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곽엽민(郭曄旻)
중국역사상 최초의 통일왕조로서 대진제국(大秦帝國)의 속흥취망(速興驟亡, 빠르게 흥성하고 급격히 망하다)은 역사상 보기 드문 경우이다. <아방궁부(阿房宮賦)>의 “독부지심(獨夫之心), 일익교고(日益驕固)”하여, “수졸규(守卒叫), 함곡거(函谷擧)”까지 겨우 몇 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10여년전에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역사다큐멘터리 <부활의 군단>에는 이에 대해 한 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은 바로 “제국의 존망위기에 남부변방을 지키고 있던 50만 진군이 침묵을 선택했다” “철저히 자신의 손으로 만든 대제국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널리 알려졌고, 논리적으로 그럴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확실히, 가의(賈誼)가 <과진론(過秦論)>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진나라는 산동6국을 평정한 후, 군사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행동을 취한다: 하나는 “남으로 백월(百越)의 땅을 취하여 계림군, 상군을 두고, 백월의 군주는 머리를 숙이고 명을 받는 신하가 된다” 다른 하나는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장성을 축조하여 변방을 지키고, 흉노를 칠백여리에 걸쳐 막았다; 호인들은 감히 남하하여 말을 기르지 못했다.” 여기서 말하는 ‘남으로 백월의 땅을 취했다’는 것은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223년), 계속 남하하여 영남을 정복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이번 전쟁의 과정에 대하여, 최초로 진나라가 영남을 공략한 사건을 기록한 사료는 사마천의 <사기>이다. 태사공 사마천은 책에서 단지 이렇게 적었을 뿐이다: “(진시황) 33년(기원전214년), 여러 도망자, 데릴사위, 상인을 보내어 육량의 땅을 공략했다.”
이런 사람들을 파견한 것은 진나라에서 실행한 보편징병제때문이다. 무릇 일정 연령이 된 남자는 반드시 등기하고 병역을 시작해야 한다. 당시에 이를 “부적(傅籍)”이라 불렀다. 운몽진간이 출토된 후, <편년기>에 따라 추산해서 진나라때 규정된 부적연령은 17세라는 것을 알아냈다. 무릇 “부적”의 연령에 도달하면 일률적으로 2년간 병역에 종사해야 한다. 1년은 본군에서 1년은 경사나 변방에서 보낸다. 통칭하여 “정졸(正卒)”이라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 글자를 아꼈다. 진군이 남하한 건에 대하여 겨우 몇 글자만 남겼다. 그러나, 1천여년후에 만들어진 <자치통감>은 조금 더 상세히 기록했다. 이 송나라때의 사적에는 진군이 영남을 취한 기재내용은 기실 <사기>의 내용을 그대로 베낀 후(여러 도망자, 데릴사위, 상인을 보내어 육량의 땅을 공략했다, 계림군, 남해군, 상군을 설치했다), 그 뒤에 한 마디를 추가한다: “민(民) 오십만명을 보내어 오령을 지키게 하고 월과 혼거하게 했다.”
여기에서 남으로 내려간 진나라사람의 수량이 처음 나타난다. 50만. 그러나, <자치통감>에서도 이들을 “군(軍)”이라 부르지 않고 “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마광은 글을 쓰면서 아주 엄격했다. 그가 쓴 “오십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마도 서한시기의 <회남자(淮南子)>에서 온 것일 것이다. 이 책은 회남왕 유안(劉安)이 쓴 것으로 건원2년(기원전139년)에 처음 한무제를 만날 때 조정에 바친 것이다. 거기에는 “고금의 치란존망화복(治亂存亡禍福), 세간의 궤이괴기(詭異瑰奇)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진나라가 영남을 평정하는 과정에 대하여 <회남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은 영남의 서각, 상아, 비취, 주기를 탐내어, 위(尉, 관직) 도수(屠睢)에게 병졸 50만을 주어 5로로 나누어 남하하게 했다. 1로는 담성지령을 막고, 1로는 구의지새를 막고, 1로는 번우지도(지금의 광동성 광주)에 두며, 1로는 남야지계(지금의 강서성 남강)를 지키고, 1군은 여간지수(지금의 강서성 상요)로 보낸다.”
당시에는 영북에서 영남으로 통하는 수로가 없었다. 그래서 육로로 운송해야 하여 힘과 시간이 들었다. 이 군대의 물자조달의 편의를 위해 물자운송을 책임지는 감(監, 관직임. 진나라는 군에 수, 위, 감을 두었다) 록(祿)으로 하여금 길이 60리, 너비 2장에 이르는 수로를 만들게 하니 영거(靈渠)이다. 이는 장강과 주강의 두 수계를 연결시키는 운하이고, 수당이전에 중원에서 영남지구로 진입하는 주로 수로가 된다.
당시 영남에 살고 있던 월인들은 비록 각각 ‘군장(君長)’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역량이 분산되어 있었다. 다만 전투시에는 매우 용맹하고 완강했다. 실제로 영남은 진나라때 “육량(陸梁)”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바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인 “영남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산륙(山陸)에 살고 그 성격이 강량(强梁)하여 ‘육량’이라고 불렀다”
길들여지지 않은 성격에 지형의 이점까지 갖추어 월인들은 이일대로(以逸待勞), 매복기습등의 전술을 쓰면서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리하여 진군은 매번 공격할 때마다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하여 “삼년불해갑이노(三年不解甲弛弩)”하게 만들었다. 진구은 비록 서구족의 수령 역우송을 죽였지만, 월인은 다시 걸준을 장군으로 추대하여 견결히 저항했다. 진군은 결국 영남 월인들의 밀림전에 적응하지 못했다. “월나라사람들은 모두 밀림속으로 들어가서 금수와 같이 지내면서 진나라의 포로가 되려 하지 않았다.” 더더구나, “밤이면 진나라사람들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고, 도수를 죽였다.” 그리하여 진군은 “수십만이 시신이 되어 피를 흘렸다.”
<회남자>의 이 기록은 확실히 과장된 것이다. 삼국시대 설종이 한무제가 남월을 평정할 때를 추척하면서 한 말에 따르면, “산천이 길고 멀며, 습관이 서로 다르고, 언어가 서로 다르다. 여러 번 통역해야만 말이 통했다. 백성들은 금수와 같고, 장유의 구분이 없었으며, 상투를 하고 맨발로 다닌다. 옷은 왼쪽으로 여미며, 관리는 비록 있기는 해도 없는 것이나 같았다.”
이를 보면, 한나라때까지 남월할거정권의 90여년간의 통치를 겪은 이후임에도, 영남지구의 토착주민의 문화정도는 여전히 극히 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수로서 영남월인은 산동육국처럼 성숙한 국가제도를 가지지 못했고, 흉노인들처럼 통일된 부락정권을 갖추지도 못했다. 그들의 필부지용은 아무리 용맹하다고 하더라도, 훈련을 제대로 받은 진군으로 하여금 수십만이 시신이 되어 피를 흘리게 만들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월인들이 습격을 통해서 약간의 승리를 거둔 적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수는 그 습격에 당하여 사망했을 것이다. 진군은 비록 잃은 병력이 많지는 않았지만, 총사령관이 피살된 것이므로 진시황이 진노하여 다시 대군을 파견하여 결국 영남을 정복했을 것이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다. <부활의 군단>에서 말하는 소위 진군이 50만의 남방군단을 보유했다는 설은 그 근본을 따져 올라가면 이 <회남자>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작자인 유안은 스스로 인정했다. 진군이 영남 각지에서 참패한 기록은 여하한 관방문서나 기록이 없으며, 그저 민간에 전해지는 말을 들은 것이라고.
영남은 초나라땅에 인접해 있고, 초나라사람들은 나라를 잃은 아픔이 있다. 이런 류의 항간의 이야기는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다. <회남자>는 <사기>보다 훨씬 일찍 만들어졌다. 그리고 사마천이 <사서>를 쓸 때는 <회남자>의 진나라가 영남을 정복한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이를 보면 사마천은 이 이야기를 황당무계한 것으로 보고 사실로 보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고대에 용병에서 병사(兵士)와 부역(夫役)을 구분하지 않았다. 한무제때 당몽(唐蒙)을 야랑(夜郞, 지금의 귀주)에 파견할 때 “장천인(將千人), 식중만여인(食重萬餘人)”을 딸려보낸다. 즉, 군대내에 단지 10분의 1이 전투하는 병사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물자수송을 담당하는 민부이다.
이 비율로 보자면, 남하한 진군이 명목상 오십만이라 하더라도, 기실 단지 5만의 병사가 있을 뿐이다. 군대와 기타 수비병사들의 양식공급, 기계제조, 다리가설, 도로건설등을 위해 군대의 배후에는 반드시 대량의 요역형식으로 징발된 각종 인원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도수와 감록은 <사기>에 열전도 없다. 사적도 <사기> <한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한서.고금인표>에도 이 두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무명지배가 영남의 ‘대군’을 통솔하였고, 30만대군을 통솔하여 흉노를 막은 명장 몽염과 나란히 거론된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두 사람은 확실히 존재했다. 당시의 정치환경에서 그다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런 인물이 대군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아마도 이런 인물이 지휘한 전투라면 규모가 커봐야 어느 정도 되겠는가.
이렇게 보면, 진군의 남하는 본질적으로 그저 만황지지를 점령하려는 것일 뿐이었다.
진군이 영남에 통치권을 건립한 후, 진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환경에 적응이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진나라사람들은 이곳으로 가는 것을 죽으러 가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군심이 안정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영남당국은 진시황에게 중원의 과부나 미혼여자를 영남으로 보내주어 군인들과 결혼시켜 군심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다.
그 결과 영남당국은 남편없는 여자 3만을 보내달라고 하는데, 진시황은 절반을 깍아서 1만5천을 보내준다. 이는 영남을 지키는 진나라군인의 수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한서.지리지>에 따르면 서한말 원시2년(기원2년)에 남해군의 인구는 94,252명이다. 진나라의 남해, 욱림, 창호, 합포 4군의 합계가 비로소 39만명이다.
2백년간 인구가 늘었지만, 그래도 진나라때의 ‘50만대군’에 미치지 못한다. 더더구나 서한말기 영남지역의 39만명중에는 상당한 수량의 토착민이 포함되어 있고, 순수한 진나라병사들의 후예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진나라말기 대란때, 남해위(南海尉) 임효(任囂)는 죽기 전에 후임자인 용현현령(龍川縣令) 조타(趙佗)에게 영남을 막으라고 한 원인이 아주 명확하다. 영남의 진군은 병력이 많지 않아 스스로를 지키는 것도 우려되니, 만일 도적(반란군)이 이곳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이 겁난다. 그래서 남령의 여러 통로에 병사를 두어 지키게 하여야 한다.
조타의 사람됨을 보면 그는 일대효웅이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조타는 계림군, 상군을 합쳐 스스로 남월무왕이 된다. 나중에 그는 “나와 황제(한무제)중 누가 더 현명한가” “나는 중국에 미안하지 않다. 그래서 여기에서 왕이 된 것이다. 나를 중국에 있게 하지 왜 한나라보다 못한 곳으로 보냈단 말인가.” 이런 대역무도한 말도 서슴없이 내뱉은 조타이므로, 만일 진한교체기에 그의 휘하에 정말 50만이 있었더라면, 아마 일찌감치 북상하여 중원을 차지하려 했을 것이다. 그저 영남에 남아서 ‘만이의 대장로’로 자처하지 않고.
그러므로, 반란군이 함양의 진나라조정을 공격할 때, 진나라조정은 여산의 죄수, 노예, 노예의 자식, 그리고 북방의 흉노를 지키던 대군을 끌어모았지, 시종 영남에 주둔한 군대를 북상시키지 않은 이유도 분명해진다. 이곳의 병력은 원래 별 볼일이 없었다. 소위 영남을 지키는 50만대군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승오광의 난때 진나라의 정예부대는 왜 출동하지 않았을까? (5) | 2024.02.29 |
---|---|
진(秦)나라의 조상은 동이족(東夷族)인가? (0) | 2023.05.25 |
"초수삼호(楚雖三戶), 망진필초(亡秦必楚)"의 뜻은? (1) | 2019.01.13 |
장평지전(長平之戰)때 백기(白起)는 40만 조군(趙軍)을 갱살(坑殺)했는가? (0) | 2019.01.07 |
진나라굴기의 배후에 있는 "소금전쟁" (0) | 2018.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