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운향객(云乡客)
역사는 하나의 학문으로 그 목적은 인류활동의 과정과 결과를 기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학문의 요구사항중 하나이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사실을 쓰는 것(写实)"이다. 통치계급이 자신을 미화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격대수사(隔代修史)" 혹은 "역대수사(易代修史)"를 제창했다. 격대수사의 장점은 시간간격이 비교적 가깝고, 각종 참고비교할 자료들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조정이 감독하는 역사편찬은 마찬가지로 통치계급의 입김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후세의 역사학자들은 절대로 단지 어느 왕조의 사서만 읽지 않고, 반드시 주변 다른 나라의 사서를 참조하여 비교한다.
원나라의 원혜종(元惠宗) 지정3년(1343년) 삼월, 조정은 요(辽), 금(金), 송(宋) 3사를 편찬할 것을 명한다. 지정5년(1345년) 십월 완성된다. 겨우 2년반이 걸렸다.
명나라때 편찬한 원사는 전후로 2차례에 걸쳐 개관수사(开馆修史), 책을 완성하는데 겨우 331일이 걸렸다. 청나라때 학자 전대흔(钱大昕, 1728-1804)은 이렇게 말했다: "고금의 사서를 만드는데 빠르기로 <원사>만한 경우가 없었다; 그리고 문장의 누추하고 졸렬하기로도 역시 <원사>만한 경우가 없었다."
청말민초의 가소민(柯劭忞, 1848-1933)은 삼십년의 노력을 들여 <신원사(新元史)>를 완성한다. 267권으로 만족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쓸만한 원나라사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나라는 순치2년(1645년) 오월, 관을 설치하여 명사를 편찬했다. 건륭54년(1789년)에 이르러 <명사> 전체가 완성된다. 144년이 걸렸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원시자료인 <명실록>과 비교하면 여러 기재가 모순되고 탈루되어있다고 말한다.
청나라가 패망한 후, 중화민국정부는 1914년 청사관(清史馆)을 설치하고, 1927년 초고를 완성하여, <청사고(清史稿)>라는 이름으로 간행한다. 제목을 그렇게 붙인 것은 아직 완성본이 아니라는 뜻이었따. 1954년, 대만으로 넘어간 장개석정권은 <청사고>를 바탕으로 수정을 진행하여 1년후에 완성하여 <청사(清史)>라는 이름으로 간행한다. 그러나 이 책은 성급하게 간행하여, 잘못되고 누락된 곳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주편(主编)중 한명인 장기윤(张其昀)은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신사학(新史学)의 체제와 풍격에 따라 청나라일대의 문헌을 망라하여, 이상적인 신청사(新清史)를 완성하는 것은 이후의 작가들에게 큰 희망을 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1950년대부터 먼저 당시의 국가부주석 동필무(董必武)가 청사를 새로 편찬할 것을 건의했지만,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이루어지지는 못한다. 1959년, 총리 주은래(周恩来)는 당시 북경시 부시장이던 오함(吴晗)에게 청사편찬방안을 제정하도록 위임한다. 그러나 국내형세가 바뀌면서 이 또한 중단된다. 1963년, 모택동은 범문란(范文澜)등 역사학자를 불러 청사편찬문제를 토론한다. 그리고 1965년 중앙선전부에서 곽영추(郭影秋), 윤달(尹达), 관산복(关山复), 유대년(刘大年), 퉁동(佟冬), 유도생(刘导生), 대일(戴逸)의 7명으로 청사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중국인민대학에 청사연구소를 성립할 준비작업을 한다. 그러나 편찬업무는 금방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중단된다. 2002년 8월, 중공중앙, 국무원은 마침내 결정을 내려 정식으로 청사편찬공정을 시작한다. 같은 해 12월, 국가청사편찬위원회가 정식으로 성립된다. 저명한 역사학자 대일이 편찬위원회 주임을 맡는다.
10년의 노력을 거쳐, 2012년 연말, 전체 분량의 95% 원고가 이미 완성된다. 2016년 1월 1일 <인민일보> 해외판에는 전체 분량의 원고가 이미 완성되었으며 심의통합과정을 진행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후, 정치심사를 통과하지 못하여, 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전문학자들이 편찬한 신 <청사>는 지금까지도 "태중(胎中)"에 있다. 최종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금년 1월 24일, 신 <청사>의 편찬위원회 주임 대일 선생이 신 <청사>가 과실을 맺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신 <청사>가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원인에 대하여 월스트리트저널은 소식통을 인용하여 이렇게 보도했다. <청사>는 심사때 심하게 비판을 받는다. 의견중에는 서방열강의 청나라제도개혁에 대한 영향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청나라가 대통일국가로서 두드러진 것이 부족했다는 등등이다(월스트리트저널 2024. 3. 26,자 <시진핑이 역사를 새로 쓰려 한다. 청사편찬프로젝트는 곤경에 빠졌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설사 격대수사라 하더라도, 권력자가 '주도'하게 되면 권력자와 역사학자간에 역사편찬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 그리하여 역사편찬과정에서 비학술적인 마찰이나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당권자의 역사에 대한 태도를 말하자면, 몇가지 사례를 비교해볼 수 있다. 러시아민족은 '대슬라브' 민족관, 역사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일찌기 몽골에 지배받았던 역사를 초기에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취했다. 최근 들어 관념이 약간 바뀌어, 제정러시아제국이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민족과 초원민족이 '양호한 상호작용'을 한 결과로 본다. 카자흐스탄의 토카예프는 '정볻당한' 역사적 부담이 없다. 그래서 기꺼이 '대초원에서 유목문명을 직접 계승한 자'로 자처한다.
이상의 두 국가와 비교하면, 당대중국의 지도자들의 흉금은 보다 넓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진시명월한시관(秦时明月汉时関)"에 신경쓰지 않고, "범아강한, 수원필주(犯我强汉,虽远必诛)"라는 말도 하지 않으며, "상마격광호, 하마초군서(上马击狂胡,下马草军书)", "수청관새편취가, 불견중원유전차(愁听关塞遍吹茄,不见中原有战车)"의 싯구를 음송하도록 장려하지도 않는다. 금나라사람, 몽골사람, 여진사람들까지도 '한가족'으로 받아들여서, '이민족침입' '국파가망(国破家亡)'은 없고, 그저 '형제상쟁(兄弟相争)'만 있다고 본다.
즉, 이런 역사관, 가국관은 역사학자들로 하여금 역사저술의 난이도를 높인다. 어떤 각도, 태도로 '양주십일(扬州十日)', '가정삼도(嘉定三屠)'를 묘사할 것인지도 머리를 짜내야 한다. 더욱 어려운 점은 어떻게 청정부의 패망을 중국공산당이 인민을 이끌고 중국을 외국열강의 '백년굴욕'에서 구해낸 것과 연결시켜 이를 신 <청사>의 메인스트림으로 삼을 것인지이다.
이런 요구조건에 맞추어 역사를 기술하려면, 필자의 생각에 역사학자들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상성(相声)배우들에게 부탁하는 편이 더욱 효율적이 아닐까 싶다.
'중국의 역사분석 > 중국역사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촉(蜀)": 중국역사상 사천(四川)이외의 지방에도 있었다. (1) | 2024.10.02 |
---|---|
고대전쟁에 사용된 진법(陣法)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2) | 2024.10.01 |
<이십사사(二十四史)>중 왜 뒤의 20사는 유명하지 않을까? (1) | 2024.04.18 |
<죽서기년(竹書紀年)> vs <사기(史記)> : 어느 기록이 더 믿을만할까? (0) | 2022.05.01 |
중국역사상의 사대천부(四大天府) (0) | 2022.01.17 |