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뇌저(雷姐)
인류사회에 전쟁이 나타나면서, 잔혹한 전쟁터에서는 대량의 병사와 지휘관이 죽고 부상당했다. 부상당한 병사는 치료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전사하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옛날의 의료조건은 지금처럼 좋지 못했다. 그래서 부상한 병사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여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냉병기 시대에 병사들의 상처를 적시에 치료하지 못하면, 감염되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에 전투가 벌어지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면, 고대군대는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였을까?
황야에 내버려두어, 짐승의 밥이 되게 한다.
고대 전쟁터에서 양군이 교전하면 패배한 측은 전부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거나 도망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승리한 측에서는 전쟁터를 정리한다. 당연히 운이 좋으면, 승리한 측이 상대방의 전사자들을 모아서 묻어준다. 그건 입토위안(入土爲安)한 셈이다. 만일 승리한 측이 비교적 잔혹하고 인간성이 없는 군대라면, 이들 전사한 시신은 그냥 황야에 내버려 두어, 야수들의 밥이 되게 놔둔다. 이들 전사한 병사들은 아무도 거두어 주지 않고, 가족들도 금방 전사소식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전쟁터로 와서 전사한 가족을 찾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고대에 전쟁이 끝나면, 쌍방의 병사들의 시신이 들판에 가득 널려 있게 된다. 중국의 위대한 시인 두보는 <병거행(兵車行)>에서 이렇게 묘사한다:
생녀유득가비린(生女猶得嫁比隣)
생남매몰수백초(生男埋沒隨百草)
군불견(君不見), 청해두(靑海頭)
고래백골무인수(古來白骨無人收)
신귀번원구귀곡(新鬼煩寃舊鬼哭)
천음우습성추추(天陰雨濕聲啾啾)
딸을 낳으면 차라리 이웃에 시집이라도 보내지만
아들을 낳으면 전쟁에서 죽어 땅에 묻히고 그 위에 풀들이나 자란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청해호의 가에
예로부터 백골을 아무도 거두지 않는 것을.
새로 죽은 귀신이 귀찮게 원망의 소리를 하면, 오래전에 죽은 귀신은 통곡을 한다.
하늘이 어둡고 비가 내려민 원망과 통곡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진다.
여기에 묘사한 것은 바로 전쟁터의 참상이다.
간단히 처리한다. 그 자리에 집단으로 묻는다.
당연히, 대다수의 전쟁터에서 전사한 사병을 처리하는 방식은 비교적 간단하다. 즉, 집단매장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자기편의 전사병사의 시신을 거두어 묻는 것이다. 자기편의 전사자의 시신은 집단매장으로 마구잡이로 묻지는 않는다. 시신을 간단히 처리한 후, 나란히 놓고, 최종적으로 묻는 것이다. 그후 표시를 한다. 다만 적군의 시신을 처리할 때는 이렇게 신경써서 해주지 않는다. 그냥 집단매장해버린다. 큰 구덩이를 하나 파고, 시신에 아무런 처리도 하지 않고, 직접 구덩이에 던져 넣고 묻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시신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부패하여 악취가 나기 때문이다. 특히 날씨가 따뜻한 때는 시신이 금방 악취를 뿜는다. 만일 적시에 처리하지 않으면 세균이 자라고, 이는 전염병이 유행하게 만들어, 더욱 큰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불로 태워서 처리한다. 즉 화장한다.
일반적인 경우에, 집단매장은 비교적 힘든 일이고, 안전하지 않다. 많은 병사들은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용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화장이다. 시신을 처리하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부상이 심한 병사나 참혹하게 죽은 시신은 쉽게 변질된다. 적시에 처리하지 않으면 전염병이 돌게 된다. 당시 토장을 제외하고 가장 좋은 방식은 화장이었다. 불의 고온으로 태우면 시신을 처리할 수 있을 뿐아니라, 세균이 자라는 것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화장은 전통적인 방식이다. 화장을 통하여 사자의 영혼을 정화할 수 있고, 사자가 극락세계 혹은 천당에 들어가게 할 수 있다. 이런 형식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즉 사자의 시신 아래에 마른 나무가지, 마른 풀 혹은 장작을 놓아두고 불을 붙여서 시신을 태운다. 마지막에 유골을 채집한다. 이것은 2차대전때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죽은 병사의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과 비슷하다.
경관(京觀), 비교적 잔인한 방법
고대 전쟁터에서, 승리자는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거나, 복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시신을 길가에 쌓아두어 '경관'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패전한 시신을 모조리 길가에 쌓아둔다. 그후 시신을 고정시켜 피라미드모양으로 쌓아둔다.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 상대방의 시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신을 성문에 걸어두거나, 혹은 수급을 잘라서 성문에 걸어두는 것이다. 이런 것도 모두 시신처리방식이다. 다만 경관은 분풀이를 하는 의미가 있다. 이런 방식은 확실히 죽은 자에게 공평하지 않고, 모욕적이다.
사망한 병사의 시신을 군량으로 먹는다.
고대의 전투는 지금과 달랐다. 물자보급이 비교적 곤란했다. 특히 음식물이 종류가 비교적 적었다. 일단 식량공급이 중단되면, 패전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대표적인 전투에서 식량을 운송하는 물자수송부대가 가장 먼저 공격받는다. 양초가 중단되면 병사들의 전투력이 하락한다. 일반적으로 수천수만에 이르는 군대에 식량공급이 중단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가장 힘들었을 때는 결국 전사한 병사의 시신을 먹게 된다. 이렇게 하면 배는 채울 수 있고, 전투력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겉으로 보기에 잔인하고, 구역질나지만, 다만 방법이 없다. 고대의 전쟁은 쌍방의 병사들이 죽기살기로 싸우는 것이다. 고대역사상 이런 경우가 많이 발생했다. 이런 시신처리방식은 아마도 가장 잔인한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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