, 다른 나라로 흘러들어간다. 

 

기원전278년, 진나라의 대장 백기(白起)가 영도를 함락시키고, 초양왕은 도망쳐서 잠시 난을 피한다; 50여년후인 기원전223년, 진나라는 다시 대장 왕전(王翦)을 보내 60만대군을 이끌고 초나라의 수도 수춘(壽春)을 함락시킨다. 이렇게 초나라는 멸망한다.

 

초나라는 장강유역에서 800여년간 존속했다. 초나라문화는 초나라의 멸망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영도를 중심으로 한 역사시기에 지혜로운 초나라사람들은 한편으로 선진적인 중원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장강중하류의 독특한 자원우세를 빌어 중원문화와 다른 형초문화를 창조해낸다.

하나는 봉(鳳)문화이다. 1980년대, 형주의 강릉망산1호 초묘(楚墓)에서 진귀한 문물이 발견된다. 호좌봉가고(虎座鳳架鼓). 현재 호북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채색으로 색칠된 봉조가 머리를 똑바로 들고 있어 마치 목을 빼고 소리를 내는 것같다. 쌍봉의 긴 발은 호랑이 등을 밟고 있다. 백수지왕인 맹호가 봉조에 굴복해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북에는 두 마리의 봉황새의 목부분을 조각해 놓았는데, 조형이 운치있고, 설계가 정교하다. 뛰어난 예술표현력을 보여준다. 

 

북방의 황하유역은 용(龍)을 숭배했다. 중화민족은 '용의 전인'이라 불린다. 그러나 봉황문화도 중국문화에 대한 영향력이 아주 크다. "용봉정상(龍鳳呈祥)", "용비봉무(龍飛鳳舞)"처럼 둘을 나란히 부르곤 한다. 이런 문화재는 선명하게 형초문화의 봉황숭배전통을 보여준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초나라의 영도는 이미 비교적 강렬하고 견고한 봉황숭배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것은 <초사(楚辭)>를 대표로 하는 낭만주의문화이다. 굴원은 초나라 자귀(秭歸)사람이다. 오랫동안 영도에서 관직에 있었다. 그리고 이곳을 자신의 제2의 고향으로 삼는다. 말년에 이르러, 굴원은 정치적으로 배척당하여, 영도에서 쫓겨난다. 그후 영도가 진나라군대에 점령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쫓겨난 기간동안 그는 초나라의 운명에 대한 우환의식을 가지고 <이소> <천문>같은 문학작품을 창작한다. 나중에 후인들에 의해 계승, 가공되어 <초사>가 형성된다. 이는 황하유역에서 탄생하고, 현실주의특징이 강한 <시경>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초사>와 <시경>은 일남일북, 일현실일낭만으로 중국문학사상의 쌍벽과 같고, 중국인의 정신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해주었다. 

 

필로남루(篳路藍縷, 섶나무로 만든 초라한 수레와 누덕누덕기운 헤진 옷), 피형참극(披荊斬棘,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가다)의 창업이야기, 일명경인, 명열전모의 열심히 하는 정신, 봉황숭배의 길상문화, <초사>에 나타나는 낭만적인 스토리는 모두 형주고성에서 발생했고, 전파되어 나갔다. 나중에는 형초문화의 정수가 되고, 나아가 장강문화, 중화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이 된다.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