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취후의생(大嘴猴醫生)
진나라의 명장 백기는 후인들이 전신(戰神)이라 떠받든다. 왜냐하면 그는 일생동안 70여번의 전투에서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장평지전이다.
백기는 진나라병사를 이끌고 조괄(趙括)이 지휘하는 조군을 격패시킨다. 그리고 조군 40여만명을 갱살한다. 그리하여 백기는 살신(殺神)이라고도 불린다.
<사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기는 조병 사십만을 갱살했다. 그러나, 현재 많은 사람들은 백기가 40만 조군을 갱살했다는 것의 진실성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40만의 사병을 갱살하려면, 얼마나 큰 웅덩이를 파야 한단 말인가? 설마 조나라 병사는 모두 종이로 만들어서 마음대로 죽이도록 가만히 있었단 말인가?
1995년이후 이 논쟁은 마침내 진상을 드러낸다.
1995년 산서성 고평시의 한 농민부자가 집안의 밭을 일구다가, 많은 청동화살촉과 사람의 두개골을 발견한다.
아래로 팔수록 두개골은 더욱 많이 나왔다. 부자 두 사람은 놀라서 호미조차 버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관계기관에 보고한다.
얼마 후 문화재전문가가 현장으로 와서 현장조사를 벌인다. 현장에서는 모두 130구의 해골을 발굴한다.
이들 해골의 몸에는 청동화살촉 혹은 칼이나 검에 찔리고 베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60구는 두개골 혹은 몸체가 없었다. 그리고 14구는 둔기 혹은 석기에 맞아 죽었다.
여러 번의 감정을 거친 후, 전문가들은 이들 해골은 장평지전때 백기에게 갱살당한 조군이라고 인정한다.
고고학자들이 기이하게 생각한 점은 130구의 유골중 단지 1구만이 산채로 묻혔다는 것이다.
그외에 전문가들에 따르면 장평지전후 2천여년이 흘렀는데, 유골을 매장한 진흙층의 두께는 겨우 1척여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얇은 토층으로는 사람을 산채로 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에 와서야 우리는 발견했다. 40만조군은 백기가 산채로 매장한 것이 아니다.
왜 전문가들은 이런 말을 했을까?
원래 과거에는 사학자들이 '갱살'을 '생매장'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춘추전국시대에 교전쌍방은 불문의 관습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퇴경관(堆京觀)이다.
경관(京觀)은 '경총(京塚)'이라고도 부른다. 바로 방대한 시체무더기(屍體堆)이다.
전승한 측은 전패한 측의 죽은 사병시신을 도로 양측에 쌓아두고, 흙을 덮는다. 이렇게 거대한 피라미드형의 흙언덕이 형선된다. 이것을 경관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전공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적을 겁주기 위한 방식이다. 나중에는 이것을 갱살(阬殺)이라고 부른다.
갱살(坑殺)은 적을 생매장하는 것이다. 갱살(阬殺)은 죽은 적을 다시 묻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서로 다른 개념이다.
나중에 전쟁유적지에서 발굴된 상황을 보면, 백기가 40만조군을 생매장했다는 것은 후세인들의 오해이다. 백기는 기실 갱살(阬殺)의 방식을 쓴 것일 뿐이다.
46일이나 굶은 조군은 진군의 맹렬한 도살 앞에 반항할 힘이 전혀 없었다.
비록 후세의 사람들이 백기가 갱살(坑殺)방식으로 죽였다고 오해하기는 했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백기가 이끈 진군이 확실히 40만조군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당시의 장면은 이미 혈류성하(血流成河)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 장면은 공포스러운 것이다.
나중에 고고학자들은 장평지전 유적지에 대하여 더 이상 발굴연구를 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이천여년전의 40만 조군이 영면에 들게 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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