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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기록

중국 고대의 "은자(銀子)"는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by 중은우시 2021. 3. 24.

글: 장금(張嶔)

 

많은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고전명저'의 매매장면에는 '쇄은자(碎銀子)'를 사용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예를 들어, <삼언이박(三言二拍)>에서 주인공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돈은 왕왕 "몇 량(兩)의 산쇄은자(散碎銀子)이다. 나중에 '화괴(花魁)를 독점하는 매유랑(賣油郞)은 처음에 1년간 고생하며 청루(靑樓)의 '입문비(入門費)로 16량의 산쇄은자를 모았다. <유림외사(儒林外史)>의 왕의안(王義安)은 두 명의 수재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다가, '세냥칠전의 쇄은자를 주고' 비로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보면, 이 '쇄은자'는 일상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서유기(西遊記)>에서 불경을 가지러 가는 당승 사도도 '쇄은자를 사용하는데' 있어서는 속됨을 면하지 못했다. 3명의 사제중 그래도 마음씀씀이가 가장 세심한 저팔계(猪八戒)는 가는 길에 온갖 머리를 짜내서 고로장(高老莊)에서 사타령(獅駝嶺)까지 가면서 모두 '사전육푼'의 쇄은자를 모아 왼쪽 귀에 숨겨두었다. 결국 손오공(孫悟空)의 몇마디 말에 순순히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불쌍한 저팔계이다. 이를 보면 고대인들의 눈에 '불도선마세계(佛道仙魔世界)'에서도 '쇄은자'는 아주 쓸모가 있었던 것같다.

 

왜 '쇄은자'를 썼을까? 주로 거래의 편의때문이다. 중국고대의 각종 화폐중에서, 백은(白銀)은 비교적 '젊은' 편이다. 명나라이전에 중국에 백은은 아주 희소했다. 송나라때 매년 백은수입은 가장 많을 때도 80만냥이다. 유통이 어려운 수준이다.

 

그래서 당송원때의 백은은 기본적으로 화폐로 쓰이지 않았다. 송나라에서 '요나라' '하나라' '금나라'에 보내는 '세폐(歲幣)'로 쓰였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때는 사람들에게 '은을 주었는데' 주는 것은 보통 '은기(銀器)'였다. 예를 들어, 송고종의 모친 위태후가 죽은 후, 송고종은 위태후의 뜻에 따라, 금나라에 있는 위태후의 '친척'에게 한꺼번에 '은기 2만냥'을 보낸다. 남송의 '백은수입'을 고려하면, 이것이 얼마나 나라를 망치는 행위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명나라 중기부터, 대외무역이 발달하면서, 많은 백은이 해상비단길을 통해 중국으로 흘러들어온다. 중국경내의 '백은유통'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명나라의 마지막 백년동안 일본에서만 7,500톤의 백은이 중국으로 유입되었다. 같은 시기에 미주(美洲)의 은광산에서 채굴한 백은중 최소 절반은 중국으로 흘러들어왔다. 명나라 중엽부터 청나라 강희옹정연간까지, 중국의 동남연해를 방문하는 외국선박은 거의 모두 백은을 가득 싣고 왔으며, 상륙하면 미친 듯이 물건을 사모았다. 백은이 충분해지자, 명나라 융경(隆慶)연간에 관방에서 '은전겸사(銀錢兼使)'의 방식을 규정한다. 이렇게 백은은 '법정화폐'로까지 지위가 올라간 것이다.

 

다만, 백은이 합법적인 법정화폐가 되었지만, 사용하는 것은 아주 골치아팠다. 중국고대의 관방 백은화폐는 왕왕 모두 "은정(銀錠)"이었다. 민간에서 보통 말하는 "은원보(銀元寶)"이다. 모양은 왕왕 "십량" "이십량" "오십량"의 몇 가지이다. 놓고 보기에는 좋지만, "쓰기에는" 불편했다. 그래서 은정을 잘라서 '쇄은자'로 만드는 것이다. 명청연간에, 사람들은 집을 나설 때면 은자를 가지고 갔다. 가위와 저울도 가지고 다녔다. 가위는 은자를 자르는데 쓰고, 저울은 무게를 재는데 썼다. 일상거래때는 '쇄은자' 여러 조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당시에 '쇄은자'는 거래에만 쓰인 것이 아니라, 급여를 지급하는데도 쓰였다. 특히 명청의 '자본주의 맹아'가 발전하면서, 도시의 노동자가 증가했다. 예를 들어, "자기도시'인 경덕진(景德鎭)에는 명나라때 자기를 만드는 노동자만 만명이 넘었다. 청나라 건륭연간에는 더욱 늘어서 수만명이 된다. 그들은 모두 "안일이은(按日以銀, 하루씩 은으로 계산하여)" 급여를 받았다. 절강 가흥의 유방(油坊) 노동자의 경우 1일의 급여가 이푼(二分) 은자였다. 기본적으로 '쇄은자'로 지급했다. 

 

세금납부단계에서는 '쇄은자'가 더더욱 생동적인 증인이 된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의 일조편법(一條鞭法) 개혁부터 중국의 백성들은 일상적으로 세금을 납부할 때 기본적으로 모두 은을 사용한다. 이렇게 하얀 은자의 배후에는 새로운 착취가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명나라 만력연간의 산동지구에서 농민이 세금을 납부할 때 현지의 양식가격이 폭락한다. 보리는 1석에 0.37냥의 '쇄은자'까지 폭락한다. 세금납부가 끝나고 나면, 보리는 다시 0.52냥의 '쇄은자'로 가격이 회복된다. 이렇게 폭락 폭등하면서 여러 농민들은 손해를 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는 태평하던 '만력중흥'시기의 이야기이다.

 

명나라말기의 섬서성은 현지의 상품경제가 발달하지 않아서, 농민들이 세금을 백은으로 계산하여 납부할 때, 또 다시 새로운 착취를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전보다 부담이 배가 늘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중에 숭정제로 하여금 목을 매게 만든 농민반란은 섬서에서 폭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와 비교하면 역사가 깊은 또 다른 착취수단은 그 피해가 더욱 컸다. 화모(火耗). 고대에 관청에서 세금을 거둘 때 왕왕 쇄은을 받지 않고, 쇄은을 녹여서 은정으로 만든다. 그런데, 쇄은을 녹일 때의 손실을 '화모'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그 손실은 백성들이 부담했다. 여기에서 많은 관리들은 이익을 얻을 기회를 잡는다. 각급 지방관리들은 층층이 뜯어먹으며 '화모'를 추가징수한다. 청나라 강희연간에는 이렇게까지 발전한다. 관청에서 1냥의 세금을 거두는데, '화모'는 10냥이 된다. 많은 농민들이 그렇게 무거운 세금부담을 견디지 못해 파산했다. 조정은 세금을 제대로 거두지 못해 국고가 텅비게 된다. 오직 '화모를 거둬 가지는' '관리'들만이 주머니가 두둑했다.

 

이런 괴이한 현상은 옹정제로 하여금 결심을 내리게 만든다. '화모귀공(火耗歸公)'의 개혁이다. 십여년간의 잔혹한 정리정돈을 통해 청왕조의 백성들은 부담이 훨씬 줄어들게 되고, 국고수입은 늘어났다. 온갖 고생을 거쳐 이를 이루어낸 옹정제는 풍성한 국고를 아들 건륭제에게 남겨줄 수 있었다. 그 스스로는 역사의 악명을 받았지만. 이것도 결국은 '쇄은자'때문에 생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화모귀공'의 개혁이 비록 완성되었지만, 아직도 헛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명청시기의 은본위화페제도는 기실 내용이 아주 엉성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옹정제이후, 청나라의 관리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다. '늑절(勒折)' 이것은 동전과 백은의 교환비율로 장난치는 것이다. 받을 때는 왕왕 많이 받고, 줄 때는 관방교환비율로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차액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청나라중엽부터 또 하나의 엄청난 사회문제가 발생한다: "은황(銀荒)" (백은부족). 백은이 법정화폐로 될 수 있었던 것은 해외무역에서의 거대한 수익덕분이었다. 청나라 건륭연간부터 중국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고, 아편의 범람ㅁ은 더더욱 대량의 백은이 해외로 유출되게 만든다. 백은과 동전의 교환비율이 점점 커져갔다. 당시 중국의 '창구'이던 광동은 1837년에만 백은 3천만냥이 유출된다. 대량의 부가 해외로 흘러나간 것이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원래 일상거래에 쓰이던 '쇄은'의 가치도 급등하게 된다. 건륭연간에 1량의 '쇄은자'는 개략 동전 1000문과 교환되었다. 아편전쟁전의 1840년에는 1량의 백은으로 1,600문의 동전을 교환할 수 있었다. 어떤 성에서는 심지어 3천문까지 올라간다. 이는 '관청의 공식교환비율'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의 토지가격은 계속 하락한다. 이런 광경만으로도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관리들이 아래 위에서 착취하고, 농민들은 파산했는지. 결국 나라는 낙후하고 외국에 두들겨맞는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쇄은자의 배후에는 이런 그다지 멀지 않은 교훈이 담겨 있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