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옥미수(玉米穗)
1928년 연말, 국민당군은 정강산에 대한 제3차 포위소탕작전을 벌인다. 정강산에서는 당정군긴급회의를 개최하여 대책을 논의한다. 회의에 출석한 사람은 모택동(毛澤東), 주덕(朱德), 진의(陳毅), 홍오군(紅五軍)의 팽덕회(彭德懷), 등대원(滕代遠), 상감변구특위서기(湘贛邊區特委書記) 담진림(譚震林)등이었다.
주덕이 의견을 내놓는다: 정강산은 우리가 1년간 건설한 혁명근거지이다. 쉽게 버릴 수 없다. 다만 만일 모든 홍군이 이 산을 지킨다면 양식이 부족하여 오래 버틸 수 없고, 고사당하는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홍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홍4군 31단과 홍5군은 모택동, 팽덕회 두 동지가 지휘하여 정강산을 고수하고, 나(주덕)는 홍4군 28단, 29단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동으로 가서 민(閩, 복건), 월(粤, 광동), 감(贛, 강서)의 3개성의 변방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여 새로운 근거지를 만든다. 이렇게 하면 포위공격하는 적을 분산시킬 수 있고, 동서에서 호응하며 전투할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주덕의 의견에 동의했다. 모택동도 그의 의견을 내놓는다: 나는 원칙적으로 주덕 동지의 의견에 동의한다. 다만, 산을 지키는 부대가 너무 많은 것같다. 동쪽으로 포위망을 뚫는 부대를 강화해야 한다. 그래야 적을 유인하여 추척하도록 할 수 있고, 정강산의 포위망을 푸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택동과 주덕이 홍4군 전부를 이끌고 감남(강서남부) 방면으로 포위만을 돌파하여 민감변구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팽덕회, 등대원의 두 동지가 홍5군과 원문재(袁文才), 왕좌(王佐)부대로 하여금 정강산에 남아 지키게 하고, 제5군의 주력이 주변으로 유격전을 전개해 나가 수비군의 작전에 호응한다. 변구특위는 담진림 동지가 책임지고 영신현(永新縣) 지구로 이전하여 게속 변구의 각현당위원회를 영도하며, 군중투쟁을 일으켜 홍군의 작전에 협력한다. 모택동의 이 제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주모(주덕, 모택동)가 홍4군을 지휘하여 포위망을 뚫은 후, 전투에서 승전도 있었고, 패전도 있었다. 마침내 1929년 3월 상순, 흥국현성(興國縣城)을 함락시키고, 동고(東固)를 근거지로 하는 흥국현, 신풍현소비에트정부를 건립한다. 이렇게 하며 민감변구정권의 초보적인 기초를 건립한다.
이때, 모택동은 동고에서 홍군당의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정강산 포위망돌파의사결정 및 포위망돌파후의 작젆생동에 대한 검토(반성)를 한다. 회의에 출석한 사람은 홍4군의 고위당군간부들 외에 감남특위의 사람들도 참석했다. 모택동은 검토회에서 보고를 한다. 내용은 개략적으로 이러하다: 이번에 포위망을 돌파하고 동진하면서 홍군의 손실이 너무 컸다. 정강산에서 출발할 때의 인원에서 2/3를 잃었다. 우리가 포위망을 돌파한 후, 정강산의 상황은 길안현위(吉安縣委)에서 보내온 보고서에 따르면, 정강산은 이미 2월 10일 국군에 함락되었다. 산위에 있던 모든 후방기관, 민방은 불태워졌다. 사람들은 피살된 사람을 제외하고 모조리 산구를 떠났다. 팽덕회 동지의 홍5군은 이미 상유(上猶), 숭의(崇義)지역으로 옮겨가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고, 원문재, 왕좌의 부대는 계동(桂東)지구로 옮겨가서 유격전을 벌이고 있다. 영신, 영강(寧岡) 부근의 각현 소비에트구는 모두 파괴되고, 건물을 소실되고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므로, 이번 이번 반국군제3차포위소탕작전의 의사결정은 잘못된 것이다. 여러분들이 의견을 많이 제출해주시고, 깊이있게 검토하여, 모든 동지의 잘못을 시정하여 이후의 교훈으로 삼자.
이때, 모택동의 제안으로 막 홍4군 28단 단장에 발탁된 임표(林彪)가 발언에 나선다: 포위망돌파작전은 주덕이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이 잘못된 의사결정으로 홍군, 소비에트정부, 공농군중이 중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 책임은 주덕 동지가 져야 한다. 그러면서, 임표는 주덕에게 군벌기질이 남아 있으며, 정치적 두뇌가 없고, 전투에서 그저 강대강으로 부딛칠 줄만 알지, 전략전술이 없으므로 당은 이후 군사영도에 대하여 새로 연구분석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진의(陳毅)는 임표의 말을 듣자 그 말이 옳지 않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몸을 일으켜 발언한다. 개략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포위망돌파회의에 나는 참석했다. 당시 주덕동지는 하나의 원칙을 내놓았고, 구체적인 계획은 모택동 동지가 내놓았다. 그리고 참석한 동지들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만일 책임을 져야 한다면, 마땅히 모택동 동지가 주요책임을 져야 하고, 주덕동지가 그 다음으로 책임을 져야 하며, 나 자신도 책임을 져야 한다. 임표 동지는 그 회의에 출석하지 않아서, 상세한 내용을 몰라, 주덕 동지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하는데, 이건 볼셰비키동지가 마땅히 가져야할 태도가 아니다. 군사지휘문제에 관하여, 적군이 우리보다 10배나 많고, 도처에서 적의 추격, 차단을 당하고 있는데, 누가 실패하지 않을 것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서금(瑞金)현성을 습격하는데 성공하고, 대백지(大柏地)에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여 우리보다 3배나 많은 적군을 궤멸시켰다. 우리 군이 소수로 다수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전체 동지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운 결과이다. 다만 당시에 주덕동지가 극력 공격하자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주덕동지가 직접 전선에서 지휘하지 않았던가? 나(진의)와 임표 동지는 모두 동시에 주덕 동지를 따라 정강산에 올랐다. 매번 전투할 때마다 우리는 같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말살될 수 없는 것들이다. 당은 모든 동지에 대하여 공정해야 한다. 여러 동지들이 개인의 호오(好惡)를 가지고 사실을 왜곡하지 말기 바란다.
29단 단장 호소해(胡少海)도 일어나 발언했다. 임표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것은 주덕 동지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이다.
주덕은 회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검토회는 모두 평등한 것이고, 누구든지 잘못이 있으면 비판받아야 한다. 나의 잘못에 대하여 그것이 사실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포위망돌파의사결정이 만일 잘못된 것이라면 당연히 책임을 지겠다. 다만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군벌기질이 남아 있는데 대하여 아마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여러분들이 시정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
모택동은 회의장의 분위기가 좋지 않자, 계속하여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즉시 일어나 말한다: 여러분들이 의견을 발표했고, 각자 의견이 있다. 우리는 공산당원이니 절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해서는 안된다. 여러분들이 냉정하게 자아반성하길 바란다. 오늘 회의는 잠시 산회하고, 여러분들이 심사숙고할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다음 회의때 다시 검토하기로 하자.
회의후에 사람들은 의론이 분분했다. 어떤 사람은 "옹모반주(擁毛反朱)"를 주장하며 주덕을 쫓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다른 일부 사람들은 "옹주반모(擁朱反毛)"를 주장했다. 의견이 갈려서 분위기가 심각했다. 지방당의 대다수는 주덕에 동정적이었다. 다만 당정공작에 모택동이 없으면 안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즉시, 진의(陳毅), 장계춘(張繼春)등을 불러서 조정을 시도한다.
그때 모택동은 교착상황을 일시에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잠시 인내하기로 한다. 지방당동지들에게 유감을 표명하고, 동지들이 오해하지 말 것을 희망한다고 했다. 주덕은 그러나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혁명은 개인을 위한 일이 아니다. 그는 일찌감치 군벌도 했었다. 다만 각성한 후, 당의 동지들이 그의 혁명참가를 용인해 주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필생의 행운이다. 현재 그의 거취는 모두 당이 결정하면 된다." 임표도 어려움을 알고 물러난다. 그는 진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시적인 충동으로 실언을 했습니다. 제가 젊은 혈기로 한 일이니 용서해 주시고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옹모반주'와 '옹주반모'의 풍파는 잠시 수면아래로 가라앉는다. 그후 검토회의도 다시 소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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