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목역사군(夏目历史君)
정사(正史)를 얘기하자면 우리는 아마도 모두 공인된 <이십사사>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십사사>에 무엇이 들어가는지를 묻는다면 완벽하게 답안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언급하는 것은 개략 <사기> <한서> <후한서> 혹은 <삼국지>일 것이다.
이 4사는 <이십사사>중에서 "전사사(前四史)"라고 불린다. 모두 개인적으로 편찬한 사서이다. 이런 상황은 기이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모든 시기의 역사는 다 중요한데, 왜 <삼국지>이후의 사서들은 이들 전사서에 비하여 명성이 높지 못한 것일까?
- <전사사>와 <후이십사>의 큰 차이점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얘기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이십사사>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처음에 <이십사사>는 "<삼사(三史)>"로 불렸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사기>, <한서>, <동관한기(东观汉记)>이다. 당나라에 이르러, <동관한기>는 점차 유실되고, <삼사>는 <사기> <한서> <후한서>로 바뀐다.
당나라에 이르러, <삼국지>등 10사가 추가되어 <십삼사(十三史)>가 된다. 동시에 <삼국지>이후의 사서는 모두 사관의 관신 혹은 황제의 명으로 편찬하게 되었다. 즉 관수(官修)의 사서이다. 이는 <전사사>가 개인이 저술한 것과 구분되는 점이다.
송날에 이르러 다시 4사가 추가되어 <십칠사>가 된다. 원나라에 이르러 다시 3사가 추가되어 <이십사>가 되고, 명나라때 다시 <원사>가 추가되어 <이십일사>가 된다; 청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이십사사>가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이십사사>의 완성과정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런 구체적인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전사사>와 <후이십사>가 분명하게 다른 점은 바로 편찬한 사람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징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전사사>는 작자가 조정의 허가를 받아 관방도서로 출간되지만, 어느 정도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간다. 그러나 <후이십사>는 관수사서이고, 상대적으로 '객관'적이다.
그리고 사서편찬을 책임지는 사람은 모두 고위관료였다. 예를 들어, 승상 혹은 대학사이다. 그리고 일부 저명한 문인 겸 관리들도 참여한다. 이로 인하여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은 바로 황제와 사서편찬에 참가한 대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내용의 진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관수사서의 작자는 모두 '이름만 걸어놓은 것'이다. 한 큰인물로 그 사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조작은 뒤의 <후이십사>의 학술가치가 <전사사>에 비하여 조금 떨어지게 만들고, 유명도도 자연히 못하게 되었다.
사서의 편찬이 개인에서 관방으로 바뀌면서 한 왕조의 역사에 대한 해석권이 황제와 그의 대신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황제와 대신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사람들은 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사람들의 사상을 황제에 의해 통제된다. 이것은 봉건왕조의 통치자에게 좋은 일이다. 그러나 후세의 사서연구자들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다.
2. <사기>의 우세
사수, 관수의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서편찬방식은 <전사사>와 <후이십사>의 '논찬(论赞)'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논찬은 일종의 문체예술이며, 사상문화와 큰 관계가 있다.
<전사서>의 '논찬'은 생기발랄하고, 각각 다르다.
<이십사사>중 첫번째 사서인 <사기>는 "사가지절창(史家之绝唱), 무운지이소(无韵之离骚)"라고 불린다. 아주 높은 사학적 가치와 명성을 지니고 있다. 논찬의 형식과 풍격은 논정(论政), 주경(注经)과 긴밀하게 관련이 있다.
'논정', '주경'은 선진이래 논의하는 두 가지 발전단서이고, 글을 쓰는 두 가지 주요한 이슈였다.
글을 쓰는 외에 '주경'은 사회실무상으로도 광범위하게 응용되었다. 이를 통해 시비판단, 사건처리를 했다. 그리하여 당시 사회양형기준의 하나였다.
사마천은 바로 이러한 환경하에서 <사기>를 썼다. 그러므로, <사기>는 불가피하게 논정, 주경의 영향을 받게 된다. <사기>에서, 거의 모든 '논찬'은 '자주(自注)"이다. 즉, 사마천이 자신이 글을 쓴 목적과 의도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들 '자주'는 완벽하게 사마천이 육경과 제자백가의 재료를 분석하여 정확하게 천인관계를 처리하고, 고금의 규율변화를 인식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전 사람들의 일을 통하여 좋고 나쁨을 판단하고, 좋아하고 싫어함을 표시하는 것을 글을 쓴 목적으로 삼았다.
논찬 문체는 이렇게 논쟁하는 기풍의 시대분위기 속에서 잉태되었고, 후세에 모범이 된다. 이것이 또한 <사기>가 <이십사사>중 가장 유명하게 된 가장 큰 원인중 하나이다.
3. <한서>의 특수
<한서>의 논찬은 설경논란(说经论难)의 기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한초기, 광무제 유수는 한편으로 더 국가를 잘 다스리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취미를 위하여 자주 관리들과 유가의 경전을 탐구하고 논의했다. 이를 통해 유학자들이 서로 경전의 어려운 점을 해석하고 경전의 뜻을 파악하도록 하는 기풍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논의를 잘하는 학자들에게는 일정한 상도 내렸다.
광무제와 나중의 여러 황제들이 추진하는 바에 따라, 동한에는 '논란'의 풍조가 일어난다. 동시에 '논란'이 뛰어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게 된다. 반고(班固)는 이런 사회환경하에서 살았다. 자연스럽게 논란의 훈도를 받아 논란에 능했다.
조정의 대사에 대한 변론과정에서 반고는 자신의 논란재능을 가지고 여러번 상을 받았다. 이를 보면 그는 유학경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서>의 논찬에서 반고는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를 함에 있어서 자주 유가경서의 어떤 관점을 사용했다.
그외에, 반고는 <한서>에서 특히 결론을 내리는 것을 좋아했다. 이를 통해 보편적인 규율을 얻어냈다. 이는 동한시대에 논란이 귀납적인 사고방식이었던 것과 같다. 바로 이런 특색있는 논란방식으로 <한서>도 비교적 큰 인기를 얻게 된다.
4. <삼국지>와 <후한서>의 독보적인 점
동한말기, 설경논란은 점점 쇠락한다. 이전의 '언지유물(言之有物)'은 '허언식사(虚言饰词)'로 바뀐다. 게다가 전란이 빈발하면서, 개인정신에 주목하는 것이 당시의 주류분위기였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내용도 이전의 경서에서 사람의 재능으로 바뀐다. 재능을 논하는 것이 당시의 사회풍조가 된다. 이런 시대에 탄생한 <삼국지>의 논찬은 역사인물의 재능, 품성과 능력을 평가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상응하는 별명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유비는 "영웅지기(英雄之器)"로 부른다. 이런 독특한 논찬방식은 우리에게 각종 역사인물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나중의 통치자에게 인재를 기용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경세치용'의 역사저작전통을 발양했다.
앞의 두 개의 사서와 비교하면, <삼국지>의 논찬은 더욱 독보적이다. 그리고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래어 유명하게 된 것이다.
재능과 성격을 평론하는 풍조는 삼국 정시(조위 조방의 연호)시기에 비로소 현풍(玄风)으로 대체된다. 현담지풍은 지식의 박식함과 반응이 영민하며, 말재주가 뛰어나야 했다. 말재주가 좋지 못하면 글씨를 써서 논쟁하거나 변론사를 글로 썼다.
<후한서>의 논찬은 이 영향을 받는다. 아주 세세하네 명리를 분석하고, 새로운 관념을 제시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이것들은 당시에 모두 널리 칭찬받던 것들이다. 또한 이렇게 정교하고 교묘한 해석은 <후한서>의 지명도를 높여준다.
5. 결론
<전사사>의 논찬을 살펴보면, 각각 특색이 있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파고 든다. 그래서 인기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의 <후이십사>의 논찬은 형식에 그쳤고, 퇴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나중의 사회환경이 <전사사>때만큼 사상이 활발하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설사 사회기풍이 바뀌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서편찬이 황제의 수중에 쥐어져 있는 한, 사관이 자신의 견해를 갖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더더구나 사회기풍의 영향은 말할 것도 없다.
바로 사서편찬권한이 개인의 수중에서 황제의 수중으로 넘어간 것은 중대한 변화이다. 그리하여 <전사사>는 천고에 전해지면사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지만, <후이십사>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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