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역사유희유비(歷史有喜有悲)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하여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제국을 창건했고, 중국의 역사발전에 중대하고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진나라의 유명한 4대군단은 제국의 역사상 무시할 수 없는 작용을 발휘했다. 그러나, 진승오광의 난때, 백만의 진나라 정예병사들은 왜 출동하지 않았던 것일까?
최정예부대는 국외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기원전209년 가을, 대택향(大澤鄕)에서 진승, 오광이 이끄는 진나라말기 농민의 난이 발발한다.
그러나, 대진제국의 수도방어전에서 반란군에 저항한 부대는 죄수와 소수의 수도어림군으로 구성된 잡패군(襍牌軍)인 여산군단(驪山軍團)이었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킬 때의 백만정예병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원래, 육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는 것 이외에 진시황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더 있었다: 북으로는 흉노(匈奴)를 물리치는 것이고, 남으로는 백월(百越)을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흉노의 기병은 용맹하여 오랫동안 변방의 우환이었으며, 백월은 오랑캐들이 섞여 있어서 털을 기르고 피를 마신다. 만대를 이어가는 기업을 건립하려면 이 두 곳도 그냥 놔둘 수 없었다. 남정북토는 이미 시급한 임무가 되었다. 둘을 비교하자면, 당연히 북쪽이 더욱 강하고, 남쪽이 약간 약하다. 그래서 흉노를 북벌하는 임무를 대장 몽염(蒙恬)에게 맡긴다. 몽씨집안은 대대로 장수를 지내고, 충성심이 남달랐다. 몽염과 부소(扶蘇)는 30만대군(長城軍團)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러 나섰다. 장성군단은 대진제국 북쪽변방의 용사들로 구성되어, 진나라말기 장성을 따라서 배치되어 흉노와 대치하고 있었다.
관중군단(關中軍團)외에 장성군단은 대진제국의 최정예부대이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병사들이 많았으며, 군대도 원래의 진나라군대를 기초로 구성되었다. 모두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군인들이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장성군단은 가장 방대했을 때 병력이 30만에 달했다. 진나라말기 혼란시기에는 20만가량이 남았다. 장성군단은 전적이 휘황하다. 30만대군의 북벌로 1년도 되지 않은 기간에 흉노를 700리나 밀어냈고, 흉노로부터 하투지구를 탈취하고, 유림(楡林)에 주둔한다. 이때는 진시황이 사구평대에서 사망(기원전210년) 및 진나라말기의 혼란까지 겨우 5년도 남지 않은 때였다.
진나라말기의 동란이 발생한 후, 장성군단의 두번째 임무는 총사령관 왕리(王離, 즉 王翦의 손자이다)는 명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반란을 평정하는 것이었다. 장성군단은 황하를 건너 안문관(雁門關) 태원(太原)지구로 들어갔고, 나중에 주로 연(燕), 조(趙) 지역에서 작전을 벌였다. 먼저 조나라를 배반한 장수 이량(李良)의 협조를 받아 무신(武臣)의 조나라정권을 멸망시키고, 그후 조나라의 귀족 조헐(趙歇)이 제나라의 지원을 받아 조나라를 재건하자, 장성군단의 상대방으니 제조연합군이 된다. 기원전208년 9월, 장성군단의 일부는 비밀리에 황하를 건너 복양 여산군단과 연합하여 정도(定陶)에서 초군을 격패한다. 그리고 장군 항량(項梁)을 죽인다. 그러나 이는 이미 장성군단의 마지막 전적이다.
다음 해, 장성군단은 제조연합군을 거록(巨鹿)에서 포위공격한다. 거록이 함락되려 할 때, 항우(項羽)가 한걸음 먼저 파부침주로 황하를 건너 장성군단과 여산군단의 연결을 차단한다. 그리고 거록성에서 나이들고 피곤한 장성군단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다. 결국 총사령관 왕리가 포로로 잡히고, 두명의 부사령관중 소각(蘇角)은 전사하고, 섭간(涉間)은 자결한다. 장성군단은 대부분 전멸하고 나머지는 궤멸하여 흩어진다. 장성군단은 왕리가 넘겨받은 후 큰 실망을 주었다. 왕리는 비록 명장의 후손이지만 그의 할아버지 왕전 그리고 전임인 몽염과 비교하면 너무나 평범한 편이었다. 그리고 장성군단과 장한(章邯)의 여산군단이 회합한 후, 양군은 통일적으로 지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각자 따로 사웠다.
잡패군은 진승군대의 주력을 전멸시킨 바 있다.
여산군단은 진나라말기 전란의 와중에 새로 건립된 군단이었고, 수량은 개략 20만가량이다. 총사령관은 장한이다. 여산군단은 기원전208년초에 편성되어, 주력은 관중지역의 농민과 여산의 죄수들이었다. 무기장비는 직접 무기고에서 받았다. 여산군단의 편성은 관중군단이 직접 감독했고, 아마도 일부분은 관중군단의 구성원들이었을 것이다. 비록 <사기>에는 여산군단은 모두 여산의 죄수들로 편성되었다고 하였지만, 진나라의 당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이후의 연구결과를 보면, 모두 여산의 죄수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여산군단은 기원전208년초, 관중군단과 함께 주장(周章)의 군을 격패시키고, 주장을 죽여버린다. 이어서 12월 장초(張楚, 진승오광이 세운 나라)의 수도 진현(陳縣)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진승군의 주력을 소멸시킨다. 진승은 성보(城父)에서 차부(車夫)에게 죽임을 당한다.
진승의 반란군을 진압한 후, 장한은 명성을 크게 떨친다. 1년도 되지 않아 여산군단은 기세를 살려, 옛 위나라지역으로 들어가 위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위나라지역의 반란을 진압한다. 그리고 위나라를 증원온 제초연합군도 격패시키고, 위왕(魏王) 전담(田儋)을 죽인다.
기원전208년 9월, 여산군단은 장성군단과 정도에서 회합하여 초군을 격패시키고, 항량을 죽인다. 이는 반란평정과정에서 최대의 승리였다. 기원전207년초, 여산군단은 황하남안의 모든 반군을 거의 평정한다. 그리고 황하를 건너 구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을 점령하고, 조왕을 거록에서 포위한다.
이 잡패군은 왜 이렇게 휘황한 전적을 얻을 수 있었을까? 주로 네 가지 이유때문이다. 첫째, 장한의 군대는 원래 모두 진시황릉을 만들던 인부들과 죄수들이었다. 전쟁터에 나서서 군공을 세울 기회가 있었다. 공을 세우면 죄를 사함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결사대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 둘째, 당시 비록 진승의 반란군이 함양 부근까지 쳐들어왔지만, 기실 전투력은 강하지 않았다. 도중에 큰 저항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진격할 수 있었을 뿐이다. 셋째, 장한의 군대는 관중군단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고, 전체적인 자질이 반란군보다 훨씬 나았다. 넷째, 장한군의 무기장비가 뛰어났고, 군수조달등도 반란군보다 좋은 편이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거록전투의 가장 관건적인 순간에, 여산군단은 항우군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패퇴했다는 점이다. 이는 직접적으로 장성군단이 앞뒤로 적을 맞이하고, 양식조달이 끊기는 결과를 맞는다. 결국 거록전투의 참패로 끝난다.
그후 장한은 여산군단을 이끌고 안양(安陽)으로 물러나 성을 지키며, 장성군단의 잔여부대를 수습한다. 7월에 이르러, 조고의 박해를 겁내어, 장한은 여산군단의 20만명과 함께 항우에 투항한다. 신안에서 항우는 20만 진군을 갱살시키고, 여산군단은 철저히 소멸한다.
관중군단은 진군의 정예부대이다. 또한 진나라의 마지막 방어군이다. 관중군단의 낭중영군(郎中令軍)은 황지의 친위군이었다. 위위군(衛尉軍)은 황궁보위부대이다. 중위군(中尉軍)은 내사(內史, 경사)지구의 위수부대이다. 인원수는 6만이 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전207년 8월,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관중지구로 들어온다. 진왕 자영(子嬰)은 조고를 죽이고 정부를 장악한다. 중위군을 효산에 파견하여 유방을 막으려 하나 유방에 격패당한다. 결국 자영은 유방에 투항한다. 관중군단은 거의 아무런 전투도 벌이지 않고 무기를 내려놓는다.
50만진군은 왜 북상하여 도와주지 않았을까?
위의 군단외에 당시 남하한 군단이 있었다. 영남군단(嶺南軍團). <사기>에 기록된 영남군단은 약 50만명이다. 직므 역사학계의 대다수는 10만가량일 것으로 믿는다. 군대, 이민, 요역, 운수에 종사하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아마도 50만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 군대의 자질은 4대주력중 가장 뒤떨어졌다. 왜냐하면 주로 재관(材官, 보병)과 누선사(樓船士, 수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고, 기병과 거병(車兵)은 거의 없었다.
기원전214년, 진시황은 임효(林囂)와 조타(趙佗)로 하여금 백월의 각 부족을 공격하게 명한다. 조타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번옹(番禺, 지금의 광주시)로 가서 동월을 평정하고, 남해군을 설치한다. 임효는 남해군위가 되고, 조타는 남해군 용천현령이 된다.
기원전211년, 조타는 번옹에서 군대를 이끌고 서강을 따라 서진한다. 진군의 세력이 하노이(河內)의 남쪽에 이른다. 이렇게 하여 전체 영남지구는 진나라의 판도에 들어온다. 영남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진시황은 영남으로 진군한 장병들을 현지에 남겨서 주둔하게 한다.
그러나, 농민반란이 일어난 후, 실질적으로 영남을 통치하던 임효와 조타에 있어서 그들에게는 3가지 선택이 가능했다:
첫째, 근왕(勤王). 영남은 세외도원이고, 대군 수십만이 근왕하려면 충분한 여건은 되었다. 다만 진나라는 포악무도하여 천하가 고난을 겪을 것이다.
둘째, 거의(擧義). 이 '동남지주'가 만일 북상하여 천하의 주인을 다툰다면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임효에게는 그런 웅심이 없었다.
셋째, 할거(割據). 영남은 방원수천리로 충분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아예 중원과의 관계를 끊고 지낼 수 있었다. 천하가 안정되면 그때 다시 결정하면 된다.
영남군단의 최고장수 임표는 일찌기 사람을 보내어 함양의 상황을 살펴본 바 있다. 함양의 진이세가 혼용하고 조고가 권력을 독단하여 충신과 양신을 마구잡이로 죽여 조정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아여 여러모로 생각해본 후, 임효는 셋째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그는 실력을 보존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군대가 북상하여 전투를 벌이는 것을 엄금한다. 심지어 병력을 보내어 산의 관문통로를 지키게 한다. 기원전208년, 남해군위 임효의 병이 위중했다. 그는 죽기 전에 용천현령 조타를 불러, 그에게 할거하기에 유리하니 국가를 건립하여, 중원의 반란군이 침입하는 것을 막으라고 한다. 그리고 조타를 남해군위의 직무를 대행하도록 명한다.
얼마 후, 임효가 병사하고, 조타는 영남의 각 관문에 엄히 지키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중원의 반란군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에 진왕조에서 남해군에 보낸 관리들을 죽이고, 자신의 심복으로 교체한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기원전203년, 조타는 거병하여 계림군과 상군을 병합한 후, 영남지구에 남월국(南越國)을 건립한다. 그리고 자칭 남월무왕(南越武王)이라 칭하며, 수도는 번옹(지금의 광주시)에 둔다.
이렇게 하여 영남군단은 중원으로 북상하지 않고, 이렇게 증발한 것처럼 자신이 속해 있던 대진제국을 버려버리게 된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가(法家)는 GDP에 관심이 없다 (4) | 2024.11.10 |
---|---|
진(秦)나라의 조상은 동이족(東夷族)인가? (0) | 2023.05.25 |
진나라가 멸망할 때, 남방에 수수방관한 50만대군이 남아있었는가? (0) | 2022.06.06 |
"초수삼호(楚雖三戶), 망진필초(亡秦必楚)"의 뜻은? (1) | 2019.01.13 |
장평지전(長平之戰)때 백기(白起)는 40만 조군(趙軍)을 갱살(坑殺)했는가? (0) | 2019.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