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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진나라굴기의 배후에 있는 "소금전쟁"

by 중은우시 2018. 8. 27.

글: 일조심진기(一條尋秦記)


소금의 사람에 대한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도 소금이 없으면 경쟁력도 잃고 생존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고대에 한 국가가 소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서>에 이런 말이 있다: "오(吳)는 동해의 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든다. 이를 통해 부를 쌓았고, 국가에서 충분히 쓸 수 있었다." 소금은 한 민족과 국가의 군대에 더욱 중요했다. 군대에 소금이 부족하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기원전1세기, 로마제국의 군대는 유라시아대륙을 종횡하는 강력한 부대였고, 파죽지세였다. 단검, 투창과 방패는 로마사병이 세계를 지배하는 표지였다. 다만 당시 그들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가죽으로 된 주머니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로마제국이 모든 병사들에게 배금해준 특수한 군량이 있었다. 비ㅏ로 소금이다. 이 간단해 보이는 소금이 로마제국 병사들의 충분한 체력을 보장해주어서 투창을 던지고, 단검을 휘둘러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있었다. 소금은 군대의 운동량이 큰 사람들의 체력을 회복시켜줄 뿐아니라, 열을 내리고 해독을 하며, 배설을 편하게 해주고 살충소염, 설사를 방지하는 기능까지 있어서 "약품'과 다름없었다. 예를 들어, 피를 많이 흘린 사람에게는 소금물을 빨리 마시게 해야 했다. 그리고 예를 들어 독이든 음식을 잘못 먹었을 경우 소금물을 마시면 해독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소금은 살균작용, 방부작용을 한다. 그래서 양군이 대치할 때, 어느 한 쪽에 소금이 충분하면,  사병들은 체력을 빨리 회복하게 된다. 만일 위,장의 질병이 걸리거나, 여름에 더위를 먹거나, 식중독이 걸렸거나, 피를 많이 흘렸거나, 상처에 염증을 가라앉혀야할 경우에,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커지게 된다. 그리하여 군대의 인원손실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사병들은 식염처리된 방부식품을 먹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육류가 그것이다. 반대로 소금공급이 부족한 군대는 전투상황이 형편없게 될 것이다.


소금의 종류는 아주 많다. 다만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주요 식용소금은 지염(池鹽)과 해염(海鹽)이었다. <사기.화식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산동에서는 해염(海鹽)을 먹는다. 산서에서는 염로(鹽鹵)를 먹는다" 다만 전목의 <중국경제사> 고증에 따르면, 당시 중원인이 주로 먹는 것은 식용 '염로'였다. 즉, 지염(池鹽)이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현대인인 우리가 주로 먹는 것은 정광염(井礦鹽)이 아니면 해염이다. 해염에는 잡물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순도를 높이려면 비용이 많이 들어서 경제적이지 못하다. 하물며 춘추전국시대에 해염을 정제하려면 첫째, 일반적으로 기술이 미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해염은 품질이 좋지 못했다. 둘째, 품질이 좋지 않은 해염도 만드는 원가가 놀랄 정도로 높다. 전목이 <중국경제사>에서 이런 중요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즉 소금은 춘추전국시대에 희귀물품이고, 먹고 싶다고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소금이 나오는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기.화식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산동에서는 해염을 먹고, 산서에서는 염로를 먹으며, 영남(嶺南) 사복고(沙北固)에도 왕왕 소금이 나온다. 대체로 이 정도이다." 이를 보면 중원의 당시 소금생산지역은 주로 산동 제나라, 산서의 삼진(三晋)이고 영남지구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진한이전에 이들 지역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소금산지가 있는 삼진과 제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쪽에 치우쳐 있던 진나라가 육국을 석권하게 된 것일까?


진제국의 굴기는 소금자원의 지탱과 확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앞에서 이미 얘기한 것처럼, 선진시기 주요 소금은 지염이고, 해염이 보조적이었다. 그리고 이 두 소금산지는 모두 중원에 있었다. 그래서 동방6국이 진나라를 상대하려면 상인들에게 진나라에 소금을 팔지 못하게 하면 되었다. 몇년이 지나지 않아 진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다만 우리는 역사상 이런 전략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동방육국은 이 정책의 효과가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관중(關中)이라는 땅은 아주 신기하다. 중원은 모두 지염과 해염을 쓰는데, 진나라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애염(崖鹽)을 먹었다. 애염도 식염의 일종인데, 이시진의 <본초강목. 금석오. 식염>에 이런 기록이 있다: "소금종류는 아주 많다....개주, 성주, 봉주에서 나오는데, 모두 애염이다. 애염은 토애(土崖)의 사이에서 나오는데 모양이 백반과 같다." 송응성의 <천공개물>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릇 섬서성의 개주, 봉주등 주읍에는 해염, 정염은 나지 않는다. 암혈에서 염이 나오는데 색이 붉은 흙과 같고, 사람이 긁어내서 취하면 되고 닳이거나 정제할 필요가 없다." 이 글에서 나오는 '개'는 개주인데 지금의 감숙성 무도이고, '봉'은 봉주인데 지금의 섬서성 봉현이다. 이를 보면 이 두 곳은 모두 진나라 경내이다. 글에서 말하는 것은 비록 개주, 봉주에서 지염도 없고, 정염도 없고 해염도 없지만, 애염은 많아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은 진나라를 편애햔 것같다. 관중의 땅은 지형지세가 좋을 뿐아니라, 토지도 비옥하고, 더더구나 소금까지도 부족하지 않게 해주었다. 소금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은 동방육국을 화나게 만드는 일이다. 왜냐하면 소금을 가지고 경제제재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진나라가 촉(蜀)을 차지한 후, 이빙(李氷)이 촉수(蜀守)로 있으면서, 자세히 수맥을 관찰한 후 광도(지금의 성도시 쌍류)를 파서 염정을 개발한다. 촉의 땅에서도 이렇게 하여 소금이 나오게 된다. 이빙은 우물을 파서 로(鹵)를 길어서 소금을 만드는 법을 개발한다. 이것은 중국역사책에 기록된 최초의 착정자염(鑿井煮鹽)의 기록이다. 이빙의 이런 기술개발로 나중에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는 사천 자공(自貢)의 정염(井鹽)이 나오게 된다.


진나라는 이렇게 하여 자신의 애염과 정염으로 다른 나라의 '소금제제'로 망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국가의 굴기와는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진나라가 굴기하려면 지신에게 애염뿐아니라 더 많은 소금산지가 필요했다. 어쨌든 인구가 날이갈수록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소금에 대한 수요는 갈수록 커져갔다. 그 외에 상대방을 철저히 무너뜨리려면, 생리적으로 심리적으로 타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 적국의 소금생산지역을 빼앗는 것은 군대의 전투능력을 무너뜨리과 국가의 경제명맥을 무너뜨리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그러므로 진나라는 세번의 "소금전쟁"을 통하여 철저히 동방6국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진나라를 대진제국으로 발전시킨다.


지염은 가장 먼저 삼진지구에서 나왔다. 다만 진나라가 한,위,조로 해체된 후, 소금산지는 위(魏)나라 경내에 들어간다. 지염의 생산지역은 주로 해현(解縣)인데,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이다. 당시에는 위나라 하동군(河東郡)에 속했다. 기원전293년, 백기(白起)는 이궐(伊闕)에서 한(韓),위(魏)연합군을 무찌르고, 24만을 참수한다. 이 24만 참수는 장평지전(長平之戰) 이전에 진군이 전쟁에서 살인한 가장 많은 숫자이다. 전쟁의 패배로 한,위 두 나라는 땅을 떼어주고 평화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는 자신의 무수(武遂)를 위나라는 자신의 하동군을 진나라에 할양한다. 기원전286년, 위나라는 구도(舊都) 안읍(安邑)까지도 진나라에 넘겨주어야 한다. 이때부터 지염의 생산지역은 진나라의 주머니에 들어갔고, 중원의 소금생산지는 절반이 날아갔다.


해염생산지는 주로 제(齊)나라이다. 연(燕)나라의 악의(樂毅)가 5국을 이끌고 제나라를 칠 때, 진나라도 진화타겁한다. 이 전투에서 제나라의 본토도 연합군에 유린되고, 비록 나중에 복국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때부터 강한 제나라시대는 끝이 난다. 제나라가 이번 전쟁을 겪으면서 해염생산능력에도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 해염은 원래 생산기술의 요건이 까다롭다. 생산량도 많지 않다. 제나라는 전쟁의 참화를 겪은 후에, 해염의 생산량이 대외수출할 정도에 이르지 못한다. 설사 대외수출을 하더라도 제나라는 자신을 쳤던 적국들에게 팔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염의 생산량이 적었다는 것은 전목의 고증에도 있지만, <사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소금업으로 돈을 번 거부들은 해염으로 장사한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대염상(大鹽商) 의돈(猗頓)은 지염 장사를 했다. <사기.식화열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의돈은 고염(盬鹽)으로 돈을 벌었다." 여기서 고염은 바로 지염을 말한다. 그래서 오국벌제이후, 중원의 해염생산지역도 기본적으로 대외수출능력을 잃게 된다.


중원에는 또 하나의 마지막 천염(泉鹽) 생산지역이 있다. 사마천이 <사기.화식열전>에 쓰지는 않았지만, 그곳은 확실히 존재했다. 그리고 생산량도 아주 많았다. 그것은 바로 초(楚)나라의 검중군(黔中郡)과 무군(巫郡)이다. 무군은 현재의 중경 무계현(巫溪縣)이다. 선진시기에 이곳에는 국가가 있었다. 바로 무함국(巫咸國). 이 국가는 <산해경.대황서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국가는 천염이 많이 나와서 아주 부유했다. 단지 나중에 파국(巴國)에 병합되어 버린다. 당시에 무함국에서 소금이 나는 외에 파국 자체에서도 소금이 생산되었다. 우리는 소금에 이런 속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염파(鹽巴)". '염파'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파인(巴人)들이 소금장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실히 그들은 소금을 판매할 뿐아니라 소금을 생산했다. 파국에는 3개의 천염생산지역이 있다. 첫번째 천염생산지는 청강(淸江)유역이다; 두번째 천염생산지는 복우산(伏牛山) 염천(鹽泉)이다. 현재의 중경 부릉구(涪陵區)와 검강지구이다. 세번째 천염생산지는 원래의 무함국 소재지인 중경 무계 무산봉절지구이다. 그런데 이 세 곳은 모두 초(楚)국에 하나하나 빼앗기게 된다. 초나라는 두번째 생산지역에 검중군을 설치하고, 세번째 생산지역에 무군을 설치한다. 즉, 진나라가 파국을 멸망시키기 전에 벌써 파국의 소금생산지역은 모조리 초나라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진나라가 파국을 멸망시킨 후에도 천염생산지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강산은 수시로 주인이 바뀐다. 전신 백기가 진나라를 위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준다. 초나라의 경제명맥을 끊어버린 것이다. 기원전280년 진나라는 백기를 기용하여 두번째 초나라정벌에 나선다. 백기는 진군을 이끌고 진초 변경지역을 넘어가서 후방지원을 막고 3로로 나누어 신속히 초나라경내로 들어가서 초나라의 도성 영도(郢都)를 포위한다. 초나라는 이번 전쟁에서 전력을 다 했다. 왜냐하면 수도의 방어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기의 전략은 신출귀몰했고, 다음 해(기원전279년)에 진군이 돌연 초군의 배후를 기습하여 초군이 혼란에 빠지고 초군은 대패한다. 초나라의 수도인 영도는 진나라가 점령한다. 이와 동시에, 백기는 다시 초나라의 소금생산지를 점령한다. 즉, 무군과 검중군이다. 진나라는 무군과 검중군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고 새로운 검중군을 설립한다.


이때부터 중원지구는 더 이상 동방육국의 왕호장상의 소금수요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소금생산지역을 갖지 못하게 된다. 겨우 남은 제나라의 해염기지로 겨우겨우 버텼다. 진나라는 소금경제명맥의 고지를 장악하고서 동방육국을 내려다 보게 된다. 그러면서 동방육국의 경제가 어떻게 무너지는 지를 살펴보았고, 그 군대의 전투능력이 어떻게 약화되는지를 내려다 보았다. 초나라가 중원의 최후 소금생산기지를 잃은 후 17년만에 마침내 장평지전이 벌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