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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무정(武亭): 팔로군 총사령부의 포병단장

by 중은우시 2022. 4. 24.

글: 대웅역사관(大熊歷史觀)

 

1937년 8월 25일 홍군 총사령부는 명령을 내려 홍1방면군, 홍2방면군, 홍4방면군 및 섬북홍군(陝北紅軍)을 개편하여 국민혁명군 제8로군(약칭 '팔로군')으로 개편했다. 이전의 홍군 총사령관 주덕(朱德)이 팔로군의 총지휘관이 되고, 부총지휘관은 팽덕회(彭德懷)가 맡았으며, 참모장은 섭검영(葉劍英), 부참모장은 좌권(左權)이 맡는다. 산하에는 120사(사단직속부대 교도단), 115사(사단직속부대 독립단), 129사(사단직속부대 교도단)이 있었으며, 매 사단은 2개의 여단을 지휘하고, 매 여단은 다시 산하에 두 개의 단을 지휘했다. 

 

이것이 바로 항전시기 홍군이 팔로군으로 막 개편된 후의 기본편제이다. 당연히 3개사단의 산하에 있는 12개의 주력단을 제외하고 팔로군 총사령부는 후방유수처(後方留守處)가 있었다. 즉 팔로군 총사령부기관의 안전을 보위하는 부대이다. 같은 해 12월, 팔로군 후방유수처는 유수병단(留守兵團)으로 개편되며, 사령관은 초경광(肖勁光), 정위는 막문화(莫文驊), 참보장은 조리회(曹里懷)가 맡는다. 이 유수병단은 팔로군총사령부의 직속부대라 할 수 있고, 연안주변의 치안문제를 책임졌다.

 

기실, 팔로군 총사령부에는 유수병단외에 두 개의 주력단이 있었다. 즉 팔로군 총사령부의 직속부대였다. 하나는 팔로군총부포병단(砲兵團)인데, 이 단은 화포와 병사로 구성되어 포병이라 불렀다. 인원편제는 하나의 단 급이어서 포병단으로 불렸다. 

 

알아야 할 것은 혁명전쟁연대에 팔로군은 무기와 탄약이 아주 부족했다. 화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희귀물자라 할 수 있었다. 만일 어느 단에 몇 문의 산포(山砲)가 있다면 그 부대는 절대로 주력병단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보배로 취급했을 것이다. 화포가 보배일 뿐아니라, 화포를 다루는 병사도 보배취급을 받는다. 희귀인재이기 때문이다.

 

팔로군이 자신의 포병단을 성립한 것은 평형관전투에서 115사단의 343여단의 포병연 사병이 화포를 사용하여 연속으로 일본군의 몇개 화력포인트를 박살내어 성공적으로 보병의 진격작전을 엄호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평형관대첩을 거두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심모원려의 모택동은 포병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후의 전쟁에서 만일 포병과의 합동작전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배경하에서 팔로군 총사령부 포병단이 정식 성립되었다. 이 어려운 임무를 맡은 사람은 팔로군 총사령부의 작전과장 무정(그는 조선인이다. 1925년 입당했고, 유일하게 장정에 참가했던 조선인이다). 

 

소비에트구보위전에서 무정의 정교한 포술은 홍3군의 군장 팽덕회의 칭찬을 받는다. 동시에 그가 지휘하는 포병영은 근거지보위전에서 큰 역할을 해낸다. 아마도 무정이 일찌기 포병에서 일한 것때문에 팔로군총부 포병단이 성립된 후 무정이 포병단의 단장을 맡은 것일 것이다. 구창성(邱創成)은 정위가 되고, 광유민(匡裕民)은 참모장이 되어 산하의 6개 포병연을 지휘하게 된다.

 

비록, 새로 성립된 포병단은 규모가 아주 작았고, 화포도 부족했지만, 단장, 정위, 참모장등의 노력하에 팔로군총부포병단은 점점 발전한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일본의 산포를 획득하고, 게다가 우군의 원조도 받아 팔로군총부포병단은 비록 규모는 적지만 갖출 것은 다 갖추는 수준으로 성장한다.

 

1944년, 팔로군총부는 포병단을 기초로 연안포병학교를 개설한다. 교장을 맡은 사람은 곽화약(郭化若)이었고, 부교장은 원래의 포병단정위 구창성이었다. 이 포병학교는 팔로군포병의 요람이 된다. 이때부터 팔로군총부포병단은 전투에서 포병양성으로 임무가 바뀐다. 이렇게 하여 팔로군의 포병부대는 신속하게 발전을 이루게 된다. 

 

연안포병학교를 졸업한 포병은 나중에 해방전쟁에서 각 야전군포병의 핵심인원이 된다. 그들은 해방전쟁의 승리를 거두는데 거대한 공헌을 한다. 알아야 할 것은 해방전쟁후기 인민군대가 일으킨 모든 공성전에서 포병은 공성을 성공시키는 주력이 된다. 예를 들어, 금주전투, 제남전투, 태원전투, 난주전투등의 전투에서 포병은 큰 역할을 한다.

 

팔로군총사령부에는 포병단 외에 또 하나의 특무단(特務團)이 있었다. 경비단(警備團)이라고도 불리웠다. 주요직책은 팔로군지휘관들의 안전을 보위하는 것이었다. 팔로군유수병단은 전체 연안주변의 안전을 책임졌지만, 특무단은 팔로군지휘부의 안전을 책임졌다. 예를 들어 어느 사령관이 팔로군의 모 사단, 혹은 모 근거지를 시찰할 때, 특무단의 인원이 도중의 안전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1937년 8월, 홍군총사령부 특무단이 성립된 후, 단장은 위걸(韋傑, 부임하지는 않음)이 되고, 나중에 황곡현(黃鵠顯)이 대리단장의 임무를 맡는다. 사진화(謝振華)가 정위를 맡고, 윤선병(尹先炳)이 참모장이 된다. 비록 단장 위걸은 부임하지 않았지만 건국후 중장계급을 받는다. 대리단장 황곡현은 소장계급을 받는다. 포병단의 단장 무정은 항전승리후 귀국하였기 때문에 계급을 수여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포병단의 정위 구창성, 참모장 광유민은 모두 중장계급을 수여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