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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주류

"피의 마오타이(茅臺)": 알려지지 않은 국주(國酒) 이야기

by 중은우시 2022. 6. 18.

글: 이대야(二大爺)

 

1951년 2월 20일, 귀주성(貴州省) 인회현(仁懷縣) 인민법정은 제37호형사판결문을 통해 왕병간(王秉干)을 "비특무장반변(匪特武裝叛變)음모지지죄"로 극형에 처해진다. 나이 겨우 38세였다.

 

왕병간이 누구인가? 모대진(茅臺鎭)의 "영화소방(榮和燒房)"의 사장이다. 그가 내놓은 "영화주(榮和酒)"는 바로 마오타이주(茅臺酒)의 3개 전신중 하나이다.

 

1. 국주(國酒)의 유래

 

귀주 사람들은 술을 빚는 과정을 소주(燒酒)라고 부른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술을 만드는 공장을 "소방(燒房)"이라 칭한다. 1915년 파나마국제박람회에 참가하기 전에, 모대진에서 생산되는 술은 복잡한 제조기법으로 품질이 보장되어 서남지역에서 이미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단지 교통이 불편하고, 생산량이 많지 않아, 전국적인 범위에서 명성을 얻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시 모대진에서 술을 생산하는 곳은 두 곳이었다. 1862년에 건립된 "성의소방(成義燒房)"과 1878년에 생산을 시작한 "영화소방"이었다. 둘 다 가족들간에 전승되는 기업이었다. 두 집안의 술은 대외적으로 "마오타이주"라고 불리지 않았고, 모모소방의 "회사모주(回沙茅酒)"라 불렸다. 이 명청은 기실 생산기업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두 집안의 술은 상표와 포장에서만 구분이 있었고, 각각 "성의주" "영화주"로 불렸다. 

 

1915년 별다른 생각없이 중화민국정부의 농상부(農商部)는 "성의"와 "영화" 두 집안의 술을 지방특산물로 만국박람회에 참가시킨다. 생각지도 못하게 중국인들이 꿈에도 그리워하던 "금상"을 받게 된다. 두 집안은 '금상'의 영예를 놓고 소송을 벌였고, 나중에 귀주성정부가 중재하여 금상을 둘 다 가지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렇게 되어 명성을 얻게 되고, 시장도 생긴다. 1929년 모대진에는 또 하나의 많은 자금을 투자한 "형창소방(衡昌燒房)"이 생긴다. 나중에는 "항흥소방(恒興燒房)"으로 명칭이 바뀐다. 이때부터 삼족정립(三足鼎立)의 국면이 형성되었다. 세 집안 중에서 역사가 가장 유구한 것은 성의이고, 평판이 가장 좋은 것은 영화이며, 생산량이 가장 많은 것은 항흥이었다. 3집안의 가족 성씨에 대응하여 일반사람들은 이 세 곳의 술을 각각 "화모(華茅)", "왕모(王茅)"와 "뇌모(賴茅)"라고 불렀다.

 

마오타이주의 전통적인 제조기법은 1년에 1번만 빚는 것이고, 게다가 5년간 보존해야 했다. 게다가 원료공급부족에도 시달려서 생산량이 많지 못했다. 게다가 국내외에 명성을 얻다보니, 판매가격이 보통의 술보다는 비쌌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은 마실 엄두를 못냈다. 성의주의 병당 판매가격은 반개은원(半個銀元)이었고, 영화주가 가장 비쌌지만 병당 2은원이었다. 마오타이가 진정 일반인들이 마실 수 없는 국주가 돈 것은 1949년 주은래(周恩來)가 직접 국연(國宴)에 쓰는 술로 결정하면서 3개의 소방이 국영으로 귀속된 이후이다. 

 

1950년부터, 인회현정부는 몰수, 접수관리 및 매입등의 방식으로 성의, 영화와 항흥의 3개 사영소방을 국유화한다. 그리고 국영귀주모대주창(國營貴州茅臺酒廠)을 성립한다. 장기간 국연에 쓰는 술이어서 마오타이주는 아주 강력한 정치적 색채가 입혀진다. 마오아티주공장에는 주은래의 상이 세워져 있고, "국주지부(國酒之父)"라 불린다.

 

마오타이는 신중국건립후 부친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진정한 부친은 어디로 갔을까?

 

2. 3명 사장의 최후

 

3개 소방은 모두 사영기업이고, 성의와 영화는 두 가족의 몇대에 걸친 사람들의 피와 땀이 스며 있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공사합영'을 당한 후 그들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1951년, 성의소방의 사장 화문거(華問渠)는 상계의 지도자라는 영예를 얻고, 귀주성 통전부에서 그를 설득하여, 귀주성 상업청의 부청장이라는 관직을 받으면서 성의소방을 1.3만위안의 가격에 '자원하여' 귀주성정부에 매각한다. 89년역사의 '성의소방'은 이렇게 끝난다. 화씨집안의 후손은 2012년 매체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화씨집안이 받은 돈은 세금과 비용을 제외하면 1.2만위안을 받았고, 그 돈은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금액'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화문거는 나중에 정치운동중에 타도되고 1979년 우울하게 세상을 떠난다.

 

또 다른 두 사람의 사장은 우울하게 생을 마치는 것도 못했다. 시작부분에서 언급한 영화소방의 사장 왕병간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사업을 넘겨주길 원치않아 공사합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결과 1951년 '비특무장판변음모지지죄'로 총살당하고 만다. 인회현정부는 영화소방을 몰수했고, 평가금액 500원으로 모대주창에 흡수시킨다. 73년역사의 영화소방도 이렇게 끝난다.

 

또 다른 공사합영에 동의하지 않은 항흥소방의 사장 뇌영초(賴永初)는 1952년 7월 "인민폐46만위안의 국가황금을 절취한" 죄명으로 유기징역 10년형을 받는다. 2년간 갇혀 있다가 석방된다. 다만 국가가 접수관리한 항흥소방은 다시 그의 손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52년 12월말 인회현정부는 '항흥소방'을 접수관리한다. 평가금액 2.5만원으로 하여 이 공장을 벌금으로 몰수하고, 모대주창에 정식 흡수시킨다. 23년역사의 항흥도 이렇게 끝이 난다.

 

이렇게 국영귀주모대주창은 모두 3.75만원의 댓가를 주고 3개의 전통소방을 없애고 천하를 통일한다. 이제 더 이상의 경쟁자는 없다. 3개소방의 후손들이 다시 술을 만들지 못하도록 귀주모대주창은 1980년대에 "화모" "왕모" "뇌모"의 3개 상표까지 먼저 등록해버린다. 진정한 마오타이주의 전수자들은 다시는 옛날의 이름을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3. 대기근시기의 마오타이주

 

술을 만드려면 대량의 곡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중국역사상 가뭄을 만나면 통치자들은 왕왕 술을 만들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곤 했다. 양식을 절약하려는 것이다. 민국시대까지도 이 전통은 유지되었다. 1937년, 귀주당국은 위배양주처벌규칙(違背釀酒處罰規則, 10개조문)을 반포한다. 거기에는 천재지변으로 양식이 곤란할 때는 곡물로 술을 만드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위반하여 술을 만드는 경우 벌금은 최고 8배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마오타이주의 우너료는 주로 고량(高梁)과 소맥(小麥)이다. 제조기법때문에 곡물에 대한 수요가 아주 크다. 1톤의 술을 만들려면 5톤의 식량이 필요하다. 일찌기 인회현 정협부주석을 지낸 주몽생(周夢生)은 이렇게 회고한다. 건국전에 현지에서는 가뭄이 많았고, 식량생산이 줄었다. 그러면 정부가 전체 현애 술을 제조하는 것을 엄금했다. 어떤 때는 금지기간이 1년씩이나 되기도 했다.

 

대약진후의 1959-1961년 즉 "3년자연재해"기간동안 국내는 사상 가장 참혹한 대기근을 맞이한다. 이 시기에 마오타이주는 어떠했을까?

 

조사가능한 자료에 따르면, 1959년, 1960년, 1961년, 마오타이주의 생산량을 합계 2,079톤이다. 수출도 139.86톤에 달했다. 이 수치는 어떤 개념인가? 한번 비교해보자.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오타이주는 제조기법, 원료, 장소등의 원인으로 생산량이 많지 않았다. 1949년이전에 천재지변이 없어 정부가 주류제조를 금지하지 않으면 생산능력이 가장 많은 항흥소방에서 연간 생산하는 양은 32,500킬로그램 즉 32.5톤이 넘지 못했다. 3곳이 서로 경쟁하면서 계속 생산량을 확대했지만, 다 합쳐도 연간생산량은 60톤을 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정상적인 상황하에서 3년간의 생산량을 기껏해야 180톤이다.

 

전국에서 4천만명이 굶어죽은 그 3년동안 마오타이는 2,079만톤이나 생산한 것이다. 생산량이 줄어들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대약진을 이루어 정상적이 연도보다 11.5배나 늘어난 것이다!

 

모대주창의 연간사용원량(原糧)통계에 따르면, 이 2,079톤이 마오타이주에 사용된 곡물은 2,260만근으로 합계 1.13만톤이다. 이건 또 어떤 개념인가? 마오타이주의 산지인 귀주 인회현은 1959년, 1960년 인회현 농민의 1인당 소비량이 350근과 334근(종자, 사료30근 포함)이다. 즉, 실제로 식량은 단지 300근가량이다. 1.13만톤의 식량은 7.5만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기아로 허덕이던 시기에 1만여톤의 곡물을 어디서 구했단 말인가? 1960년을 예로 들면, 마오타이주의 원료가 부족해지자 귀주성은 전체 성의 각현에서 식량 117만근을 모아서 지원해준다. 이렇게 해도 모자라서 사천성 강진현에서 70만근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그해의 생산량 912만톤의 마오타이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1년간의 생산량기록은 1978년이 되어서야 갱신된다.

 

당시에 귀주성은 실제로 어떤 상황이었을까? 긴급하게 식량을 지원해준 몇 개 현을 예로 들어보자: 10만근을 보낸 동자현은 1960년 비정상사망자가 41,734만명에 이르고, 인구가 12.1% 줄어들었다; 마찬가지로 10만근을 보낸 습수현은 3년간 비정상사망이 42,624명이고 449호가 사라진다. 29만근을 보낸 필절현은 3년간 사망자가 53,990명이고, 금사현은 사망자가 5.5만명이다. 사망자가 가장 많았던 미담현은 1960년 4월까지 이미 12.2만명이 사망했다. 전체 현의 농촌인구의 20%가량이다. 집안에 사람이 남지 않은 곳이 2,938호, 집을 떠나 도망간 곳이 4,737명, 고아가 4,735명에 이르렀다.

 

4. 사라지지 않는 의문

 

도대체 누가 이런 대기근의 기간동안 마오타이주를 만들도록 지시했을까?

 

1959년, 당시 귀주성위 제1서기인 주림(周林)은 여산회의기간동안 모대주창에 특별히 지시를 내린다: "마오타이주의 생산을 보장해야 한다. 강철생산도 확실하게 하면서 마오타이주의 생산도 확실하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강철은 원수(元帥)이고, 마오타이주는 황상(皇上)이다." 원래 인회현 사람인 주림은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는 상황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왜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일까?

 

1989년 가을 <모대주창지(茅臺酒廠誌)>의 작업인원이 베이징으로 가서 주림에게 서문을 써달라고 하자, 주림은 모대주창에서 온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1958년, 중앙에서 청두회의(成都會議)를 소집하였다. 하루는 저녁식사를 한 후에 모주석과 산보를 하는데, 모주석은 나에게 돌아가서 마오타이주를 연간 만톤 생산하고, 품질을 보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너희는 그것을 써넣었느냐?"

 

우연히 던진 모주석의 한마디가 마오타이주 생산량의 대약진을 가져왔고, 수많은 아사자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3년간 만들어낸 혈주는 누가 마셨을까?

 

2001년 2월 14일 <신민만보>의 "주선사진(酒仙謝晋)"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1960년대 자연재해기간동안, 문예계는 베이징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주총리가 사람들을 서산으로 초청하여 며칠간 휴식하게 해주었고, 마지막에 모두 불러서 식사를 했다. 그날 총리가 서산빈관(西山賓館)으로 왔고, 하연(夏衍)에게 '오늘 내가 술을 좀 마셔야겠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사진, 우양(于洋)등 술을 잘 마시는 몇 사람이 총리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다. 총리가 사람들에게 마시도록 내놓은 것은 마오타이였다. 대표자들은 흥분했고, 너 한잔, 나 한잔 총리에게 술을 올렸고, 총리는 담소풍생(談笑風生)했다..."

 

2012년 6월 14일, 1959년산 마오타이주가 베이징에서 진행된 롱바오 제64회 경매에서 25.5만위안의 엄청난 가격에 낙찰된다.

 

권군막갈혈모대(勸君莫喝血茅臺) 그대여 피의 마오타이를 마시지 마시오

적적개시원혼루(滴滴皆是寃魂淚) 한방울 한방울이 모두 원한어린 눈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