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해변적서새라(海邊的西塞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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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칭다오 이야기는 백여년전의 '가신(家信)'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1896년 한통의 서신이 제정러시아의 수도 세인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보내어진다. 수신인은 서둘러 봉투를 열고 서신을 읽어보았다. 서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친애하는 빌리 사촌형님, 보내주신 서신은 보았습니다....작년의 그 유쾌했던 공동으로 한 행동은 우리들 상호간의 진귀한 우의를 증명합니다.....저는 당신의 견해에 찬동합니다: 독일은 러시아 극동지구의 멀지 않은 곳에 항구를 얻어서 근거지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다. 이것은 보통의 '가신'이 아니었다. 제정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2세가 독일황제 빌헬름2세에게 보낸 답신이다. 비록 독일과 제정러시아는 근 20년후 제1차세계대전에서 적국으로 만나지만, 이 두 황제는 기실 그다지 멀지 않은 친척관계이다. 제정러시아 짜르의 처인 알렉산드라의 모친은 독일황제 모친의 여동생이다. 두 사람은 모두 영국 빅토리아여와으이 딸들이다. 그래서 제정러시아 짜르는 결혼후 처가 부르는대로 독일황제를 벨헬름 사촌형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빌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비록 아주 친근하게 부르고 있지만, 두 사람의 서신에서 나눈 얘기는 아주 심각한 것이다. 편지를 쓴 19세기말 세계는 이미 유럽열강에 의해 분할되었고, 각 열강들 사이에서는 서로 발을 멀리 뻗으려 했다. 그러다보니 다른 열강의 꼬리를 밟는 일도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일본은 청일전쟁이 끝난 후, 청나라에 요동반도를 할양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제정러시아는 즉각 반대한다: 중국의 동북지방은 우리의 것이다! 조그마한 일본이 감히 나와 다투려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독일, 프랑스 두 나라를 끌어들여 '삼국간섭'을 하여 일본이 이미 입안까지 넣었던 고기를 뱉어내게 한다. 이것이 바로 제정러시아 짜르가 말한 "작년의 그 유쾌했던 공동으로 한 행동"이다.
독일은 통일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확장욕이 활발했던 강국이었다. 예전의 강대국들처럼 우리도 드러내놓고 영토를 차지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독일은 당시 군신간에 이견이 있었다.
독일통일을 추진하던 재상 비스마르크는 잠시 도광양회하고 조용히 국력을 키우자고 한다.
그러나 새로 황제에 오른 빌헬름 2세는 혈기방장했다. 우리도 대서양, 태평양, 전세계로 확장하자!
그리하여, 삼조원로 비스마르크는 사직하게 된다.
태평양으로 가서 일을 벌이려면 우선 근거지가 되는 항구가 필요했다. 이는 영국과 러시아와 같은 극동에서 이미 자리잡은 열강의 눈치를 봐야 했다.
1896년은 "빌리 사촌형님"이 권력을 잡은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고 아직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는 제정러시아 짜르에게 서신을 보내어 사촌매부의 태도를 살핀 것이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짜르는 적극적으로 그 일에 동의해준 것이다. 그리고 서신에서는 독일이 마땅히 '청일전쟁'이후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빠르게 행동할 것을 권유했다. 절대로 그들 공동의 영국할머니(빅토리아여왕)이 선수를 잡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빌리사촌형님"은 서신을 받은 후 아마도 감동했을 것이다: 보라. 나의 이 사촌매부를. 얼마나 통이 큰가. 독일이 무슨 일을 하려하든 못하게 막는 영국할머니와는 확실히 다르다.
당연히, 이후의 사정은 증명한다. 러시아의 이 사촌매부는 영국할머니보다도 더욱 그를 괴롭히게 된다.
빌헬름2세는 즉각 제국해군제독 티르피츠를 불러 그에게 말한다: "원수각하, 당신의 해군이 마침내 극동에서 대담하게 마음에 드는 영구적인 항구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소."
미리 준비하고 있던 티르피츠는 즉시 극동지도를 펼치고, 연필로 산동반도에 원을 그린다. 그리고 독일황제에게 엄숙하게 보고한다: 이곳은 항구를 만들 조건이 좋고, 기후도 적당하여 유럽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장기간 정착하게 적합합니다. 그리고 이 땅을 가지면, 극동함대는 산동과 전체 화북의 수출입무역을 통제할 수 있고, 풍부한 철광산도 가질 수 있습니다.
티르피츠가 가리킨 곳이 바로 교주만(膠州灣), 즉 나중의 칭다오(靑島)이다.
그때의 청도는 어부들의 배가 드나드는 조그마한 어촌이었다.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고적(古迹)으로는 명나라때 설립한 "부산소(浮山所)"등의 몇 개의 지명과 어민들이 제사를 지내던 "천후궁(天后宮)"등 몇 개의 사묘가 있다.
부산소는 오늘날 청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하철역의 이름이고, 이곳은 칭다오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가이다. 대형 쇼핑몰이 이곳 부근에 집중되어 있다. 칭다오에 관광을 가면 이 부근에 투숙하면, 교통, 쇼핑, 식사가 모두 편리할 것이다. 그리고 이곳의 야경은 아주 아름답다. 현지 친구의 말에 의하면 이 부근에 투숙하면 비싼 것빼고는 나머지는 다 완벽하다고 한다.
천후궁은 옌타이에도 있다. 천후(天后)는 남방에서 말하는 마조(媽祖)이다. 이곳은 현재 칭다오민속문화박물관이 되었다. 필자가 갔을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앞에서 보기만 했고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청나라말기의 <천진조약>에서 10개의 통상항구를 개방한다. 영국인이 산동에서 점찍은 곳은 옌타이(煙臺)였다.
그래서 19세기말까지는 칭다오가 아니라 옌타이가 전체 산동의 상업무역중심지였다.
근대이래 칭다오와 옌타이는 교동반도에서 제갈량과 주유라 할 수 있다. 칭다오의 발전을 보면서 지금도 옌타이의 노인들은 발전에서 뒤졌다고는 인정하지만 그다지 인정하려 들지는 않는다. 우리 옌타이의 기후가 더 좋고, 항구도 더 좋다.
우리는 독일해군이 항구를 추천할 때, 무슨 고려를 했는지. 왜 옌타이와 웨이하이(威海)를 버리고 칭다오를 선택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기후와 지형등의 요소외에 독일인들은 제정러시아의 세력범위와 너무 가까이 가는 것을 꺼렸을 수도 있다. 또한 장강유역은 이미 영국의 세력범위였다. 그래서 칭다오가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양자의 딱 중간이었다. 그래서 독일은 그 틈을 파고든 것일 것이다.
다만, 티르피츠의 손가락이 가리킨 것으로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기 시작했다. 칭다오는 이후 백년의 운명이 열린 것이다.
2
1896년 12월 독일 주중공사는 교주만을 조차해줄 것을 청하나, 청나라조정은 거절한다.
빌헬름2세가 어떻게 청나라조정을 압박하여 동의하게 할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사건이 벌어진다. 마치 졸음이 오는데 누군가 베개를 가져다주는 것과 같았다. 산동 조주(曹州)의 민간조직 대도회(大刀會)가 두 명의 독일인 선교사를 살해안다. 빌헬름2세는 기뻐하며 소리친다: "중국인들이 마침내 우리에게 오랫동안 기다렸던 좋은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바로 움직이자!"
그후 빌헬름2세는 독일외교부로 달려가 강경하게 선언하고, 극동함대에 즉시 교주만으로 향하도록 명령한다.
1897년 11월 3일, 독일극동함대가 교주만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전혀 힘들이지 않고 현지의 청군 탄약고를 점령하고, 이어 독일군은 최후통첩을 보낸다. 청군에게 오후 3시전에 교주만에서 물러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포로 말하겠다는 것이다.
빌헬름2세 치하의 독일군은 그들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막무가내였다. 이곳으로 쳐들어온 독일군은 다 합쳐야 겨우 600명이었다. 그러나 전체 교주부(膠州府)의 청군은 수천명이었다. 손자병법에 이런 말이 있다: 10배이면 포위하고, 5배이면 공격하고, 배이면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지켜라. 그러나 독일군은 정반대로 행동했다.
다만 독일인이 오후 3시까지 기다렸는데, 상대방으로부터 회신이 오지 않았다. 연유를 알아보니, 청군이 죽을지언정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수비장수인 장고원(章高元)은 부하들과 마작을 하고 있어서, 독일군이 보낸 최후통첩을 아예 보지 않았던 것이다. 오후3시, '시간을 잘 지키기로 유명한' 독일군은 정확하게 포탄을 청군에 쏟아붓는다. 장고원 장군은 그때까지도 마작패를 들고 있었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청군은 1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성문을 열고 투항한다. 장고원 장군은 생포된다.
독일인은 그를 겁준다: 너는 약정한 시간내에 투항하지 않았다. 사내대장부이구나. 영웅스럽게 죽을 생각인 거지. 우리가 그 뜻을 이루게 해주겠다.
장고원이 말한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모두 오해입니다. 오해입니다.
독일인이 말한다: 그럼 좋다. 너는 부하들을 데리고 즉시 교주만을 떠나라.
장고원이 바로 대답한다: 그건 좋습니다. 좋습니다. 바로 떠나겠습니다. 떠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겨우 600명의 독일군들에게 밀려서 수배나 되는 청군은 총알한발 쏘지 않고, 12월 17일 교주만에서 완전철수하고 만다.
1898년 3월 6일, 청나라조정과 독일은 <교주만조차조약>을 체결하여, 교주만을 독일에 조차한다. 기간은 99년이었다. 1899년 빌헬름2세는 직접 조계지의 신시가지를 칭다오로 명명한다. 이렇게 칭다오가 탄생한다.
이런 연약한 타협은 당연히 댓가를 치르게 된다.
독일과 청나라조정이 싸우고 있을 때, 제정러시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독일황제의 사촌매부인 니콜라이2세는 직접 극동함대를 파견하여 여순항(旅順港)으로 진입한다. 핑계는 그럴 듯했다: 중국이 독일의 침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독일이 교주만에서 철수한 후 우리도 여순, 대련에서 철수하겠다.
독일인은 교주만에 온 후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제정러시아도 마찬가지로 독일인이 떠나지 않았으니 우리도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1898년 3월 제정러시아는 청나라조정과 <여순대련조계조약>을 체결한다. 기한은 25년이었다.
보았는가? 짜르가 보낸 그 서신은 기실 그의 "빌리사촌형님"을 앞잡이로 쓴 것이다. 독일인이 "제2차중국침략붐"을 만들었다는 악명을 뒤집어 쓰게 만들었고, 제정러시아는 그저 뒤따라 간다.
유사한 일을 제정러시아는 근대사에서 중국에 한두번 저지른 것이 아니다. 동북,서북의 수백만평방킬로미터는 모두 이렇게 그들에게 기망당해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 같은 대제국이 마지막 황제이지만, 집정수준은 고하의 구분이 있다. 니콜라이 2세의 교활함은 짜르의 영광된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그러나 빌헬름2세의 도덕적 수준은 그의 조상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곁에 있던 영국인들은 독일과 제정러시아가 이렇게 일을 벌이는 것을 보자, 그들도 한발 끼어들게 된다.
1898년 4월 청나라는 일본의 수중에서 위해위(威海衛)를 회수한다. 그러나 손에 넣은 당일 위해위를 영국에 조차하게 된다. 기간은 마찬가지로 25년이었다. 핑계도 마찬가지로 청나라조정이 독일인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 일은 그후에 코미디같은 결말로 끝나게 된다. 이탈리아가 이 광경을 보고, 마음 속으로 청나라는 조차지를 마구잡이로 넘겨준다고 생각하여, 자신들도 끼어들고자 한다. 그리하여 절강(浙江)의 삼문만(三門灣)을 조차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대청도 이번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이 남긴 여파는 아주 심각했다. 제정러시아가 여순을 강제로 조차한 것으로 인하여, 나중에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러일전쟁은 다시 '만몽문제'로 번지고, 또한 나중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핑계로 작용한다.
깊이 연구해본 후에 비롯 발견했다. 1896년 독일인이 칭다오 신호산(信號山)에 그들의 제국독수리깃발을 게양한 것으로 이후 반세기에 걸친 중국의 고난에 찬 국운은 결정되었다는 것을
3
독일은 칭다오를 점령한 후, 아주 신기하게도 현지에서 진주의식(進駐儀式)을 거행한다. 부근의 언덕을 함대사령관인 디트리히의 이름으로 명명하고, 산에는 자신들의 공로를 새긴다. 또한 독일의 독수리휘장도 새긴다.
아래의 비문은 독일어와 한자로 쓰여 있는데, 독일어는 비교적 간단하다. 즉 어느 해, 어느 달에 우리는 이곳을 점령했다는 내용이다. 중문은 독일인이 현지의 선비를 불러서 번역하게 했는데, 아주 화려한 문체가 되어 버렸다:
"복유아대덕의지제죽수사제독(伏維我大德意志帝國水師提督), 체군휘덕리(棣君諱德利), 증어광서이십삼년십월이십일(曾於光緖二十三年十月二十日), 인재차처이거교역지토지(因在此處而據膠域之土地), 기영용승적(其英勇勝績), 범아동료실심경패(凡我同僚實深敬佩)"
1차대전때, 일본은 핑계를 잡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칭다오를 점령한다. 그리고 이 '디트리히산'을 '신미산(神尾山)'으로 개명한다. 왜냐하면 일본군사령관의 이름이 키미오 미쓰오미(神尾光臣)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비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추가한다:
"대정삼년십일월칠일(大正三年十一月七日), 봉천황어령(奉天皇御令), 제국해륙군점령차처(帝國海陸軍占領此處)"
기실 일본인들은 비문에 이런 문구를 추가한 외에 1차대전이후 칭다오와 교제선(膠濟線, 칭다오에서 지난까지의 철도)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칭다오를 점령한 후 대규모이민을 실행하여, 일본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 한다.
1922년이 되어, 칭다오의 일본교민수량은 이미 10만명에 이르렀다. 이들 이민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 비로소 철저히 떠나게 된다.
이때의 연유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칭다오에는 적지 않은 곳에 벚꽃이 심어져 있다.
벚꽃이 활짝 피는 시기에 벚꽃감상의 명소인 중산공원에서는 벚꽃축제도 열렸다. 공원에서 벚꽃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의 밀도와 벚꽃의 밀도는 같은 계절의 도쿄에 못지 않았다.
1922년 북양정부는 칭다오의 주권을 회복한다. 일본인들은 자신의 '무덕'을 영구히 증명으로 남기기 위해, 이 석각을 잘라서 일본으로 운송한 후에 새로 조립한다. 지금 이 석비는 도코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도쿄에 갔을 때는 그들이 이 '전리품'을 전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이 석비는 지금 기실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이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전후로 디트리히산과 신미산으로 불렸던 작은 언덕은 기실 바로 신호산이다. 산꼭대기에는 회전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서 한바퀴 돌면 칭다오시 남구의 모습을 다 볼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은 칭다오에 가면 반드시 가보아야 하는 곳이다.
나는 산위에서 공원에서 일하는 칭다오 '대만아(大嫚兒)'에게 손짓발짓을 해가면서 그 석비가 어디에 갔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아가씨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칭다오 사람들은 미녀를 '대만아'라고 부른다. 이 방언은 세월의 흔적이다. 이 말은 교동의 다른 지방에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의 어원은 기실 독일어의 "여사(Dame)"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외에 칭다오사람들은 귀여운 어린 여자아이를 "소만아(小嫚兒)"라고 부른다. 이건 현지인들이 창조해낸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외에 칭다오의 노인들은 맨홀두껑을 "고력개자(古力蓋子)"라고 부른다. 이 기괴한 명칭에 대하여 나는 이전에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나중에 독일어를 아는 친구에게 물어보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독일어에서 하수도를 "Gully"라고 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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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실 계산해보면 독일은 1896년 교주만을 점령하여, 1914년 1차대전때 일본인들에게 쫓겨나기까지 기껏해야 칭다오에서 20년을 머물지 못했다. 식민지로 말하자면 기간이 긴 편이 아니다. 그래서 칭다오에서 유명한 독일식건축물들이 더욱 특수한 점이 있다.
독일인은 원래 칭다오를 극동의 함부르크항으로 만들고자 했었다. 칭다오는 독일의 극동지역에서의 유일한 식민지였다. 그래서 칭다오의 건설은 독일황제의 관심사항이었고, 설계계획도 여러번 고쳐서 최종적으로 빌헬름2세가 직접 결정했다. 독일황제의 계획은 이 곳에 10여만평방킬로미터에 최소 5만명을 수용하는 극동의 중요도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등극30주년(1918년)에 직접 시찰을 오고자 했다.
빌헬름2세는 칭다오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관여했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매니아들은 그에게 이런 별명을 붙여준다: 초대칭다오시장.
이 점은 일찌감치 유명해진 '독일하수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칭다오는 독일점령시기에 모두 80킬로미터에 이르는 배수관로를 만들었던 것이다.
비록 이 배수관로는 오늘날 칭다오의 3000킬로미터길이에 이르는 배수관로의 총연장길이와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국내에서 확실히 첫손을 꼽을 만했다.
같은 시기의 상하이는 여러 나라에서 조차하였기 때문에 하수관이 통일되지 못했다. 와이탄(外灘)일대를 제외하고는 배수는 거의 황포강과 소주하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렇게 비교하면 독일은 확실히 칭다오에서 제대로 도시를 만들려고 했던 것같다.
지상에서도 독일은 칭다오를 잘 기획했다. 칭다오시의 남구 구시가지를 가면 도로가 아주 어지럽다고 느낄 것이다. 남쪽이 남쪽같지 않고, 북쪽이 북쪽같지 않다. 그러나 이들 도로를 고공에서 조감하면 이런 모양이 된다
그렇다. 전체 칭다오의 독일건축구역은 총독부라는 중심점을 놓고 전개된다. 법원, 교회, 군영, 감옥등 설비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기초설비는 상당히 완비되어 있고, 위치도 아주 합리적이다.
유일한 문제는 독일인들이 급히 이렇게 많이 건설하다보니, 빨리빨리 짓는 방식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사품질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동시대 유럽건축물과 같이 복잡한 장식을 칭다오에서는 대거 생략해 버렸다.
유럽의 먼친척들과 비교하면 칭다오의 독일식건축물은 번잡함을 버리고 간략하게 했고, 곡선을 버리고 직선을 택했고, 게다가 석재는 가까운 노산석(崂山石, 천안문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의 심석(芯石)과 같은 것이다)을 사용하여 칭다오의 독일건축물이 고박, 겸손하면서도 전아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게 했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총독부와 성미카엘성당이다.
총독부의 남루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3단식 건축이다. 다만 벽은 여하한 장식도 없는 화강암을 사용하여 네모나고 직선의 단단함을 보인다.
성미카엘성당은 천주교성당이다. 건축연도가 늦기 때문에 건축도중에 원래 계획했던 복잡한 고딕식 스타일은 포기하고, 더욱 견실하고 질박한 네오로마네스크식 스타일을 갖게 된다. 이는 오히려 이 성당과 주위의 건축물간에 기이하게 조화를 잘 이루게 해주었다.
시간이 맞지 않아, 성미카엘성당의 주일미사는 보지 못했다. 듣기로 이 성당의 파이프오르간은 아주 듣기좋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튼튼하고 오래 쓸 수 있고, 간략하면서도 간단하지 않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전체 칭다오의 독일식 건축물들은 확실히 남성적인 직선적 심미관에 부합한다.
100년의 세월을 견디고 지금까지 우리 앞에 서 있는 이들 건축물의 튼튼한 노산석을 만지면 여전히 일찌기 활력이 넘치고, 야성이 풍부했던 제국의 맥박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당연히, 국내외에 명성이 있는 칭다오맥주도 독일의 유물이다. 나는 원장(原漿)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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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를 며칠간 걸으면서, 나는 한 가지 문제를 생각했다: 독일점령경력, 일본점령경력 그리고 2차대전후의 더욱 짧았던 미국점령경력, 칭다오라는 이 도시에 있어서,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확실히 이들 열강이 이 아름다운 도시를 점령했을 때, 중국인에게 있어서는 참통과 굴욕의 역사이다. 심지어 당사자에 있어서도 현명한 것은 아니었다.
독일황제 빌헬름2세는 칭다오를 점령하느라 영국과 제정러시아가 독일의 태평양에 대한 야심을 경계하게 되었고, 1차대전때 결국 독일이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는 복선이 된다.
일본이 1차대전후 독일의 수중에서 칭다오를 넘겨받은 행위는 1919년 중국의 5.4운동을 불러왔고, 중국의 대일감정이 친근함, 존경에서 졸지에 원한으로 뒤바뀌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미국 영국 양국은 그들의 확장야심을 경계하게 된다.
결국, 1921년 워싱턴회의에서 일본은 부득이 미국과 영국의 압박으로 칭다오의 주권을 중국에 넘겨주어야 했다. 영일동맹도 이렇게 와해되어 버린다. 영미는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중국을 끌어들여 일본을 억제하려는 외교방침이 나타나게 된다. 일본의 국운도 흥성하다가 쇠락하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 독일, 일본 양국에게 있어서 칭다오는 '저주'에 더욱 가깝다. 상승기에 있던 대국이 지나치게 자신의 힘을 과신하면서 맹목적으로 확장하다가 전환점을 맞이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결국은 원래 그들의 것이 아니던 아름다운 칭다오의 해안선에서 패배하게 된다.
다만, 세월이 흐른 후, 그들이 남긴 고적은 건축과 풍물에 남아 있어, 특이한 풍경을 이룬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이 칭다오라는 도시의 운명을 영원히 바꾸었다는 것이다. 옛날의 자그마한 어촌이 지금은 교동반도 제1대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아마도 푸시킨의 말이 맞는 듯하다. 지나간 추억은 아름답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도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꾼다.
사람이 살고 있으면 도시는 여전히 번성하고, 우리는 과거의 고난, 잘못을 모두 기질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이미 지나간 일을 우리는 후회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네가 겪은 것은 모두 너의 재산이 된다는 것을 믿어도 좋다.
청도라는 이 도시는 항상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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