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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죽서기년(竹書紀年)> vs <사기(史記)> : 어느 기록이 더 믿을만할까?

by 중은우시 2022. 5. 1.

글: 독서문사(讀書文史)

 

중국역사상 이런 기서(奇書)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버렸고, 그리하여 봉건정통완조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

 

그것은 도대체 어떤 책인가? 이 책을 얘기하자면, 먼저 전설적인 사건부터 시작해야 한다.

 

1. <죽서기년>의 출토: 도굴꾼과 관련이 있다.

 

태강2년(281년) 하내군(河內郡) 급현(汲縣, 지금의 하남성 위휘시)에서 중국역사상 중요한 영향이 있는 사건이 발생한다. 부준(不準)이라는 도굴꾼이 교외지역의 한 고묘를 도굴했다.

 

아마도 그는 묘를 파헤친 후 새카만 묘실에서 가지고 온 횃불이 금방 다 타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묘실에는 대량의 죽간(竹簡)이 쌓여 있었고, 그는 아무렇게나 집어서 불을 붙여서 횃불을 대신했다. 어쨌든 이런 금은보화가 아닌 물건은 도굴꾼의 눈에는 귀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도굴꾼은 원하는대로 묘실에서 금은보화를 챙겨서 도망쳤다.

 

이 이야기의 출처인 역사자료에는 이렇게 기재되어 있다:

 

태강2년 <진서(晋書).속석전(束晳傳)>: "태강이년(太康二年), 급군인도발위양왕묘(汲郡人盜魏襄王墓), 혹언안리왕총(或言安嫠王塚), 득죽서수십거(得竹書數十車)"

구도(苟島) <목천자전서(穆天子傳序)> : "태강이년(太康二年), 급현민부준도발고총(汲縣民不準盜發古塚)"

 

며칠이 지난 후 사람들은 분묘가 도굴된 것을 발견하고, 이 일을 현지 관청에 알렸다.

현지의 촌민들은 관청에 보고하기 전에 몰래 들어가서 가져갈만한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유감스럽게도, 묘실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그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죽간들 뿐이었다. 나머지 돈이 될만한 금은보화는 모조리 가지고 가버린 상태였다.

 

관청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현장을 조사한다. 묘지내에는 대량의 죽간이 존재했다. 묘장의 규모를 보면, 이는 보통의 묘지가 아니라고 여겨서 관청은 상부에 보고하게 된다.

 

그후, 이 일은 진무제(晋武帝) 사마염(司馬炎)에게까지 보고된다. 당시 사마염은 이미 진나라를 건립한지 15년이 지났다. 그리고 막 동오(東吳)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다. 고묘에서 대량의 죽간이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자, 이 묘실의 가치는 절대로 보통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급히 조정관리를 파견하여 정리, 해독하게 했다.

 

결국 정리해낸 죽간은 수레 10개분량에 이르렀고, 모조리 수레에 실어 낙양으로 운반한다. 죽간은 낙양으로 운반된 후, 사관학자들에 의해 정리팀이 만들어지고, 상응한 정리, 해독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학자들의 눈앞에 놓인 첫번째 관문은 죽간의 문자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였다. 왜냐하면 죽간에 쓰인 글자는 모조리 과두문(蝌蚪文)이었기 때문이다.

 

진나라이전에 각국의 문자는 서로 달랐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 비로소 문자가 통일된 것이다.

 

특히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한 후, 당시 육국을 대표하는 분열세력에 대하여 <분서령>을 내린다. 사관은 반드시 <진기(秦記)>이외의 사서를 모조리 없애도록 한다. 그리고 박사관이 소장한 것외에 천하의 모든 <시경> <서경>등 제자백가의 서적도 불태워버리게 한다.

 

그래서, 전국시대에 진나라이외의 거의 모든 나라의 사기는 불태워진다. 죽간상의 문자내용을 해독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게 된 것이다.

 

결국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결국 근 십여년의 시간을 들여서 해독작업을 완성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얻어낸 결과는 당시의 사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원래 이들 죽간은 전국시대 위나라에서 나온 것이고, 고묘의 주인은 신분이 남달랐다. 그는 위나라의 네번째 국군인 위양왕이었다.

 

학자들은 하나하나 확인을 거쳐, 번역한 후 거기에서 75편의 고문헌을 정리해낸다. 합계 10만자가 넘는다.

 

이 죽간은 원래 제목이 없었다. 후세인들은 그것을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것을 보고 <기년(紀年)>이라고 이름붙인다. 그리고 원서가 죽간이었으므로 <죽서(竹書)>라고도 불렀다.

 

나중에 이 책은 <고문기년(古文紀年)> 혹은 <급총기년(汲塚紀年)>등으로 불린다. 고본은 13편이고, 금본은 2권이다. <죽서이동(竹書異同)> 1편이 있다.

 

<죽서기년>은 중국고대에 유일하게 남은 편년통사이다. 이 책의 제1권에는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제요(帝堯), 제순(帝舜) 삼황오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기년은 없었다. 기재시간은 상당히 길다. 상고시대의 황제때부터 기록하기 시작하여, 하, 상, 서주와 춘추, 전국의 역사를 기록했고, 연도별로, 상하로 모두 89명의 제왕을 기록했고, 1,847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역대의 유가학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취급받고, 여러번 봉금(封禁)당하고, 몇번이나 흩어져 일실된다.

 

2. <사기>에 관하여

 

여러분들은 <사기>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앞의 글에서 필자도 비교적 상세하게 이 책에 대한 역사지식을 논의한 바 있다.

 

<사기>는 서한의 사학자 사마천이 쓴 기년체 사서이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기년체통사이다.

 

<사기>는 "24사"의 으뜸으로 칭해진다. <한서> <후한서> <삼국지>와 합쳐서 "전사사(前四史)"라고도 불린다. 이 책은 중국사학계에서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차지한다. 역사적 문학적 의미와 가치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노신은 이에 대하여 "사가지절창(史家之絶唱), 무운지이소(無韻之離騷)"라고 찬양한 바 있다.

 

<사기>는 전문 525,500여자로 모두 130편이며, 원래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 <태사공기(太史公記)>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강조할 점은 "태사공"도 역사서를 쓰는 사람이다. 즉 사마천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외에 여기서 특별히 강조해야할 점은 사마천이 역사를 쓸 때 그리고 그 <자치통감>을 쓴 작자 사마광이 역사를 쓸 때는 성격이 구분된다는 점이다. 전자는 개인적으로 역사를 쓴 것이고, 후자는 관방의 지지를 받아, 관방이 인정해준 상태에서 역사를 쓴 것이라는 것이다.

 

<사기>는 원래 고대사서의 통칭이다. 삼국시기부터, 점차 사마천의 <태사공서>에 대한 전용칭호가 되어버린다.

 

3. <죽서기년>과 <사기>는 어느 것이 신뢰도가 높을까?

 

사서를 읽을 때, 머리 속에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정통적인, 중국의 봉건전통, 유가사상, 명군이 기대하는 것같이 국가의 정통사상에 봉사하는 저작일 것이다.

 

그러나 <죽서기년>이라는 책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를 완전히 뒤집는다. 그리하여 역사상, 이 책은 여러번 봉금당했다.

 

여기까지 얘기했으니 두 가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첫째, 죽서기년에 쓰인 것은 사실이 아니다. 원인은 아주 명확하다. 그것은 다른 사서에 기록된 역사와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둘째, 죽서기년에 쓰인 것은 사실이다. 신뢰도가 비교적 높다. 왜냐하면 현실의 가능성을 보면 그것은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아마도 그것이 기록한 역사가 너무나 진실하고 분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정통사상과 통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어서 탄압당하고 배척되고 봉금되었었다.

 

그렇다면 진상은 둘 중 어느 것일까? 죽서기년과 사기는 어느 것이 신뢰도가 높을까?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하여는 먼저 두 책에 기록된 내용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차이나는 내용

 

유가는 후고박금(厚古薄今)했다. 간단히 말해서, 고대를 아주 숭상했다는 것이다. 매번 성황지치(聖皇之治)를 얘기할 때마다 반드시 삼황오제, 요순우탕에 대한 칭송부터 시작한다. 오제의 강권교체에서 오는 충돌은 현능선양화하고, 이를 통해 황제정통, 가천하의 가치를 확립하여 사회를 안정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서기년>의 이 방면에서의 기록은 완전히 유가들이 숭상하는 사상을 뒤집어 버린다.

 

예를 들어 <죽서기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에 요의 덕이 쇠하자, 순에 의해 갇히게 된다. 순은 요를 평양(平陽)에 가두었고, 제위를 차지한다. 순은 요를 평양에 유배보냈다. 순은 요를 가두고 다시 단주를 막아서 부친(요)와 만날 수 없게 했다."

 

즉 요는 스스로 제위를 순에게 선양한 것이 아니라, 순이 요의 제위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요를 유배보내 연금했다. 이는 하극상이다. 이 과정을 상상해보면 분명히 피비린내나는 과정이고, 우리가 전통사서에서 보는 것처럼 평화롭게 선양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왕조의 중요한 보신 이윤(伊尹)에 대하여도 <죽서기년>과 <사서>의 기록은 전혀 다르다.

 

<사기.은본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태갑(帝太甲)이 즉위한지 3년, 밝지 못하고 포악했으며, 탕(湯)의 법을 준수하지 않아서 덕이 어지러워졌다. 그리하여 이윤(伊尹)은 그를 동궁(桐宮)에 연금시킨다. 3년, 이윤은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제후들을 복속시킨다. 제태갑은 동궁에 3년간 있으면서 스스로의 잘못을 회개하고 반성했다. 그리하여 이윤은 다시 제태갑을 모셔와서 권력을 돌려준다. 제태갑은 덕으로 다스렸고, 제후들이 모두 은(殷)에 귀속하여 백성들이 평안해진다."

 

대체적인 의미는 태갑이 왕위를 계승한 후, 이윤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태갑을 교육하고 지도하여 명군이 되도록 하려 했다. 처음에 태갑은 잘 따랐으나 시간이 흐르자 그는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마음대로 하기 시작한다. 그는 제도와 규칙을 무시했고, 덕을 따지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결국 이윤은 국가이익을 중시하여 태갑을 동궁에 보내어 거주하도록 하고, 그가 반성하게 한다. 그리고 이윤은 직접 국정을 처리한다. 태갑이 반성하고난 후에 이윤은 다시 그를 도성으로 데려와서 태갑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크게 칭찬한다. 여기에서 궁중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은 이윤이 대공무사의 성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죽서기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윤은 태갑을 동(桐)에 유배보내고, 이윤이 스스로 왕이 된다. 태갑7년에 태갑이 몰래 동에서 나와 이윤을 죽이고 그의 아들 이척(伊陟), 이분(伊奮)을 세우고, 부친의 전답과 주택을 나누어 갖도록 명했다."

 

이 내용의 뜻은 명확하다. 즉 이윤은 태갑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태갑은 동궁에서 이년여동안 갇혀 있다가 나중에 기회를 틈타 동궁을 빠져나와 도성으로 온다. 그리고 이윤을 죽이고 왕위를 되찾는다. 그리고 아주 도량이 크게 이윤의 두 아들을 대한다. 그들에게 집과 전답을 준다.

 

한마디로 말해서 <죽서기년>은 다른 정통사서의 기록과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다시 두 사서의 저자를 살펴보자.

 

저자의 문제

 

죽서기년

 

저자의 문제를 보면 학자들의 고증에 따를 때, <죽서기년>의 저자는 위나라의 사관일 것이다. 사관이 역사를 기록할 때는 모두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역사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를 마음대로 고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예를 반드시 얘기해야할 것같다:

 

진(晋)나라의 대신 조순(趙盾)이 도원(桃園)에서 진령공(晋靈公)에게 간언할 때, 진령공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조순을 오히려 죽이려 한다. 그래서 조순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후 그의 동생 조천(趙穿)이 진령공을 죽인다. 그리고 조순을 다시 모셔와서 대국을 주재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사관들은 사서를 기록할 때, 기재한 것은 "조순시군(趙盾弑君)"이었다. 조순은 그것을 알고 화를 벌컥 내면서 황급히 변명한다: "사람을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 내 동생이 죽인 것인데 왜 내가 시군했다고 하느냐?" 그러자, 사관이 말했다. "당신은 진나라의 대신으로 국군이 피살되었다. 그런데 당신은 막지도 않았고, 흉수를 체포하지도 않았다. 당신은 기실 공모한 것이다. 당신이 시군했다고 하더라도 전혀 잘못이 없다" 조순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이 사건을 그렇게 사서에 기록되도록 놔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말해서, 사관이 사서를 쓴 것은 신뢰도가 비교적 높다. <죽서기년>은 그래서 신뢰도가 높은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사마천이 보지못한 원시자료일 것이다.

 

사기

 

모두 아는 것처럼,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은 개인적으로 역사를 썼다. 그가 쓴 사서는 분명 개인적인 주관이 많이 포함되었다.

 

이전에 "자치통감과 사기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비교적 상세히 다룬 바 있지만, 사마천이 <사기>를 쓴 것은 기실 몇 가지 원인과 관련이 있다. 그중 최대의 원인중 하나는 그가 강권을 비판하고, 약자를 동정한다는 정의감으로 역사를 썼다는 것이다.

 

이 점을 보면, 대체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마천이 창작한 <사기>는 개인창작의 자유도가 비교적 크다. 그래서 그가 쓴 역사는 객관적인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보면, <죽서기년>의 신뢰도가 더욱 높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죽서기년>같은 책의 저자는 아마도 학자가 개인적으로 편찬한 편년통사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중에 누군가에 의해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죽서기년>의 완성시간은 대체로 전국시대이고, 발견된 것은 서진시대라는 것을. 그 중간에 이미 수백년이 흘렀다. 그동안 여러번에 걸쳐서 고본들이 수정되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고본들의 신뢰도에는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말해서

 

역사의 진상을 탐색하는 것은 단순히 한두권의 사서로 끝낼 일이 아니다. 진실을 보려면, 그것은 마땅히 대량의 문물출토로 검증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역사를 볼 수 있다. 도대체 어느 것이 신뢰도가 높은지도 알 수가 있다.

 

참고자료

1 구시염양(舊時艶陽) 저: 나득기방불하적양진사상서진(拿得起放不下的兩晋史上西晋), 2020

2. 왕위민(王煒民) 저: 역사여문명(歷史與文明), 2018

3. 왕열(王悅) 저: 죽서기년여유가적대당(竹書紀年與儒家的對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